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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팔 얘길 안 할 수가 없다고요

오혁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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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여행에서 나는 부모님께 처음으로 속 썩여서 미안하다고, 하필 꿈이 작가여서 미안하다고 고백했다. 여전히 썩히고 있지만 이제 좀 덜 썩히고 싶다.

응팔(응답하라1988)이 끝났다. 드라마 덕분에 살아온 날들을 되감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서른짤 이후론 나이를 안 세 봐서 모르겠는데 혹시 내가 주인공들과 비슷한 또래라 그런 걸까?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아잉 뭔가 부끄럽다. 그래도 덕선이가 나보단 누나인 건 확실하다. 거 참 다행이다. 근데 동네 이십 대 술친구도 응팔을 환장하고 보던데 나이 따위랑 상관없는 흥행 코드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지난 몇 달간 불금과 불토를 반납하고 집구석에서 혼자 응팔을 볼 때마다 최소한 회당 한 번씩 펑펑 울고 짤 수 있었던 게 가장 좋았다. 분명 애틋한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독서실에서 방귀 뀌다 쫓겨나고, 친구 방에서 같이 야한 비디오 보다가 딱 걸린 추억들이 새록새록 했다. 이래저래 각박하고 건조한 요즘 내 일상을 이 역대급 드라마가 추억으로 촉촉하게 적셔준 셈이다.

 

다만 나이 들면 눈물이 많아진대서 흥 웃기시네, 나는 들장미 소녀 캔디(아차 이런 애니메이션을 비유에 쓰면 옹 인증이잖아 망했다)처럼 외로워도 슬퍼도 안 울어 다짐하며 살고 있었는데 추억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쑤시는 드라마 앞에선 개뿔 소용없었다. 쓸데없는 객기를 잠재우고 펑펑 울려준 응팔 제작진에게 감사드린다.


가진 게 반항기뿐이었던 청소년 시절부터 내가 절대 이해할 수 없었고, 억압에 불과하다고 느꼈던 가족이라는 틀과, 부모님의 그때 심정을 이제 와서 최초로 조금 이해하게 된 건 두툼한 보너스.

 

OH_HYUK-A_Little_Girl.jpg

 

그렇다 보니 응팔에 나온 음악 얘길 안 할 수 없겠다. 한참 회자되는 이슈에 묻어가는 건 얍삽해 보여 싫은데 이 꼭지도 그때 그 시절 음악이 주제라 피해갈 도리가 없다. 

 

응팔 OST들 보고 사실 좀 놀랐다. 그 옛날 노래들이 다시 차트를 씹어 먹고, 요즘의 감수성에도 충분히 통할 수 있다는 걸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좋은 음악이란 먼지만 좀 털어내면 당연하게도 여전히 빛나는 생명력을 과시한다는 걸 깜빡했던 셈이다.

 

나는 운전할 때랑, 라면을 끓일 때랑, 샤워를 때릴 때 무의식적으로 노래를 부르는 버릇이 있는데 요즘엔 이 노래만 줄창 부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부를 때 희한하게도 아래턱을 내밀게 되는 노래다.

 

노을진 창가에 앉아 멀리 떠가는 구름을 보면 찾고 싶은 옛 생각들 하늘에 그려요

 

그렇다. 오혁이 리메이크한 이문세의 <소녀> 되겠다. 고(故) 이영훈 님이 만든 이 음악은 워낙에 역대급이기도 했고, 이문세 아저씨가 기가 막히게 부르기도 했고, 응팔 OST에선 오혁이 깊이 있고도 부드럽게 잘 소화해 내기도 해서 3단에 걸쳐 홀딱 빠져버린 것이다. 아 내가 또 이 노래 부르고 있네. 대체 어떤 소녀를 못 잊는 거니. 하면서도 또 부르고 앉았는데 암만 불러도 너무 좋은 곡이다.

 

 

 

드라마에서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 아니 대체 누가 이걸 이렇게 잘 부를 수 있단 말인가? 했는데 우리에겐 오혁이 있었다. 처음 봤을 땐 만화에서 튀어나온 줄 알았고, 요즘 스님은 피어싱도 하네, 오해했던 오혁 말이다. 그는 요즘의 감성으로 들으면 자칫 찐득하게 들릴 위험이 있는 내 곁에만 머물러요 떠나면 안 돼요~ 하고 시작하는 이 노래를 편안하면서도 습도가 잘 조절된 톤으로 불렀다. 촉촉함과 건조함이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아서 이 아티스트는 과연 바람직한 당대의 음색 깡패로구나 싶었다. 몇 십 년 뒤에도 그가 부른 음악들이 가치를 지닌 채 빛날 것임을 의심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목소리라고 본다.

 

<소녀> 원곡은 이문세 아저씨의 <휘파람>, <나는 아직 모르잖아요>, 등의 명곡이 수두룩했던 1985년 3집에 실려 있다. 지금 다시 들어보면 힘을 꽤 주고 부르는 편인데 그땐 그보다 더 감정을 쥐어짜 내듯 부르는 창법이 각광받을 때라 참 세련되고 아름다운 발라드 톤이라 느껴졌었다.

 

그나저나 응팔은 거의 뮤직 드라마만큼 음악을 많이 쓴 편이었는데 상당히 지능적으로, 장면과 내용이 죽지 않도록 수위를 조절하면서 음악 자체가 내뿜는 감성이 잘 조화 되게 만든 수작이었다. 나야 뭐 도롱뇽에 이입되어 드라마를 봐서인지 덕선이 남편이 누가 되든 관심이 없었다는 것도 참 괜찮았다.

 

결국 응팔의 주제는 기승전 가족이라는 점도 감명의 울림이 깊었다. 나는 응팔 때문에 그만 가족애에 눈을 떠버리는 바람에 부모님 모시고 오키나와에 여행도 다녀왔다. 마침 어머니 칠순이었다. 생신 때마다 정신없이 아무것도 못 해드려서 뭔가 이벤트를 마련하고 싶었는데 칠순에 정신 차려서 다행이었다. 만날 나 혼자 칠락팔락 쏘다니다 드라마 보고 철이 들다니. 부끄럽다.


부디 평범하게 살라는 부모 말을 아직도 절대 안 듣고 사는 무명작가라 여행 경비를 많이 보태지 못했지만 누나랑 매형이 거금을 내서 얍삽하게 묻어갔다.

 

ed_okinawa tsuboya.JPG

 

오키나와는 따듯하고 평화롭고 상냥한 여행지였다. 부모님을 웃겨드리기 위해 도롱뇽 성대모사를 연습해 갔는데 부모님은 정작 응팔을 못 봤다고 했다. 낭패였다. 또한 내가 돈을 거의 못 보탠 대신 가이드를 자청해 가족을 인솔하고 있는데, 전철 타고 이동하면서 도롱뇽 톤으로 어디니? 다 왔어? 내려? 지금 내려? 를 시전 할 수가 없었고 해서도 안 됐다. 좋은 여행이었지만 웃길 수 없어서 좀 아쉬웠다.

 

다만 칠순인 어머니도 이문세 아저씨의 <소녀>는 알고 있었다. 어머니도 한때 소녀였고, 아버지도 한때 소년이었다. 그런 부모님도 부모님이 처음이라 성장기에 내가 애를 먹여도 대책을 몰라 그토록 갈등이 많았던 것이다. 오키나와 여행에서 나는 부모님께 처음으로 속 썩여서 미안하다고, 하필 꿈이 작가여서 미안하다고 고백했다. 여전히 썩히고 있지만 이제 좀 덜 썩히고 싶다.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해 아쉬웠지만 그건 다음 기회에. 

 

감상적이지만 <소녀>의 가사처럼 부모님이 내 곁에만 머물고, 떠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 역시 항상 곁에 머물고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에잇 또 눈물이 나려고 해서 오늘 칼럼 후다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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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상 (소설가)

소설가. 장편소설 『15번 진짜 안 와』, 『말이 되냐』,『예테보리 쌍쌍바』와 소설집 『이원식 씨의 타격폼』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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