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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버린 여성이 주는 쾌감 : (여자)아이들과 불
(여자) 아이들 미니앨범 4집 I burn
(여자) 아이들은 그렇게 ‘극히 드문’ 미쳐버린 여성 캐릭터를 케이팝을 통해 연기하는 그룹이다. 미쳐버린 여자와 불이 남기고 간 잔해위로 여자아이들이 간다. 편견을 부수며. 미쳤든, 미치지 않았든. (2021.01.13)
미쳤다는 표현은 긍정과 부정 사이 오묘한 경계에 걸쳐 활용된다. 일반적으로는 정신적인 이상이 생겨 말과 행동이 보통 사람과 달라진 상태를 뜻하지만, 한 편으로는 그렇게 정신적인 이상이 생길 정도로 하나의 대상에 골몰한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유야 어쨌든 정상성을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특히 후자의 광기는 세상에 없던 것을 창작해야 하는 창작자들에게 늘 매혹적인 소재다. 미친 사람이 주인공이거나 주인공이 미친 상황에 휘말리는, 때로는 그 세계를 창조한 자신마저 미쳐버리는 이야기를 우리는 얼마든지 댈 수 있다.
다만 그렇게 미쳐버린 대상이 여성일 경우, 예시의 양상이 달라진다. ‘미친 여자’는 어디에나 있었지만 그 자체로는 좀처럼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한 대표적인 존재였다. 우리가 기억하는 대부분의 미친 여자는 감독의 주제 의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곳에서 관습적으로 미치거나 희생되었다. 때로는 특별한 배경도 없이, 극을 이끌어가는 (대부분 남성인) 화자를 파괴하거나 각성시키기 위한 도구로서 미쳤다가 도구로서 사라지기도 했다.
(여자)아이들은 그런 과거 따위 아랑곳 없다는 듯 오직 나만을 위해 미쳐버린 '극히 드문' 여성 캐릭터를 케이팝을 통해 연기하는 그룹이다. 카리스마 넘치는 데뷔곡 ‘LATATA’에서, 이들은 사랑 앞에 내일을 약속하지 않는다. 미쳐 버린 밤의 끝나지 않는 시간 속에서 모든 걸 불태워버리겠다는 말만을 반복하는 이들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단 한마디를 남긴다. ‘누가 뭐 겁나’. 미쳐버린 여자와 불, 그리고 두려움을 상실한 자아. 시작부터 거칠 것 없었던 이들의 절묘하게 제어된 광기는 활동에 따른 노래와 무대 곳곳에서 빛났다. 사랑이 떠난 자리에 남은 슬픔을 기괴하고 그로테스크한 공포극으로 그려낸 ‘퀸덤’의 ‘싫다고 말해’는 굳이 분류하자면 비교적 순한 맛이었다. 세 번째 미니앨범 <I trust>의 타이틀곡 ‘Oh My god’은 선과 악, 성녀와 악녀 등 여성 아이돌에게 오랫동안 성역처럼 여겨진 각종 금기를 별것 아니라는 듯이 차례로 무너뜨렸다. 모든 것이 무너진 잔해를 밟고 선 이들이 스스로 쓴 건 ‘여왕’이 아닌 ‘사자왕’을 위해 준비된 왕관이었다. (여자)아이들이 오른 왕좌는 정해진 길을 벗어난 미친 여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자리였다.
지난해 한여름의 후텁지근한 바람을 타고 ‘덤디덤디 (DUMDi DUMDi)’로 한숨을 돌리고 온 이들이 다시 본연의 이야기로 돌아왔다. 데뷔 앨범부터 이어진 ‘나(I)’ 시리즈의 네 번째 장인 <I burn>과 타이틀곡 '화(火花)(HWAA)'는 지금까지 자신들이 지나온 길에 훈장처럼 남아있는 화마(火魔)의 불씨를 되살려, 역시 자신들이 그토록 찾아 헤맨 사랑에 직접 붙여 버리는 소멸과 재생의 서사를 노래한다. 엄동설한의 한기(寒氣)마저 단숨에 내몰아갈 마지막 불의 축제 앞에서 이들은 핏빛으로 물든 붉은 춤사위를 펼친다. 과연 미친 여자는 위험하다. 그리고 위험한 것은 힘이 세다, 강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건, 지금까지 발표했던 어떤 곡보다 서늘하고 처연한 정서가 두드러지는 뜨거운 노래가 남기고 간 잿더미 위에 ‘Where is love’나 ‘DAHLIA’ 같은, 지금까지 (여자)아이들의 카탈로그 가운데 가장 팝적인 느낌이 강조된 곡들이 새로이 꽃을 피웠다는 사실이다. 이 새로운 꽃들이 전에 없던 세상을 만들어나갈지, 아니면 여전히 미쳐있는 여자의 귀에 꽂혀 나부낄지는 아직 아무도 모를 일이다. 여기에서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하나, 리더 소연의 말이다. ‘(여자)아이들은 편견을 깨는 팀이라고 생각한다.’ (여자)아이들이 간다. 편견을 부수며. 미쳤든, 미치지 않았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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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케이팝부터 인디까지 다양한 음악에 대해 쓰고 이야기한다. <시사IN>,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