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 놀이터

베트남 끝자락의 섬에서

〈Feature〉A Journey to the Last Is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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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은밀한 섬으로 떠나고 싶은 몽상은 베트남 푸꾸옥에서 현실이 된다. 한적한 어촌 마을의 일상과 환상적인 해변이 공존하는 이 외딴섬에서 때묻지 않은 비밀 장소 하나쯤은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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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꾸옥 섬 동남부에 있는 바이사오 해변은 부드러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휴양을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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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이 붉게 물드는 즈엉동 항구. 노점이 들어서기 시작하는 저녁 무렵의 항구에는

현지인과 관광객이 자연스럽게 뒤섞인다.

 

 

낯선 섬에 당도하다


베트남 섬 여행은 좀 낯설게 다가온다. 가까운 타이만 살펴봐도 안다만 해(Andaman Sea) 연안을 따라 지상낙원 같은 열대 섬이 흩어져 있는 반면, 베트남에는 할롱베이(Ha Long Bay) 크루즈 여행 외에(배 위에만 머물기에 온전한 섬 여행이라 부르기에 무리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3,444킬로미터에 달하는 기다란 해안선이 우리나라 동해안처럼 굴곡 없이 매끈하게 뻗어 있고 섬을 거의 찾기 힘든 탓이다. 그런 연유로 캄보디아 국경에 맞닿은 남서부 끝의 하띠엔에서 40킬로미터가량 더 떨어져 있는 베트남 최대 섬 푸꾸옥은 일단 호기심을 자극한다.


 “론리플래닛 가이드북에도 정보가 거의 나와 있지 않은 섬이네요.” 푸꾸옥국제공항에서 입국 심사를 기다리던 중 앞서 가던 앨러스테어 니컬러스(Alastair Nicholas)가 말한다. 영국 출신의 니컬러스는 베트남항공에 근무하는 친구의 추천으로 이곳을 휴가지로 선택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푸꾸옥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고 봐야죠. 그래서 이번 여행이 더 기대돼요.” 2년 전 새로 지은 공항의 말끔한 분위기는 섬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푸꾸옥은 거리상 베트남보다 캄보디아에 더 가깝다. 실제로 100여 년 전 베트남 인이 본격적으로 이주하기 전까지는 크메르(Khmer) 인이 주로 머물던 섬이었다. 이후 두 나라 사이에서 푸꾸옥을 두고 지리멸렬한 영토 분쟁이 이어진 끝에 1982년 캄보디아 정부가 베트남 국토로 인정하면서 공식적으로 베트남 끼엔장 성에 속한 것이다.


차를 타고 공항 밖으로 나오자 푸꾸옥이 직면한 현실이 한눈에 드러난다. 프로젝트 개발 승인을 막 끝낸 신도시인 양 도로 양쪽으로 공사 현장이 곳곳에 펼쳐져 있다. 정부에선 이곳의 여행 인프라 확장을 추진하면서 향후 불어날 여행자를 위한 리조트와 각종 편의 시설을 세우느라 여념이 없어 보인다. 외부의 주목을 받아본 적 없는 순박한 섬이 새로운 변화에 너무 기민하게 반응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들 정도다.


거제도보다 조금 큰 면적의 푸꾸옥은 이동 루트가 무척 단순하다. 섬의 남북을 잇는 메인 도로를 제외하면 대다수가 아직 비포장도로이므로 딱히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섬 북단에서 남단까지 이어진 도로를 따라 차로 1시간 정도면 충분히 닿을 수 있다. 번잡한 공사 현장 사이로 야자수와 푸른 열대우림이 시야를 채우면서 섬이 맨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간간이 지나치는 공산당 선전 포스터와 전통 모자 논라(n?n l?)를 쓴 현지인이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지나가는 광경은 이곳이 베트남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섬을 관통하는 메인 도로는 푸꾸옥의 자연을 가르는 기준점이 된다. 도로의 북동쪽 방면은 유네스코에서 생물보호구로 지정한 푸꾸옥 국립공원으로, 산봉우리와 열대우림을 아우른다. 반면, 도로 남서쪽에는 완만한 해변을 따라 자연스럽게 어촌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그중 서부 해안가의 한복판에 중심 마을 즈엉동이 자리한다. 부둣가에 줄줄이 매달린 수십 척의 어선과 방파제 옆으로 늘어선 간이 좌판이 시끌벅적한 항구의 풍경을 자아내는 곳이다. 항구 옆 암석 위에는 우두커니 서 있는 등대 옆으로 딘꺼우(Dinh C?u) 사원이 있다. 섬 주민 대다수를 차지하는 어민의 무사귀환을 기리는 이 사원은 푸꾸옥에서 의미심장한 장소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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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게 익은 푸꾸옥의 후추는 맛과 향이 뛰어나기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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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기가 짧고, 햇살이 뜨거운 섬의 일상에서 논라는 필수다.

 

 

섬을 풍요롭게 하는 것


현지인은 푸꾸옥을 ‘뿌궉’에 가깝게 발음한다. 실제 ‘부국(富國)’이라는 한자에서 유래한 지명이기 때문이다. 그 이름에는 갖가지 자원이 풍부한 땅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베트남 남서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외딴섬이 차지하는 위상은 이곳에서 난 무수한 식자재를 확인하는 순간 확 달라진다.


쌀국수부터 스프링롤, 죽, 볶음밥은 물론 바게트 샌드위치 반미까지 베트남의 웬만한 요리에 빠지지 않는 느억맘. 우리나라 사람이 고추장에 보내는 것만큼 베트남 인의 깊은 애정이 담긴 피시 소스라 할 수 있다. 바로 이 느억맘의 최대 산지가 푸꾸옥이다. 섬을 둘러싼 바다에서 잡아 올린 싱싱한 까껌은 곧장 섬 안에 흩어져 있는 100여 개의 느억맘 공장으로 보낸다. 이어 까껌을 소금에 절인 후 약 1년 동안 거대한 나무 통에 담아 발효하는데, 차츰 양을 줄여 농도를 조절한 뒤 병에 담은 느억맘은 베트남 전국 각지의 주방으로 향하게 된다. 즈엉동 근방에 있는 틴팟 느억맘 공장의 발효 창고 안으로 들어서자 멸치액젓 비슷한 퀴퀴하고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강하게 자극한다.


차를 타고 섬의 내륙을 가로지르다 보면, 길 옆으로 나무가 규칙적으로 줄지어 있는 광경을 종종 만날 수 있다. 이는 푸꾸옥에서 약 800가구가 종사한다는 후추 농장. 가구당 약 3,000그루의 후추나무를 키우는데, 1그루에서 1년에 약 5킬로그램의 후추를 생산한다고 하니 어림 잡아 계산해도 대단한 수확량이다. 실제 베트남 최대 후추 산지는 본토 남서부의 고원 도시 달랏이다. 그렇지만 푸꾸옥 사람들은 이곳의 후추가 향과 맛에서 달랏에 앞선다고 자부한다.


팟 농장도 그런 곳이다. 촘촘하게 줄지어 세운 나무 기둥마다 후추나무가 덩굴을 이루어 뻗어 있다. 높이 3미터까지 자란 후추나무는 평균 15년 정도 열매를 맺고, 7년 된 후추가 가장 맛이 뛰어나다고 한다. 마침 빨갛게 익은 후추 열매를 발견하곤 하나를 떼어 입에 넣어본다. 순식간에 입을 얼얼하게 만들 정도로 톡 쏘는 맛이다. 과거 유럽의 수많은 탐험가가 이 자그마한 향신료를 찾아 목숨을 걸고 인도양을 건너 아시아로 향했다는 사실이 문득 떠오른다.


푸꾸옥이 해외에 알려지는 데는 진주도 한몫을 톡톡히 했다. 30여 년 전 다이빙을 하기 위해 베트남을 찾은 호주 태생의 마이클 램스든(Michael Ramsden)도 바로 푸꾸옥의 진주에 매혹된 나머지 이곳에 정착한 사람 중 하나다. 베트남 아내와 함께 진주 양식장 응옥히엔을 운영하는 그는 진주 양식 과정을 세심하게 설명하는 가이드를 자처한다. “여기 진주조개의 선명한 그러데이션이 보이나요? 바로 이것이 푸꾸옥 진주의 특징입니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화이트 진주나 옐로 골드 진주와 달리 검은빛과 회색빛이 오묘하게 감도는 푸꾸옥 진주조개를 가리키며 램스든이 설명을 이어나간다. 이곳에서 키우는 진주조개는 보통 6년을 기본으로, 최대 세 번 채취한다. 그중 오래된 것은 18년까지 키운다고. 실로 대단한 정성이 필요해 보이지만, 그만큼 값이 올라가는 것도 인지상정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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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양식장에서 하루를 보내는 띠앤은 낚시 솜씨가 능숙하다.

안터이 항에서 출발을 기다리는 오징어잡이 어선.

혼주어 섬 인근의 수상 양식장에서 기르는 전복.

약 12만 명이 거주하는 푸꾸옥 주민 중 70% 이상이 어업에 종사한다.

 

 

배 위에서 누리는 만찬


인도차이나반도의 여느 섬과 달리 푸꾸옥은 태풍의 피해가 없는 곳에 속한다. 우기 또한 고작 1달 남짓뿐이다. 이런 기후 조건 덕분에 배를 타고 인근 섬으로 향하는 호핑 투어는 푸꾸옥에서 연중 어느 때나 즐길 수 있다. 섬 최남단에 있는 안터이항은 호핑 투어의 관문 역할을 한다. 가장 일반적인 투어 코스는 가장 가까운 혼주어섬과 혼로이, 혼텀을 돌아보는 여정. 물살이 가장 잔잔한 오전 무렵이 투어를 나서기에 제격이다.


아담한 어선 위에 올라 코코넛 섬을 의미하는 혼주어를 지나 혼로이까지 30분 남짓 물살을 가른 뒤, 한 수상 가옥에 잠시 배를 세운다. 이곳은 전복, 성게, 골뱅이 등 각종 해산물을 여행객에게 선보이고 판매하는 수상 양식장. 실내에 식기부터 침대까지 고루 갖춰 일종의 생활 공간을 이루고 있다. “매일 아침 아이를 데리고 이곳으로 나와요. 물론 일을 마친 뒤에는 푸꾸옥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야 하지만요.” 수상 양식장의 안주인 하미똠(Ha My Tom)이 아이를 꼭 안은 채 설명한다. 그녀의 말을 듣는 사이 곧 성인이 될 아이에게 지금 이 바다는 삶을 영위하는 거대한 터전이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다시 잔잔한 물살을 가르는 배는 혼텀에 이르자 시동을 끄고 닻을 내린다. 본격적으로 바다낚시를 즐길 시간. 한치의 살점을 미끼 삼아 줄을 바다에 풀어 넣는 것으로 준비는 끝난다. 수상 양식장에서 배에 올라탄 하미똠의 아들 띠앤(Tien)은 능숙하게 미끼를 꾀고 낚싯줄을 던지며 시범을 보인다. 해수면 아래 깊숙한 곳까지 낚싯줄이 가라앉는 모습이 보일 정도로 바닷물은 한없이 투명하다. 파도의 너울이 거의 일지 않기에 줄의 미동은 곧 입질이나 다름없다. 곧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들려온다. 그루퍼, 농어, 복어 등 낚시에 나선 이들이 저마다 낚은 바닷물고기를 하나씩 들어보이며 차츰 손맛에 익숙해진다.


낚시를 즐긴 뒤에는 선상에서 즐기는 점심 식사가 이어진다. 어선에서 준비하는 식사라고 해서 가벼이 여기면 곤란하다. 애피타이저로 무려 성게가 올라오니까. 칠리소스와 소금, 설탕, 전복즙, 라임을 섞어 만든 소스에 고추냉이를 푼 것을 성게에 얹어 한 숟가락 떠 입에 넣는 순간, 이런 호사가 또 있을까 싶다. 조금 전 수상 양식장에서 구입한 전복은 숯불 그릴에 구워 나온다. 이어 삶은 오징어, 관자 꼬치구이, 새우 요리 등 푸꾸옥의 신선한 해산물로 조리한 요리가 널찍한 테이블 위를 가득 채운다. 이처럼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배 위에서 즐기는 식사는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근사한 오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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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뻗어나가는 수로를 따라 형성된 함닌 마을의 오래된 수상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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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이사오 해변에서 베트남 특유의 정취를 더하는 행상인.

 

 

누군가의 비밀 장소


푸꾸옥에서도 여느 휴양 섬과 마찬가지로 프라이빗한 여행을 누릴 수 있다. 최근 섬 북서부의 바이자이(B?i D?i) 해변에 문을 연 빈펄 리조트(Vinpearl Resort)는 단지 전체가 하나의 마을을 이룰 만큼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모던한 리조트 객실은 물론 수영장이 딸린 빌라를 취향껏 고를 수 있으며, 스파를 받거나 해변 선베드에 누워 망중한을 즐기는 것도 가능하다. 전동 카트를 타고 단지 내에 있는 빈펄 랜드로 향하면 아쿠아리움부터 워터파크, 롤러코스터까지 각종 볼거리와 액티비티를 이용하느라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도 모자랄 것이다.


즈엉동 남쪽에서 안터이 항구까지 이어지는 바이쯔엉 변은 여행자 사이에서 ‘롱비치’로 통한다. 해변 북쪽에 드문드문 자리한 아담한 호텔과 고급 리조트 단지에는 느긋하게 휴양을 보내려는 여행자가 모인다. 또 안터이항 북동쪽에 있는 바이사오 해변은 3킬로미터 길이로 깔린 새하얀 백사장 앞으로 에메랄드빛 바다가 펼쳐져 있어 현지인과 여행객 모두에게 사랑 받는 곳이다. 이처럼 근사한 해변이 섬 곳곳에 즐비하지만 대중교통 수단이 열악해 택시 혹은 여행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이럴 때 오토바이 렌트를 이용해보자. 메인 도로를 빠져나와 섬 구석구석을 잇는 비포장도로를 마음껏 질주할 수 있다. “여자 친구랑 오토바이를 빌려 섬 전체를 돌아보는 중이에요. 도로에 차가 별로 없어 운전하기가 어렵지 않아요.” 바이사오로 가는 길에 만나 링고 딩그란도(Ringo Dingrando)의 말처럼 오토바이는 여행자가 푸꾸옥을 제대로 살필 수 있는 최고의 이동 수단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섬을 일주한다면 공항 동쪽에 있는 함닌에도 가보자. 새우, 해마, 게 등을 잡는 어선이 들락날락하는 한적하고 평범한 어촌 마을이다. 부둣가 앞으로 여러 건어물과 통후추 그리고 조악한 기념품을 파는 몇몇 상점과 간이식당이 늘어선 것이 전부일 만큼 아담한 규모. 여행자를 상대하는 마을이라기보다 현지인이 각자의 일상을 이어나가는 곳에 가깝다. 오토바이 1대가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좁다란 부둣가에 막 정박한 어선, 뜨거운 태양을 비해 파라솔 아래에서 농담을 주고받는 상인 그리고 수줍은 표정으로 낯선 이방인에게 말린 불가사리를 선물로 건네는 꼬마 아이까지. 잠시 마을을 떠도는 사이 마주한 풍경은 섬 곳곳에 서린 정부 당국의 개발 의지와 전혀 무관해 보인다. 그리고 이는 어쩌면 푸꾸옥의 맨 얼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현재 섬 곳곳에서 진행하는 공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 되면, 푸꾸옥은 좀 더 근사한 휴양지로 발돋움할 것이다. 그럼 더 많은 여행자가 이 섬을 찾을 테고, 이 소박한 어촌 마을도 서서히 변화를 감지해야 할 운명이다. 여행 마지막 날, 섬에서 만난 모든 장면을 하나씩 주워 담듯 떠올려본다. 훗날 이 섬을 다시 찾는다면 아마도 함닌 마을로 곧장 향할 것 같다. 내가 담은 진짜 푸꾸옥의 한 장면이 여전히 남아 있길 바라면서.


 
고현은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의 에디터다. 김태호는 낯선 지역과 새로운 문화를 발견하는 것에 즐거움을 얻는 사진가다.

 

*취재 협조 베트남항공(vietnamairlin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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