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자면, 매주는 아니어도 꽤 자주 그 프로그램을 봤다. 혼자일 때보다 가족과 함께일 때가 더 많았다. 부동자세로 앉아 텔레비전 화면에만 집중을 했던 건 아니다. 때론 손톱을 깎으며 때론 귤을 씹으며 건성건성 보다 말다 했다. 건성으로 보다 말다 하기에 이만큼 잘 어울리는 프로그램은 없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귤 조각을 씹듯 출연자들을 씹기도 했다. 저 남자 이상해. 며칠이나 봤다고 저렇게 한 여자한테 목숨을 걸지? 저 여자도 이상해.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은 거지 왜 자꾸 사람 간을 봐? 역시 건성건성, 나는 지껄이곤 했다. 저기 들어가면 멀쩡한 사람이 다 이상해지나? 설마, 저거 다 대본이겠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간혹 과육 대신 혓바닥을 같이 씹은 적도 있었다.
리얼 다큐멘터리를 표방하는 SBS <짝>의 여성 출연자가 촬영 장소에서 자살했다는 뉴스를 보고서 말문이 턱 막혔다. 그리고 그 사람,
<트루먼 쇼(The Truman Show)>의 주인공 트루먼 버뱅크(짐 캐리)가 떠올랐다.
‘이거 혹시 나만 모르는 쇼 아니야?’ 유독 나에게만 이상한 일이 연거푸 일어나는 것 같을 때 누구나 그런 상상을 해보았을지 모른다. 트루먼은 그 악몽을 현실에서 대면한 사람이다. 그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철저히 기획된 리얼리티 쇼 속에 갇혀 산 남자이며, 그의 삶은 텔레비전 방송국의 이른바 ‘리얼리티 쇼’의 어두운 뒷면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겉으로 볼 때 그는 보험 회사에 다니는 평범한 시민으로 자라났다. 아름다운 아내와 함께 고향 도시 시헤이븐에서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다. 매일 마주치는 이웃도, 그리운 첫사랑도, 절친한 친구도 있다. 그렇지만 그가 만나는 사람들도, 그가 사는 세도 진짜가 아니다. 실제로 그는 24시간 생방송으로 일거수일투족이 전 세계에 중계되는 ‘트루먼 쇼’의 주인공이며, 그가 사는 곳은 특별히 제작된 커다란 세트장이다. 그가 겪어온 모든 인생 행로는 제작팀에 의해 정교하게 짜인 것이었다. 그걸 딱 한 사람, 주연 배우인 트루먼만 모른다.
그가 갇혀 살던 곳은 일반적인 의미의 감옥과는 달랐다. 그는 어떤 물리적 구속도 없이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했고, 인생의 갈피갈피에서 자신이 내린 수많은 선택들이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라고 의심 없이 믿었다. 보통 사람들이 그렇듯 그의 마음속에도 추억이라는 이름의 다채로운 무늬가 가득하다. 그러나 그의 가슴속 깊은 슬픔으로 간직된 어릴 적 아버지의 익사(溺死) 사고는 트루먼이 물을 두려워하도록 만들기 위해 정교하게 연출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평생 바다 건너 먼 세계로 갈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아프게 각인된 그의 상처는 진실인가, 허구인가.
마침내 거짓 세계를 탈출하려는 트루먼을 프로그램의 총책임자 크리스토퍼(에드 해리스)가 설득한다. 세트 바깥의 세상은 얼마나 행복할 것 같으냐고. 거짓과 기만 없이 완벽히 통제된 세상에서 사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른다는 그의 말이 궤변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솔깃하게 들리기도 하고, 그런 내가 무서워 뒤통수가 서늘해진다.
그 프로그램의 촬영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건, 방송을 보며 건성으로 킥킥대던 나 자신에 대해서 뿐이다. 프로그램이 폐지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타인의 삶을 훔쳐보면서도 훔쳐본다는 의식조차 하지 못하게 만드는 시스템에 대한 반성이 먼저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남의 ‘진짜 삶’이라는 걸 들여다보면서나 웃을 수 있는, 우리의 지루하고 빈곤한 삶에 대한 반성도 그 뒤를 따라야 하겠고.
[관련 기사]
-소년과 남자의 경계는 무엇으로 정해지는가?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고 싶었던 그 남자
-특별한 남자, 10년 후 모습도 알고 싶다면…
-인생, 아무도 끝을 모르는 오래달리기
-명예도, 가족도 잃은 한 남자의 외로운 투쟁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