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앞서, 먼저 우는 아저씨 <우는 남자>
<우는 남자>는 인물의 감정선이 드러난 감성 느와르로 완성되었어야 한다
이정범 감독은 화려한 스타일에 비해 캐릭터가 평면적이라는 전작의 평가를 쇄신하려는 듯, 곤이라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만들기 위해 아주 많은 시간을 그에게 투자한다.
이정범 감독의 2010년작 <아저씨>를 얘기할 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대부분 원빈이 머리를 밀어버리는 장면을 떠올릴 것이다. 주인공이 혼자 머리를 깎는 장면은 대부분 결연한 다짐을 위한 것이다. <G.I 제인>의 데미 무어가 남성과의 동등한 위치를 얻기 위해 감행하는 삭발 장면으로 설명하면 조금 더 쉽게 이해될 것이다. 삭발은 대부분 주인공의 광기와 결심을 설명하기 위한 장면이지만, <아저씨>의 삭발 장면은 의도와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덥수룩한 머리에 절반쯤 가려져 있던 원빈의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 관객들은 그의 정서를 받아들이기에 앞서 훤히 드러난 조각상 같은 원빈의 외모에 감탄하게 된다.
<아저씨>는 원빈이라는 배우를 통해, 의도하지 않은 색다른 장면들을 만들어낸다. 옆집 사는 아저씨일리 없는 원빈을 통해 재현되는 액션 장면은 그 자체로 판타지가 되고, 피가 튀는 잔혹한 장면도 원빈을 통해 그려지니 미학적인 장면처럼 보이는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옆집 소녀 소미의 존재 역시 실체가 불분명한 유령 같지만, 김새론이라는 배우를 만나 보호받아야 할 아이콘처럼 받아들여진다. 그렇게 원빈과 김새론이라는 배우가 전달하는 이미지의 불균질함 때문에 의도한 바와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장면들은 영화 <아저씨>를 말할 때 아쉬운 점이라고 지적됨과 동시에 <아저씨>를 매혹적으로 만드는 장점이기도 했다.
사실 <우는 남자>를 보면서 전작 <아저씨>를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결과적으로는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가 끝난 후 줄곧 <아저씨>를 되짚게 된다. <아저씨>는 불균질한 이미지가 주는 매혹으로 부족한 내러티브를 매끄럽게 감춰준 영화였다. 이정범 감독은 지난 4년 동안 <아저씨>가 이룬 성과와 미흡했던 점에 대해 누구보다 고민하고 치열하게 싸웠을 것이다. 어떤 작품으로 돌아오든 사람들은 <아저씨>를 이야기할 것이고, <아저씨>와 비교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정범 감독은 이 점에 맞서 정공법을 선택한다.
그는 <우는 남자>를 통해 전작의 아우라를 굳이 지우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쉽다고 지적받았던 인물 사이의 관계도와 인물의 현재를 만들어낸 과거까지 긴밀하게 배치해서, 과잉된 이미지에 앞서 ‘서사’에 욕심을 부린다. 그런 감독의 욕심이 제대로 완성되었다면 <우는 남자>는 인물의 감정선이 드러난 감성 느와르로 완성되었어야 한다. 문제는 이 모든 것들이 기대한 만큼,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아저씨>를 움직이게 한 동력이 ‘구원’이었다면 <우는 남자>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속죄’라는 점이 조금 다르긴 하다.
영화 <우는남자> 스틸컷
발화점이 다른 배우와 이야기
냉혹한 킬러 곤(장동건)은 임무를 수행하던 중 어린 소녀를 실수로 죽이고 만다. 죄책감에 킬러 일을 그만두려는 그에게 마지막 미션으로 주어진 것은 소녀의 엄마 모경(김민희)을 죽이라는 명령이다. 모경을 쫓아 한국에 온 곤은 냉혹한 척하지만 아이를 잃은 슬픔에 무너지는 모경에게 점차 동화된다. 그리고 모경을 죽이는 대신 그녀를 살리기 위해 애를 쓴다. 어느 순간, 곤은 모경에게서 자신의 엄마를 찾는다. 그리고 그녀를 지키는 것으로 자신의 죄를 속죄하고 동시에 스스로를 구원하려 한다.
이정범 감독은 화려한 스타일에 비해 캐릭터가 평면적이라는 전작의 평가를 쇄신하려는 듯, 곤이라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만들기 위해 아주 많은 시간을 그에게 투자한다. 냉혹한 킬러가 될 수밖에 없었던 과거와 어린 소녀를 죽게 만든 죄의식과 ‘우는 남자’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 모경을 지켜야하는 당위성과 모경을 지켜 속죄에 이르는 과정들을 아주 긴 시간동안 보여준다. 덕분에 이야기는 조금 더 정교해진 것 같지만, 아쉽게도 이야기의 전개는 관객들이 예측하는 수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곤과 모경 사이의 관계에 꽤 많은 시간을 투자한 것에 비한다면 인물 사이에 끈적한 교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도 아쉬운 점이라 할 수 있다.
<우는 남자>의 승패를 좌우할 키워드는 제목처럼 ‘우는 남자’의 이야기에 관객이 얼마나 교감하고 공감하는지에 달렸을 텐데, ‘곤’이라는 인물에게 교감하기에 장동건의 몸을 빌려 재현된 캐릭터는 계속 부유하는 듯한 느낌이다. 박제가 된 듯한 미남 장동건은 줄곧 분노와 짜증의 표정을 반복하는데, 그 속에서 복잡한 내면의 트라우마를 발견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이는 굳이 장동건이라는 배우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한국어와 영어를 오가는 무국적자 같은 곤이라는 인물이 ‘한국’이라는 땅 위에서 벌이는 낯선 이야기 때문이기도 하다.
중국 마피아들 사이의 총격전이라는 변명을 동원하더라도, 대낮 주택가에서의 총격전이나 도심 한복판에서의 폭탄 테러라는 이야기의 소재는 현실성이 떨어진다. 소재의 비현실성은 캐릭터의 현실성으로 살렸어야 하는데, 미국 사막 한가운데 권총 자살을 하고 마는 엄마라는 곤의 과거사처럼, 킬러가 된 현재, 곤이라는 캐릭터 자체도 그거 겉멋 부리는 것처럼 보인다.
기대했던 대로 김민희가 연기자로서의 발화점을 제대로 찾아낸 것이 <우는 남자>를 살려낸다. 울어야 하는 이유가,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자살을 시도한 이유가 그녀에겐 명확하게 있다. 곤에 비해 입체적이지 못한 모경이 오히려 더 많은 감정을 보여주어 설득력 있는 캐릭터가 된 이유는 오직 김민희의 살아있는 연기 때문이기도 하고, ‘모성’이라는 보편성 있는 옷을 입은 덕분이기도 하다.
어떤 지점에서 계속 발화되는 배우들의 연기에도 불구하고, 이야기 자체에서 발화점을 찾아낼 수 없다는 점이 <우는 남자>를 흔들리게 만든다. 감성 느와르라고 하기에도 하드 고어 액션이라도 하기에도 조금 부족하다. 맨손 액션을 통해 재현되는 수컷들의 땀 냄새를 기대한 관객들에게 줄곧 총기 액션으로 진행되는 액션 장면은 다국적 인물들 사이의 ‘영어 대화’처럼 어색하고, 아무리 맞아도 다시 살아나는 악인들에 대한 묘사와 아무리 쏴도 떨어지지 않는 총알의 이미지는 80년대 홍콩영화의 이미지를 소진한다.
게다가 절대 악이라는 당위에 맞서 싸운 ‘아저씨’에 비해, 곤이 맞서 싸우는 대상은 그 실체가 어느 순간 불분명해진다. 게다가 갑자기 나타난 모경을 위해 형제나 다름없는 자신의 조직원에게 총구를 겨눌만한 동기도 충분히 설득되지 못한다. 따라서 마지막 장면에서 곤을 애타게 부르는 모경에게서 간절함을 느끼기가 힘들고, 에필로그처럼 삽입된 곤의 우는 장면은 일종의 사족처럼 보인다. 장동건이라는 배우를 통해 ‘울 수밖에 없는 남자’의 이야기를 기대한 관객들은 대놓고 정말 ‘우는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엔딩에 당황할 것이다. 게다가 이 ‘킬러 아저씨’는 관객과의 교감 없이 너무 혼자, 앞서 (혹은 너무 늦게) 울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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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