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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맛을 원해? : 백현의 새로운 아이덴티티
백현 미니앨범 2집 <Delight>
‘모두 변한 듯해도 다들 낭만이 필요했지’(‘Poppin’). 바로 그 자리에, 백현의 새로운 아이덴티티가 서 있다. (2020.12.30)
백현의 새 싱글 ‘놀이공원’은 이런 노랫말로 시작한다. ‘언제든 놀러 와요. 눈치게임 하지 말고’. 듣는 사람을 안심시키는 첫마디 뒤에 이어지는 건 마치 놀이공원 문 앞에서 망설이는 사람의 마음을 읽어낸 듯 섬세한 말들이다. ‘요즘 시간이 없는데’하는 핑계에는 ‘매일 야간 개장할게요’, ‘무슨 아이스크림을 먹을지 고민된다’는 투정엔 ‘초코와 바닐라 고민이 된다면 혼합에 츄러스 사 올게요’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뭘 좀 아는데 싶은 마음에 마지막 결정타 ‘지금 이 모든 마음이 진짜인지 의심스럽다’는 무용한 걱정을 던지자 ‘당신 위해 만들고 가꾼 정원과 내 맘을 보여줄게요’라며 관람차로 이끄는 단단한 손이 돌아온다. 이 계절감을 듬뿍 살린 포근한 어쿠스틱 팝 R&B 트랙은 불현듯 찾아 든 다정 앞에서 페이스트리처럼 겹겹이 쌓인 불안한 감정을 별거 아니라는 듯 감싸 안는다.
시대를 풍미한 로맨스 드라마의 센스 있는 만능 실장님처럼 말하지 않아도 척척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백현의 재주는 사실 ‘놀이공원’이 처음은 아니다. 올해 남성 솔로로서는 무려 19년 만에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며 대중과 평단 모두에 고루 호의적인 반응을 얻은 두 번째 미니앨범 <Delight>는 누구의 강요도 없이 자청해 달콤한 사탕이 되어버린 화자가 등장하는 ‘Candy’를 타이틀 곡으로 내세웠다. 일반적으로 남성 화자가 ‘사탕’을 노래하는 경우, 내가 마음을 품은 상대가 사탕처럼 달콤하다거나 내가 너에게 빠진 지금이 달콤한 사탕 같다는 묘사가 대부분이었지만 백현이 분한 사탕은 그런 사탕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백현은 스스로 화려한 진열장에 놓인 사탕으로 분한다. 상대는 쇼윈도 앞에서 어떤 맛을 고를까 고민한다. 그는 그 고민의 시간을 절대 보채지 않는다. ‘존중해 그 appetite 오묘한 이 텐션 나도 싫지 않아’. 오히려 조금씩 눈치를 보며 부드럽게 선택을 리드한다. ‘특별한 내가 될 게 손이 가 손이 가게’. 욕망은 청유형으로, 상대에 대한 배려를 기반으로, 보다 수동적으로 표현된다. ‘너에게만 나를 맞춰가고 싶어 넌 복잡한 사람인 걸 아니까, 네가 열어줘’.
이런 조심스러운 감정의 교류를 담은 사랑의 전언은 그것이 한국 대중문화, 그리고 케이팝이라는 토양에서 태어났기에 흥미롭다. 특히 백현이 속한 카테고리인 케이팝 보이 그룹은 유행가가 으레 그렇듯 습관처럼 사랑을 노래하지만, 아직 영글지 못한 감정은 전개도 없이 무작정 폭발하거나 목적어 없는 막무가내 애정을 들이민다. ‘내 우주는 전부 너’라거나 ‘내꺼 하자’는 고백은 그래도 가만히 앉혀두고 사전설명을 충분히 듣는다면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는 감정의 파도다. 그러나 아직 문손잡이에도 닿지 않았는데 ‘왜 내 마음을 흔드는 거냐’며 으름장을 놓거나 단 몇 번의 노크 만에 벌컥 문을 열면서도 ‘이걸 범죄라 할 수 있냐’며 눈을 희번덕거리는 소년들 앞에서는 그저 영문을 모른 채 소금기둥처럼 얼어 있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백현은 바로 그 어리둥절함이 남긴 사각지대를 파고든다. 그동안 이게 사랑이겠거니 서툰 손을 잡아 다독이는데 급급했던 이들은 애써 꾸며놓은 사탕 가게와 놀이공원에 나만을 위해 준비된 달콤함이 가진 편안함에 녹아든다. 순간 튀는 스파크와 불안이 사랑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한겨울 따뜻한 불 앞에서 서서히 녹아가는 몸처럼 배운다. 그런 그의 새로운 아이덴티티가 팝 R&B 위에 얹힌 건 신의 한 수다. 사랑의 달콤함을 표현하기에 세상 어느 음악보다 적합한 이 장르는 현재 케이팝 신에서 가장 풍족한 국내/해외 작곡가 풀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를 소화하는 건 엑소 메인 보컬로 내년이면 데뷔 9년 차가 되는 보컬리스트의 실전으로 갈고 닦은 능란한 기교다. ‘모두 변한 듯해도 다들 낭만이 필요했지’(‘Poppin’). 바로 그 자리에, 백현의 새로운 아이덴티티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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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태그: 백현, Delight, 케이팝, 아이돌, 김윤하
대중음악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케이팝부터 인디까지 다양한 음악에 대해 쓰고 이야기한다. <시사IN>,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