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 놀이터

명예도, 가족도 잃은 한 남자의 외로운 투쟁

<미하엘 콜하스의 선택>의 미하엘 콜하스(매즈 미켈슨)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소송을 하기로 결정한 미하엘 콜하스는 그 지역을 다스리는 공주에게 소송장을 내러 간다. 그 대신 떠난 아내는 싸늘한 시체로 돌아온다. 그리고 하나 뿐인 어린 딸의 목숨을 담보로 위협을 해온다. 불의의 공권력이 저기 있다. 나는 정당하고 억울하다. 자,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유난히 선택을 못 하는 인간이다. 결단의 순간을 미루고 또 미루며, 내 몸과 영혼이 온전히 한쪽 길로 접어드는 일을 번번이 회피하며 살아왔다. 하나를 선택하면 필연적으로 포기해야 하는 또 하나의 길이 아쉬워서는 아니다. 구태여 짐작하자면 아마도, 선택과 동시에 내 어깨 위에 오롯이 떨어질 책임의 무게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책임을 내가 과연 짊어지고 걸어갈 수 있을까, 라는 불안감 때문일 것이다. 그건 다시 말하면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아무 것도 책임지지 않는 현재의 상태를 만끽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영원히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모두 그런 평안한 안식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면. 그러나 죽은 뒤라면 모를까, 사는 동안 그것은 가당치 않은 바람일 것이다.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소설 『미하엘 콜하스』 를 원작으로 하는 아르노 드 팔리에르 감독, 매즈 미켈슨 주연의 새 영화 <미하엘 콜하스의 선택>은 이 피할 수 없는 선택(들)에 직면한 한 인간의 고뇌를 그린 작품이다. 그는 16세기 말 프랑스에 살던 말 중개상이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가진 가장이고, 편히 먹고 살 만큼의 충분한 재산도 있다. 어느 날, 다른 지방으로 넘어가려는 다리에서 새 남작이 강압적으로 통행료를 받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에 반발하자 말 두 마리와 하인 한명을 맡기고 떠나라고 한다. 알고 보니 통행료가 있다는 것 자체가 거짓말이었다. 이를 항의하는 그에게 돌아온 건 고된 노동으로 엉망이 된 말들과 도둑 누명을 쓰고 폭행당한 하인이다. 이에 소송을 하기로 결정한 미하엘 콜하스는 그 지역을 다스리는 공주에게 소송장을 내러 간다. 그 대신 떠난 아내는 싸늘한 시체로 돌아온다. 그리고 하나 뿐인 어린 딸의 목숨을 담보로 위협을 해온다. 불의의 공권력이 저기 있다. 나는 정당하고 억울하다. 자,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영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라고. 미하엘 콜하스는 당시의 세상에서 용인하는 정당한 방법으로는 저들의 죄를 물을 수 없기에, 세상에서 용인하지 않는 방법을 선택한다. 즉 타협하고 덮는 것이 아니라, 타협하지 않고 덮지 않는 방식을 택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송강호 주연의 영화 <변호인>의 송우석 변호사가 떠올랐다. 다소 속물적인 세무 전문 변호사로 살던 ‘송변’ 역시 인생을 뒤바꿀 선택의 순간에 부닥친다. 그 또한 그냥 덮어버릴 수 있었다. 전과 완전히 똑같을 수야 없겠지만, 전과 똑같은 척 살아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양 갈래 길에서 머뭇대지 않고 한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버린다. 타협하지 않는 방법, 스스로 정당해지는 방법을 선택한다.


현존하는 사법 제도 안에서 무력하기만 했던 미하엘 콜하스는 무기를 탈취하고 남작의 성을 공격하기로 한다. 그의 싸움은 어느 순간 귀족과 평민의 대결로 확대되고 미하엘 콜하스는 민란의 선봉장 격이 된다. 그의 선택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가 내린 첫 선택은 또 다른 선택들을 낳고, 상황이 깊어갈수록 더욱 치명적인 선택들이 연이어 기다리고 있다. 결국 마지막 순간에 그는 또 한 번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다. 타인들은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는 처음에 그랬듯이 끝까지 스스로의 정당성을 지키는 방법을 택한다. 그것이 비극일지라도. 그리고 맞이하는 최후. 미하엘 콜하스가 문학적인 인간이라면 바로 이 지점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변호인>의 마지막은, 힘들지만 그럼에도 희망적인 느낌을 주는 장면으로 끝난다. 송변은 수의를 입었지만 그의 주변에는 그를 지지하는 수많은 동료 변호사들이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가 택한 엔딩은 진짜 엔딩은 아닐지 모른다. 송변이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 인물라면, 우리는 이미 그 뒤에 일어날(혹은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 후에도 끝없이 지속되는 선택들과 선택들, 그리고 남겨진 조각들. <미하엘 콜하스의 선택>에서 가장 잊지 못할 장면은 그가 혼자서 쓸쓸하고 먹먹한 표정으로 말의 얼굴을 어루만질 때였다. 무엇이 우리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가, 라는 질문 뒤에 내게는 쓸쓸함과 두려움이 남았다. 그것은 아주 깊고 거대한 두려움이었다.


[관련 기사]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고 싶었던 그 남자
-정말 좋아합니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라고요
-『인 콜드 블러드』 와 트루먼 커포티
-사랑, 사람의 마음은 해독 불가능한 언어
-인생, 아무도 끝을 모르는 오래달리기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8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정이현(소설가)

1972년 서울 출생으로 단편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2002년 제1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이후 단편 「타인의 고독」으로 제5회 이효석문학상(2004)을, 단편 「삼풍백화점」으로 제51회 현대문학상(2006)을 수상했다. 작품집으로 『낭만적 사랑과 사회』『타인의 고독』(수상작품집) 『삼풍백화점』(수상작품집) 『달콤한 나의 도시』『오늘의 거짓말』『풍선』『작별』 등이 있다.

미하엘 콜하스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저/<황종민> 역12,600원(10% + 5%)

오늘날 독일 문학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로 손꼽히는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중단편소설집 『미하엘 콜하스』가 창비세계문학 14번으로 출간됐다. 이 작품집은 표제작 「미하엘 콜하스」외에 「O.후작 부인」, 「칠레의 지진」, 「싼또도밍고 섬의 약혼」「로까르노의 거지 노파」「주워온 자식」「성 체칠리아 또는 음악의..

  • 카트
  • 리스트
  • 바로구매

오늘의 책

끝나지 않는 오월을 향한 간절한 노래

[2024 노벨문학상 수상] 1980년 5월 18일부터 열흘 간의 광주, 그리고 그 이후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작가의 철저한 노력으로 담아낸 역작. 열다섯 살 소년 동호의 죽음을 중심으로 그 당시 고통받았지만, 역사에서 기록되지 않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꺼내 보이면서 그 시대를 증언한다.

고통 속에서도 타오르는, 어떤 사랑에 대하여

[2024 노벨문학상 수상] 2023 프랑스 메디치 외국문학상 수상작이자 가장 최근작. 말해지지 않는 지난 시간들이 수십 년을 건너 한 외딴집에서 되살아난다. 깊은 어둠 속에서도 “지극한 사랑”이 불꽃처럼 뜨겁게 피어오른다. 작가의 바람처럼 이 작품은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다.

전세계가 주목한 한강의 대표작

[2024 노벨문학상 수상] 2016년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수상한 장편소설이자 한강 소설가의 대표작. 보이지 않는 영혼의 고통을 식물적 상상력으로 표현해낸 섬세한 문장과 파격적인 내용이 큰 울림을 만들어낸다.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나무가 되고자 한 여성의 이야기.

더럽혀지지 않는 어떤 흰 것에 관한 이야기

[2024 노벨문학상 수상] 한강 소설가의 아름답고 고요한 문체가 돋보이는, 한 편의 시와 같은 작품.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물고, 그 사이를 넘나드는 소설이다. ‘흰’이라는 한 글자에서 시작한 소설은 모든 애도의 시간을 문장들로 표현해냈다. 한강만이 표현할 수 있는 깊은 사유가 돋보인다.


PYCHYESWEB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