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홍준호의 구식이 아니라 클래식
사는 게 지옥이다. 김수용 감독의 <혈맥>
최소한 배는 채우고 사는 대가로 우리가 포기했던 건 뭐였을까
작품은 정말 ‘있는 그대로’의 시대상을 보여준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4.19 혁명 ‘이후’가 이렇게도 무기력했다는 것도 동시에 알게 된다. 영화의 설정은 원작과 같은 해방 직후인데 왜 내 눈엔 영화가 제작되던 60년대가 보이는 것일까!
내 초장부터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의 기운을 쭉쭉 빼놓으리라. 일단 줄거리부터 보면 된다. 북한에서 홀로 내려온 김덕삼(김승호)은 아들 거북(신성일)에게 미군 부대에 들어가라고 강권하고, 옆집에 사는 함흥댁(황정순)은 딸 복순(엄앵란)에게 억지로 타령을 가르쳐 기생을 시키려 한다. 함흥댁의 남편인 깡통(최남현)은 그녀의 극성에 눌려산지 오래라 말도 별로 없이 언제나 깡통을 양철로 만들어 팔 뿐이다. 복순은 거북과 사랑에 빠져 있으며, 이 비참한 현실을 못 견디고 야반도주한다.
또 다른 이웃인 원팔(신영균)은 다리를 저는 어린 딸과 아픈 아내와 함께 살며 담배꽁초 속의 남은 담뱃가루를 모으고 탄피를 찾아 하루하루를 연명한다. 동생 원칠(최무룡)은 일본 유학파이지다. 그러나 소설가가 되고 싶고 통일 운동에 힘을 쓰겠다며 취직을 하지 않다가 결국 건설 현장에서 막노동을 한다. 한 때 그가 사랑했던 옥희(김지미)는 미군에게 몸을 파는 양공주가 되어 있다.
'다른 나라에 살아보지 않아서, 그 나라 사람들도 이런지 완전히 알 수는 없다만' 이란 전제를 깔고 잠시 이렇게 서두를 꺼내려 한다. 한국에서 살게 되면 강산이 한 번 바뀔 때마다 단순히 시대가 바뀐다는 생각이 잘 들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생각이 든다. 한국이라는 영토가 세포분열을 하듯 10년마다 '1960년대의 한국', 혹은 '1970년대의 한국'.. 그리고 '2010년대의 한국' 이라는 식으로 또 다른 국가를 생성했다고 말이다.
시간이 흘러가면 현재와 과거의 흘러간 시대를 이어주는 가늘고 질긴 끈이 있는 법이다. 그 끈을 아카이브가 수행한다. 그런데 한국은 그게 없어 보인다. 이런 이유로 현재의 세상이 과거의 세상을 이해하려 들 때는 마치 신대륙을 탐험하는 듯한 착각마저 줄 정도다.
지금의 젊은 사람들에게 김수용 감독의 1963년작인 <혈맥>의 배경이 '서울' 이라고 한다면 믿을 이가 얼마나 될까. <혈맥>을 만든 김수용 감독의 회고를 들어보면, 작품의 배경이 되는 잡초만 자란 민둥산 위의 판자촌이 사실은 서울 힐튼 호텔 부근이었다고 한다. 가끔 서울에 올라가 구경을 하다 보면 고개를 완전히 뒤로 젖혀야 그 형태를 완전히 볼 수 있었던 힐튼 호텔 말이다. 호텔이 지어지기 전에는 작품 속 등장인물들이 살기 위해 버둥대던 빈민 판자촌이 있었다고 한다. 여러모로 놀라운 일이다.
자유를 포기해도 좋으니 사람구실을 하고 싶다
<혈맥>은 문학, 영화 시나리오와 TV 드라마, 평론 등을 넘나들었던 김영수 작가의 희곡을 영화로 각색한 작품이다. 희곡은 해방 직후라 칭할만한 1949년에 쓰여졌으며, 그 덕에 이야기의 주된 배경이 영화와는 조금 다르기도 하다. 가령 원작 희곡은 지하 방공호에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아래로 내려간 40년대의 김영수 작가와 위로 올라간 60년대의 김수용 감독. 등장인물들이 사는 배경의 위치와 직업, 성격이 조금씩 달라지긴 했지만 말하고자 하는 소재는 같다. ‘사는 게 지옥이다’ 란 것이다.
사실 줄거리만 보고 있으면 <혈맥>을 그냥 신파 조의 드라마라고 넘겨버릴 수 있을 듯 하다. 그게 아니라고 한다면 60년대의 서울이 어떤 곳이었는지를 이해하는, 그러니까 위에서 언급한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이어주고 이해시킬 수 있는 끈 정도로의 가치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내가 <혈맥>을 보며 압도당하는 건 그런 기록으로서의 가치와 더불어 숨이 막힐 정도로 절망적인 리얼리즘에 있다.
4.19 혁명이 일어난지 1년 남짓 됐을 즈음에 이뤄진 박정희 전 대통령 세력의 군사 쿠데타 이후로 한국영화에서 현실을 다루는 방식은 지금의 TV 드라마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모두가 하하호호 거리는’ 홈 드라마와 더불어 <혈맥>처럼 비루하다 못해 지옥 같은 현실을 네오 리얼리즘을 방불케 하는 표현법으로 나눠진다.
개인적으로 가장 소름끼치게 기억하는 순간. 곤궁한 현실에 절망한 영팔이 집세를 못 낼 위기에 처하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가자!” 를 외치며 집안살림을 다 때려 부순다. 환자가 누워있건 말건.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의 마지막 순간과 더불어 가장 무기력한 한국 사회의 초상을 보여준다. 집을 부술 때 순간, 사선 구도로 전환되는 카메라의 위력이 대단하다.
내가 보기에 <혈맥>은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과 더불어 신화처럼 가려진 과거를 철저히 깨부수는 무시무시한 현실 그 자체였다. 김덕삼은 일제강점기 시기의 체득된 버릇대로 화만 났다 하면 자기도 모르게 일본말이 튀어나온다. 미군에게 초콜릿, 시가 따위를 선물로 받으며 몸을 파는 양공주 옥희는 일본인들이 살다가 비우고 간 적산 가옥의 다다미방에서 애써 ‘서양 물건들’을 갖다 놓고 산다. 원팔의 아내와 딸은 먹고 살기 위해 일제가 남기고 간 포탄을 분해하다 터지는 바람에 불구가 됐다. 방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이 붙여져 있지만, 그저 그림일 뿐이다. 이 비참한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 것도 없다.
작품은 정말 ‘있는 그대로’의 시대상을 보여준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4.19 혁명 ‘이후’가 이렇게도 무기력했다는 것도 동시에 알게 된다. 영화의 설정은 원작과 같은 해방 직후인데 왜 내 눈엔 영화가 제작되던 60년대가 보이는 것일까! 4.19 혁명의 주체는 학생들이었다. 혁명이 성공하고 독재자를 끌어내린 뒤, 학생들은 모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공부하러. 비어버린 자리를 이끌어 가야 할 사람들은 지식과 정치적 능력을 겸비한 사람들인데, 그들의 무능력함으로 인해 피를 흘리며 이뤄놓은 자유의 권리는 곧 군부독재의 탱크에 짓눌려 버렸다.
<혈맥>에서 수많은 인물들이 고통을 받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눈길이 갔던 인물은 유학파 영칠이었다. 그는 오랜 시간에 걸쳐 익힌 지식과 능력을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고, 또 어디에 써야 할지도 몰라 하는 사람이다. 그가 인생을 잘못 산 것이 아니다. 뭔가를 배우고 있을 때 사회가 급격하게 바뀌었을 뿐이다. 스스로 가족에게 짐이 된다고 생각한 영칠은 결국 공사장 막노동꾼이 된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내게 1963년의 <혈맥>의 등장인물들은 겨우 얻어놓은 '자유' 를 일종의 방탕하고 쓸모 없는 짓거리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자유를 생각할 새가 어딨어? 네가 말하는 자유는 당장 네 배를 채워주지 못하고, 우리도 먹여 살릴 수 없잖아. 돈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그것은 돈이 모이기 전까지는 시기상조의 권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지식인들이 이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할 때, <혈맥>의 등장인물들과 비슷한 당대의 국민들을 사로 잡은 세력은 다름 아닌 군사정권이었다. 우리가 개발 시켜서 너희를 먹여 살려 부자로 만들어줄께.
<혈맥>의 결말은 김덕삼과 깡통이 안착한 자식들을 보기 위해 환한 얼굴로 한창 가동되고 있는 공장을 찾는 것이다. 그 때는 1963년이었다. 김덕삼과 깡통 같은 인물들이 보기에는 마냥 좋았던 시기였을 것이다. 활발하게 공장이 가동되고, 방황하던 자식들은 일하며 사회는 발전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16년동안 같은 대통령을 보게 될 줄은, 사회에 대해 비판적 의견을 개진하면 잡혀갈 시대가 다시 오게 되리라는 것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이것도 리얼리즘이라면 리얼리즘이겠지. 이후에 일어날 일을 아는 사람들은 없지 않은가? 그렇게 보면 <혈맥>은 정말 단순히 사회 재현을 넘어선 처절한 ‘리얼리즘’ 물이다.
공장은 희망이었을까?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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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에서 전혀 유명하지 않은)파워블로거, 대학졸업생, 딴지일보 필진, 채널 예스에서 글 쓰는 사람. 혼자 작품을 보러 다니길 좋아하고 또 그런 처지라서 코너 이름을 저렇게 붙였다. 굳이 ‘리뷰’ 라고 쓰면 될 걸 뭐하러 ‘크리티끄’ 라고 했냐 물으신다면, 저리 해놓으면 좀 고상하게 보여서 사람들이 더 읽어주지 않을까 싶어서다. 이거 보시는 분들 글 마음에 드시면 청탁하세요. 열과 성을 다해 써서 바칠께요. * //sega32x.blog.m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