감정(感情)의 감정(鑑定), <베스트 오퍼>
인간의 감정은 예술작품 같은 거야
영화에서 로버트가 잃어버린 부품들을 하나씩 찾아 수많은 톱니바퀴를 엮어 로봇을 복원해내는 과정처럼, <베스트 오퍼>는 자잘하게 흩어진 단서들을 정교하게 흩었다 하나로 모은다.
※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 전부를 걸 만한 가치가 있거나, 내 전부를 걸어도 아깝지 않은 내 인생의 경매 물품이 있는가? 경매에서의 최고 제시액을 의미하는 ‘베스트 오퍼’를 제목으로 내건 영화 <베스트 오퍼>는 제목처럼 흥미진진하고 반추해 볼만한 가치를 우아하면서도 묵직한 힘으로 보여주고 격정적으로 되짚어가는 작품이다. 꽤 영리한 관객들이라면 중반 이후 이야기의 반전을 눈치 챌 법한데, 그래도 감상에 전혀 방해가 되지 않을 만큼 <베스트 오퍼>는 미스터리의 구조 속에 까칠하면서도 날카로운 풍자를 숨겨둔다. 노출된 미스터리조차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이 영화의 진짜 주제는 어쩌면 ‘모작’된 이들의 삶과 감정이 드러나는 순간부터 겪게 되는 관객들의 내면에 담긴다.
영화는 60대에 생애 첫 사랑에 빠진 남자를 통해 그렇게 끊임없이 삶을 반추하게 만든다. 평생을 은둔자로 살아온 한 남자의 인생을 모작하는 여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버린 남자라는 설정 속에 ‘삶의 가치’를 녹여내는 실력이 거장답다. 마치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 같지만, 사실 모든 것이 사라진 후에야 반추하게 되는 진정한 내 삶이라는 측면에서, 어쩌면 마지막 장면은 속아버린 노인네의 쓸쓸한 상실감만을 담아내지는 않는다.
이토록 우아한 거짓말
최고의 감정인이자 경매사인 버질 올드먼(제프리 러쉬)은 사람들에게 늘 대접받는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정작 그는 타인과의 관계를 극도로 꺼리는 까다로운 성격을 가지고 있다. 늘 장갑과 손수건을 지니고 다닐 만큼 결벽증이 심하다. 63세가 되는 나이까지 그는 진정 사랑해본 여인이 없다. 정지된 프레임 속, 명화 속 여인들만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러던 어느 날 클레어(실비아 획스)라는 여인이 부모님의 유품을 감정해 달라는 연락을 받게 되는데, 대인공포증과 광장공포증을 지니고 갇혀 지내는 그녀에게 동질감과 호기심을 느낀 버질은 점차 사랑에 빠져든다. 클레어에 대한 사랑이 깊어질수록 늘 한결같던 그의 일상은 심하게 뒤틀린다.
버질 올드먼 주위에는 세 명의 주요 인물이 등장한다. 버질의 마음을 뒤흔든 클레어, 보캉송 로봇의 복원을 도와주는 기술자 로버트(짐 스터게스), 실패한 화가이자 버질을 도와 경매사기를 돕는 빌리(도널드 서덜랜드)가 그들이다. 각각 연인, 조력자, 친구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미스터리한 영화의 분위기처럼 이들의 태도는 어느 시점부터 불온해 보인다. 이 미심쩍은 사람들의 태도 때문에 관객들은 버질보다는 일찍 이들의 정체를 의심하게 되지만, 정작 평생을 진품과 가품을 감정하며 살아온 버질에게 사람의 감정(感情)이야 말로 감정(鑑定)불가한 영역이다.
이미 의심에 빠진 관객들과 사춘기 소년처럼 사랑에 들뜬 버질의 무신경함이 충돌하면서 생기는 미스터리한 기운은 <베스트 오퍼>를 더욱 흥미롭게 이끌어가는 일종의 게임이 된다.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은 버질의 진심 사이로 인물들에 대한 관객의 ‘의심’을 더해 결코 호감이 가기 어려운 버질이라는 인물에게 일종의 동정심 혹은 응원하는 마음을 가지게 만든다. 그래서 63세에 찾아온 저 기막힌 사랑이 결코 기만이 아니길 바라게 되는 것이다.
영화 <베스트 오퍼> 스틸컷
우리에겐 <시네마 천국>으로 알려진 이탈리아의 거장 주세페 토르나토레는 엔리오 모리코네의 아름다운 선율 속에,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회화작품을 더해 품위 있는 장면들을 만들어 낸다. 클리세 같은 표현이지만, <베스트 오퍼>는 ‘고품격 스릴러’라는 수식어가 정말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자신을 둘러싼 벽을 허물고 무너진 더미 속에서 방황하는 버질 역할의 제프리 러쉬는 까다롭지만 우아한 영국식 억양으로 완벽하게 소화해낸다.
우리에겐 배두나의 연인으로 더 잘 알려진 짐 스터게스는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는 바람둥이의 매혹을 보여준다. 작품의 키를 움켜쥔 클레어 역할의 실비아 힉스는 신경병으로 무너질 것 같은 여인의 모습 속에 팜므 파탈의 치명적 매혹까지 숨겨놓는다. 여기에 버질의 친구이자 영화가 상징하는 이야기를 품어내는 빌리 역할의 도널드 서덜랜드까지 합쳐지면 톱니바퀴보다 더 정교한 연기가 완성된다.
영화에서 로버트가 잃어버린 부품들을 하나씩 찾아 수많은 톱니바퀴를 엮어 로봇을 복원해내는 과정처럼, <베스트 오퍼>는 자잘하게 흩어진 단서들을 정교하게 흩었다 하나로 모은다. 그리고 그 결말은 이미 예측 가능한 것이긴 하지만 직조된 이야기가 전하는 메시지는 긴 여운을 남기는 울림이 된다. 게임이 끝난 이후에 마치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 같지만, 사실 진정한 게임의 승자는 감정의 사기꾼들이 아니라, 잃어버린 감정을 되찾은 버질의 몫일 수도 있다는 점이 <베스트 오퍼>를 더욱 의미 있게 만든다.
진품과 위조품에 대해 버질과 빌 리가 나누는 대화 속에 영화의 의미가 담긴다. 버질은 위조품 역시도 진품의 미덕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창작자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욕망이라고 설명한다. 모사하는 화가들은 자신을 알리고 싶은 욕심에 그림의 옷 주름이나 눈동자 등에 슬그머니 자기 이니셜을 적고는 한다는 것이다. 실패한 화가이자, 버질의 조력자였던 빌리의 대사는 <베스트 오퍼>를 요약해서 설명해주는 명대사 중 하나이다.
인간의 감정은 예술작품 같은 거야. 위조 될 수 있는 거지. 원본과 비슷해 보이지 만 위작일 수도 있네. 모든 걸 속일 수 있다는 말일세. 기쁨, 고통, 미움, 병, 회복, 사랑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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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태그: 베스트오퍼, 짐스터게스, 쥬세페 토르나토레, 제프리 러쉬, 실비아 획스, 시네마 천국, 최재훈
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