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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과 남자의 경계는 무엇으로 정해지는가?

<어바웃 어 보이>의 윌(휴 그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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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가 결혼을 선언했을 때 우리는 다 입을 딱 벌렸다. 그를 제외한 나머지 친구들이 카톡 채팅방에 모였다. 정말 한대? 그런가 봐. 날도 잡았대. 그래도 설마 하겠어? 난 안 믿어. 기혼 남녀들을 패닉에 빠지게 만든 그는 누구인가?

K가 결혼을 선언했을 때 우리는 다 입을 딱 벌렸다. 그를 제외한 나머지 친구들이 카톡 채팅방에 모였다. 정말 한대? 그런가 봐. 날도 잡았대. 그래도 설마 하겠어? 난 안 믿어. 기혼 남녀들을 패닉에 빠지게 만든 그는 누구인가? 만 마흔을 꽉 채우도록 고고한 싱글로서의 삶을 고수하던 친구다. 버티고 버티던 다른 친구들이 더는 어쩌지 못하고 삼십대 중후반에 줄줄이 기혼자의 대열에 합류해갈 때도 독야청정 홀로 남아 싱글계를 굳건히 지켜온 K. 초식남이라는 단어가 세간의 화제가 되었을 때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그게 뭐? 내 친구는 십년 전부터 그랬는데, 라는 반응을 보이게 했던 K. 그런 K가 느닷없이 ‘변절’을 선언한 것이다.

출처_영화 <어바웃 어 보이>

K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겹쳐 보이던 한 남자가 있다. 영화 <어바웃 어 보이>의 주인공 윌(휴 그랜트)이다. 소년과 남자의 경계는 무엇으로 정해지는가? ‘돈’(또는 미래에 ‘돈’과 상응하는 가치를 창출할만한 무엇인가)을 내 손으로 벌겠다는 의지 여부에 의해서는 아닐까. 성년이 지난 많은 남자들은 부양가족을 위한다는 대의명분을 도시락처럼 어깨에 짊어지고 아침마다 일터로 간다. 만약 그러지 못하면 괴로워한다. 오랫동안 그것은 태양이 동쪽 하늘에서 떠오르는 일만큼이나 당연한 남자의 본분이라고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윌은 일을 하지 않는다. 앞으로 할 계획도 없다. 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긴 저작권료로 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일의 효용이 반드시 생계 해결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지 않느냐 주장해봐야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뿐 아니다. 결혼을 할 마음도 없다. 여자를 사귀려 애쓰지만 연애용일 뿐 진지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아니다. ‘이상해. 그 남자, 갑자기 연락을 안 하네.’ 소개팅을 하고서 이런 고민 해보지 않은 여자는 드물 것이다. (안 해봤다면…… 복 받으신 거다.) 피차 첫눈에 반해 불같은 열정으로 활활 타오른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꽤 진지한 만남이었어. 그만하면 나무랄 데 없는 남자였거든. 매너 좋고 자상하고 쿨하고 혼자서도 자기 생활 잘 하고. 이 정도 남자라면 결혼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지. 난 그저 딱 하나만 물어봤을 뿐이야. 우리가 대체 무슨 사이냐고.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연락을 딱 끊을 수가 있지? 어디 아픈가?’

뭐 정말로 손가락이 부러졌다든지 급작스레 불치병이 발견되었다든지 하는, 피치 못할 사정에 처한 경우도 있겠다. 그러나 그 남자들의 대부분은 그냥 도피한 것뿐이다. 책임지기 싫어서, 아니, 책임지게 될까봐 두려워서, 차라리 줄행랑치는 방법을 택한 거다. ‘아직 마음의 준비도 안 됐는데 얼결에 상대방 페이스에 말려들어 인생의 새로운 국면에 부닥치면 어쩌지? (이들에게 마음의 준비가 완료되는 날이란 영원히 오지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관계를 잘라 버리자.’ ‘헤어지자고 말했는데 여자가 울거나 화를 내면 어떡하지? (이들에게는 예상 매뉴얼에 없는 상황이 가장 곤혹스럽다. 제 안의 미숙함이 드러나 버리기 십상이니.) 에라, 모르겠다. 그냥 잠수 타버리자.’

직업도 필요 없고 가정도 필요 없다니. 이 말은 곧 어떤 것도 책임지지 않는 인생을 살겠다는 의미일 터다. 혹시라도 누가 자기 삶에 ‘책임’이라는 덤터기를 씌울까봐 전전긍긍하는 남자. 이 세상의 성인 남성이라면 마땅히 수행하며 살아야 (한다고 요구되는) 하는 각종 책임들로부터 이리저리 교묘하게 피해 다니는 남자. 제도권 안에서 바라보면 얄밉기 그지없지만, 한편으론 매력적이기도 하다. 모두 다 엇비슷한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남과 다르게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안다면 말이다. 이 ‘어른아이’는 위기마다 어물쩍 도망가거나 아무렇지 않은 척 딴청부리기 전법까지 구사하면서도, 구태여 나쁜 남자라는 오명까지 감수하고서라도, 제도 밖에 머물고자 안간힘을 쓴다.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말은 곧 권리를 가지지 않겠다는 말임을 누구보다 잘 인지하고 있다.

출처_영화 <어바웃 어 보이>

평생 뺀질대며 늙어갈 것만 같던 윌이 열두 살 왕따 소년과 만나 서서히 변화해가는 과정이 영화의 백미다. 결말에서 그는 “인간은 모두 섬이다. 그러나 바다 아래에서 연결되어 있다.”고 조심스레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어디 사람이 그리 후딱 변하는 존재던가. 윌이 여전히 망설이는 인간, 여차하면 도망칠까 궁리부터 하는 인간이라 영화를 다 보고난 뒤에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언제 철들래? 구박하면서도 은근히 속으로 부러워하는 마음, 그런 친구 하나쯤 영원히 곁에 두고 싶다는 욕심 탓인지도 모른다.

자, 이제 내 마지막 싱글 절친 K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K의 결혼식 날 아침, 그때의 그 기혼 남녀 친구들이 카톡방에 다시 모였다. 한명은 사회를 보기로 했고, 또 한명은 축가를 부르기로 했다. 이제 정말 한 시대가 저무는 것 같아. 누군가 먼저 말했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너도 그래? 결혼 축하하는데, K의 새 출발을 응원하는데, 나의 이 쓸쓸한 마음은 뭐지? K가 자유롭고 재미있게 사는 걸 보면서 내심 참 부러웠어. 대리만족이라고 해도 말이야. 그 녀석만은 할아버지가 되어도 쭉 저렇게 살 줄 알았어. 그러길 바랐다고…….

K는 그렇게 무사히 결혼식을 올렸다.

며칠 전,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어야 마땅한 K에게 전화가 왔다. 오오 새 신랑, 웬일이야?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건강하신 줄 알았던 장인의 암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검사결과 생각보다 병이 깊다며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어쩐지 어른의 한숨처럼 들렸다. 와이프가 정말 힘들어 해. 그는 어느새 와이프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고 있었다. 힘들겠다, 네가 옆에서 잘 위로해줘야겠네. 응. 내가 할 역할이 크네. 그리고 녀석은 덧붙였다. 그동안 내가 미뤄두었던 많은 일들이 갑자기 한꺼번에 내 머리 위로 다 쏟아지는 것 같아.

그래. 어쩌면 이 세계엔 책임 총량의 법칙이라는 게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지금 미뤄둔 책임이, 언젠가는 온전히 내 몫이 되는. 이제야 그 소금가마니를 어깨에 짊어지려는 K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K야. 힘내. 파이팅. K에게 답장이 왔다. 친구야. 고마워. 그것은 정말 어른끼리의 인사라고, 나는 감히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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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을 읽고 댓글을 남겨주시면 총 10명을 뽑아 선물을 드립니다. (기간: 12월말 마감)
채널예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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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이현(소설가)

1972년 서울 출생으로 단편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2002년 제1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이후 단편 「타인의 고독」으로 제5회 이효석문학상(2004)을, 단편 「삼풍백화점」으로 제51회 현대문학상(2006)을 수상했다. 작품집으로 『낭만적 사랑과 사회』『타인의 고독』(수상작품집) 『삼풍백화점』(수상작품집) 『달콤한 나의 도시』『오늘의 거짓말』『풍선』『작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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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짓 존스의 일기" 제작진이 보여주는 영국식 진품 코미디. "아메리칸 파이"의 웨이츠 형제가 보여주는 따뜻한 코미디의 세계./주연: 휴 그랜트, 니콜라스 홀트, 토니 콜레트, 레이첼 와이즈/12세 이용가/9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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