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 놀이터

릴렉스 크리스마스

멜 토메 <The Christmas S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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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뜻은 잘 모르겠지만 나 역시 좋은 의미로 힘이 쭉 빠졌다. 인생 모르겠다. 힘은 반드시 줘야 할 때만 주면 된다. 크리스마스 시즌은 안 그래도 된다.

12월이 되자 덜컥 두렵다. 한 해 동안 끙끙 힘주며 살았는데 결과물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씁쓸한 마음으로 화장실에서 채널예스를 다시 읽으며 똥꼬에 힘주는데 내 칼럼도 딱 거슬렸다. 다른 꼭지들과 달리 내 글은 신입사원 볼때기 같았다. 너무 힘준 글은 읽기도 힘들다는 걸 알았다. 


깨달음을 얻은 나는 나가사키로 향했다. 먹고 살 걱정으로 아등바등 힘주며 산 게 지겨웠다. 그런다고 살림살이가 나아진 건 하나도 없으며, 무명작가면 당연히 돈이 없는 건데 왜 받아들이질 못했나, 후회하는 차원이었다. 마침 생일이니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 겸해서 후딱 다녀오고 아무 알바나 구할 생각이었다. 늘 그랬듯 여행 장소는 가장 항공권이 싼 곳. 그 단계까지는 힘 빼고 처리했다. 그러나 숙소를 예약하며 브레이크가 걸렸다. 빌어먹을 여행 짬밥 때문에 위치, 편의성, 침구상태, 후기 등등을 꼼꼼히 따지다 보니 저절로 힘이 들어가고 말았다. 그 사이에 방들이 싹 매진돼 버렸다.


“이거 뭐지? 설마 나가사키에서 짬뽕을 공짜로 돌리나.” 


알고 보니 일본의 연휴였다. 그걸 눈치 챘을 땐 특급 호텔과 낡은 도미토리 한 개만 남았다. 내 인생엔 왜 중간이 없나 잠시 상심했다. 생일인데, 당분간 여행 못갈 건데, 맘에 안 드는 숙소를 예약하자 심정이 물미역처럼 풀어졌다. 어떻게든 힘이 빠진 건 다행이었다. 


나가사키는 짬뽕으로 유명한데 가는 집마다 줄이 길어 포기했다. 짬뽕이 뭐라고 힘주어 기다리냐 싶었다. 나는 아무 거나 먹고 설렁설렁 돌아다녔다. 경직되지 않는 자유와 부드러운 움직임이 오랜만에 기분 좋았다. 


나가사키 전차.JPG


나가사키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까운(?) 노면전차의 도시였다. 그놈의 노면전차에 나는 완전히 꽂혔다. 노면전차란 힘 빼고 천천히 미끄러지는 교통수단이 아닌가. 여행의 목적에 부합되는 낭만적인 느린 속도와 고즈넉한 낡은 플랫폼에 반할 수밖에 없었다. 


예약한 숙소는 가톨릭센터 호스텔이었다. 분위기가 어쩔 수 없이 성스러웠다. 공용공간이 있었지만 음주가무를 할 만한 곳은 못됐다. 수녀들이 왔다 갔다 하고, 프란치스코 교황님 사진이 내가 술을 때리려는 테이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층 침대가 잔뜩 놓인 도미토리에는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기를 쓰는 일본인들이 방을 꽉 채우고 있었다. 그 분위기에선 기침도 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한국에서부터 우연히 같은 비행기를 타고 와, 같은 기차를 타고 나가사키에 와서, 같은 숙소의 같은 침대 위아래에 묵게 된 미친 인연의 한 포르투갈 녀석이 있었다. 우리는 뭔가 함께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결국 공용공간에 나가 살살 대화하며 맥주와 음악을 즐겼다. 음악은 포르투갈 전통음악 ‘파두Fado’였다. 마리짜Mariza, 까마네Camane' 등의 아티스트를 그 친구가 선곡했다. 여행 와서 남자끼리 속삭이며 음악을 듣고 앉았으려니 기분이 개떡 같았지만 음악이 너무 좋았다. 솔로 여자와의 아름다운 만남을 기대하는 것도 결국 여행에 힘주는 거였다고 판단될 지경이었다. 


파두엔 삶의 애환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에다 ‘뽕끼’까지 서려있었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울진 않았지만 아무것도 못 이루고 12월을 맞은 두려움이 그 순간 해소되었다. 우리는 공용공간을 소등할 때까지 음악과 맥주를 멈출 수 없었다. 


일본 연휴가 끝나자 숙소를 옮겼다. 마감할 원고가 있어서 좋은 책상이 있는 비즈니스호텔에 있고 싶었다. 그러나 거기서 글이 잘 써지지 않아 커피가게에 노트북을 들고 나가 썼다. 이건 또 뭔 삽질이냐 자괴했다. 글 쓸 장소를 찾느라 힘을 꽉 주는 바람에 칠만 원만 깨진 셈이었다. 지갑이 너무 얇아져 다음날은 또 도미토리로 갔다. 돈을 아끼려고 낭만적인 전차도 외면했다. 하루 종일 걷다 지쳐 숙소에 돌아왔을 때 옆 침대에 온 영국인이 항구에 산책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도저히 더 걸을 수 없을 것 같았지만 목적이 힘 빼는 여행이니깐 또 기어나갔다. 그 친구와 나가사키 야경에 취하며 음악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가 소리쳤다. 


“나도 롹이라면 정신을 못 차린다구. 일본인 친구가 로큰롤 뮤직바를 소개시켜줬는데 같이 갈래?”


나는 흔쾌히 가기로 했는데 갑자기 비가 내렸고, 우산도 없었고, 잠시 후엔 우박까지 떨어졌다. 여행지에서 겨울비에 우박까지 처 맞고 양말도 다 젖고 얼어 뒈질 것 같은 상황이 되는 건 특별한 경험일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자괴했다.  


‘과도한 롹탐 부리며 힘주다 이 꼴이 된 것이다!’ 


하지만 영국인은 탈모가 시작된 머리에 우박을 때려 맞고도 날씨를 탓하지 않았다. 영국 사람은 정말 생선 대가리가 박혀있는 파이를 먹느냐고 물었을 때도 그는 빙긋이 웃었다. 그는 릴렉스 면에서 배울 점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 친구와 거의 한 시간을 걸어 로큰롤 바가 있다는 거리에 찾아갔을 땐 롹이고 나발이고 다리가 풀려 개다리가 될 지경이었다. 호스티스 언니들이 길에서 양복쟁이 아저씨들을 호객하는 동네였는데 쥐새끼처럼 된 우리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건 참 다행이었다.


그런데 롹 뮤직 바 이름이 피에르(Pierre)라는데 그 동네 간판은 전부 일본어였다. 우린 가타카나를 읽지 못해 ‘プェル’라는 간판을 몇 번이고 지나쳤다. 호스티스 언니들에게 길을 물어 간신히 그 바를 찾아낸 다음 우리는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러나 문을 열자 쿵쿵거리는 롹 음악은커녕 잔잔한 팝 발라드가 흐르고 있었다. 메뉴는 몹시 비쌌고, 깡패처럼 생긴 아저씨 하나가 “나가사키엔 야쿠자가 없어서 좋다구!” 라는 말을 내게 세 번이나 했다. 그는 술에 취해 의자에서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나와 영국인은 동시에 고개를 흔들고 거기서 나왔다. 


mel torme.jpg


전차가 끊겨 걸어서 숙소에 돌아가는 동안 걸음걸이가 미역국처럼 변한 우리는 작은 바를 발견하고 일단 들어갔다. 사람 네 명만으로 고밀도가 되는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술과 체온으로 몸을 녹이는데 바로 오늘의 주제곡 <The Christmas Song>이 흘렀다. 아니 무슨 12월 땡 시작부터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려는 거야, 도시 곳곳에 이미 루미나리에 장식이 잔뜩 있던데 거 너무 이른 거 아니오? 생각할 틈도 없이 부드러운 목소리에 몸과 마음이 주르르 녹아버렸다. 힘주지 않고 부드럽게 발성하는 멜 토메(Mel Torme)님의 오래된 아름다운 음색을 안주로 삼자 술도 그냥 부드럽게 꿀떡꿀떡 넘어갔다. 냇 킹 콜 아저씨의 리메이크 곡이 워낙 유명해서 오리지널 넘버를 들은 건 처음이었다. 


 

그 음악 덕분에 돈 걱정을 릴렉스 하고 술을 마음껏 마셨다. 일 년 내내 했던 돈 걱정도 결국 힘만 빡 주는 것이다. 돈이 뭐라고, 그렇게 목맸단 말인가. 그러면 내 삶도, 옆에서 보는 친구들도 힘든 거다. 크리스마스의 의미가 무엇이든, 나로선 즐길 여유가 없게 된지 몇 년 되었다는 게 겸연쩍었다. 오랜만에 여행지에서 마음껏 힘 빼고 긴장 풀고 개 릴렉스 상태로 그 스탠딩 바에서 만난 모든 손님들과 주인과 새벽까지 신나게 웃고 떠들다보니 마음이 양털처럼 보들보들해졌다. 


거룩한 가톨릭 회관 숙소의 발단과, 애환이 가득한 포르투갈 파두 소리의 전개와, 가혹한 날씨, 과도한 직립보행의 위기와, <더 크리스마스 송>의 대단원. 어쩌면 신이 내게 서사구조를 선물하는 것 같았다. 거기엔 전혀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게다가 야욕의 태평양 전쟁으로 힘을 빡 주던 일본이 핵폭탄 맞고 항복하게 된 그 나가사키 아닌가. 신의 뜻은 잘 모르겠지만 나 역시 좋은 의미로 힘이 쭉 빠졌다. 인생 모르겠다. 힘은 반드시 줘야 할 때만 주면 된다. 크리스마스 시즌은 안 그래도 된다. 아아 릴~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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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상 (소설가)

소설가. 장편소설 『15번 진짜 안 와』, 『말이 되냐』,『예테보리 쌍쌍바』와 소설집 『이원식 씨의 타격폼』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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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이상을 재즈 뮤지션으로 살아온 백인 재즈 보컬의 대명사로 프랭크 시나트라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멜 토메의 캐롤 앨범. 보컬리스트, 작곡가, 드러머, TV 토크쇼의 진행자, 편곡자, 배우, TV 프로그램의 PD, 여러 저술의 작가로서 다양한 삶을 살아온 노장답게 그의 앨범에는 삶의 여러 소리 (희, 노, 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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