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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하게 느껴지는 이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우리는 지금 앞으로 가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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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에는 <우뢰매>를 보려고 줄을 섰고, 사춘기 시절에는 <그래, 가끔은 하늘을 보자> 덕에 걷다 멈춰 하늘을 보곤 했고,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를 보고선, ‘그래! 이건 내 이야기야!’ 하며 속으로 박수를 쳤다.

 개인적인 고백을 하나 하자면, 최근에 영화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렸다. 그래도 <영사기>는 연재를 해야 하기에 영화를 꾸준히 봐왔다. 하지만 그저께는 정말 수년 만에 영화를 보다가 지쳐서 중간에 나와버리기까지 했다. 누구나 살다보면 삶에 대한 권태가 밀려오기 마련이다. 뜨거웠던 애정도 차갑게 식어버리면 지워버리고 싶은 문신같은 존재가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막상 경험해보니 삶의 허무 같은 게 밀려왔다. 도대체 영화가 무엇인데….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소설가이고, 밴드를 하는 사람이다. 영화야 보건, 보지 않건 상관이 없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아, 이제 그만 지쳐서 영화를 못 볼 것 같아’ 라고 생각하니, 한 때 뜨겁게 사랑했던 여인을 군중 속에서 구분할 수 없는 슬픔 같은 게 밀려왔다.

 

 내가 이렇게 느끼게 된 이유는, 소위 여름 대작이라고 하는 영화들에 대한 염증이었다. 물론, 이 중에는 한국 영화도 끼어 있다. 나는 ‘대체 누가 방화를 돈을 내고 보냐?’며 핀잔하던 시절에도 애정을 품고 극장에서 관람해왔다. 그 때문에 <너에게 나를 보낸다>를 볼 땐, 고3 주제에 성인 행세를 하기도 했다. 당시엔 ‘한국 영화도 본단 말이야’라고 말하면, ‘이 자식 순 색마군!’하는 시선만 돌아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국 영화를 꾸준히 봐왔다. 


 어린 시절에는 <우뢰매>를 보려고 줄을 섰고, 사춘기 시절에는 <그래, 가끔은 하늘을 보자> 덕에 걷다 멈춰 하늘을 보곤 했고,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를 보고선, ‘그래! 이건 내 이야기야!’ 하며 속으로 박수를 쳤다. 영화에 등장한 친구의 누나인 ‘젤소미나(윤수진 분)’를 보며, 영화 속 홍경인 만큼이나 내 심장은 요동쳤었다. 젤소미나가 목욕을 하고 나와서 타올만 걸친 채 홍경인과 함께 TV를 볼 땐 온 몸이 빨갛게 후끈 거려, 그 온도에 스스로 화상을 입을 지경이었다. 90년대 영화답게 이 둘을 비추던 유일한 조명인 방안의 불이 꺼지고 둘은 은근 슬쩍 누워버리는데, 그때엔 교복을 입고 있던 홍경인이 어찌나 부러웠는지 속으로 ‘아아! 홍경인이 될테야!’라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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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시간은 흘러 흘러, 어느덧 소설가가 되었고, 내 소설을 라디오에서 연재하게 되었다. 그런데, 내 소설의 낭독자가 홍경인 씨라는 말을 들었을 땐, ‘아니, 인생이 이렇게 쉽게 될 리가 없어!’하며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의 공개방송을 위해 대기실에서 짬뽕을 후루룩 삼키고 있는 우리 사이에 끼어 몹시 집중해서 볶음밥을 먹고 있는 그에게 나는 물어보고 싶었다. “17년 전 그때, 젤소미나 누나의 가슴은 어땠습니까?” 물론, 이런 말은 하지 못했다. 대신, 나는 경인 씨에게 “역시 배우이신지라, 낭독을 멋지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따위의 작가답지 못한 중학생 수준의 보편적인, 도저히 찬사라고는 느껴질 수 없는 찬사를 했고, 경인 씨 역시 찬사인지 알 수 없는 나의 찬사에 “원작이 워낙 좋아서……”(그렇다. 나는 지금 내 자랑을 하고 있다. 원래 이런 칼럼, 하하하)라며 응수해주었다. 그나저나, 피부로 실감하지 못했지만, 아마 그때부터 였던 것 같다. 인생이 서서히 시시해지기 시작했던 것은.

 

 그러니까, ‘내가 하기에 따라서 누구를 만날 수도 있고, 더 좋은 걸 쓸 수도 있어’라는 생각이 은연중에 자리하면서, 내 작품에 기준이 높아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러니, 자연히 타인의 결과물에 대한 기준도 높아지고, 이것은 소설뿐 아니라, 영화, 음악, 드라마, 연극 등 모든 분야의 예술작품에 적용되었다. 물론, 확신할 순 없지만, 그리고 이건 절대 홍경인 씨의 탓이 아니지만(아직도 한이 맺힌 건, 그때 왜 그 질문을 하지 못했느냐는 것이다. 방송 5분 전이긴 했지만, 공개방송 녹음 펑크가 뭐, 대수라고!), 여하튼 이때부터였는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내 삶의 흥미로운 한 기둥이 썩어가고 있었다.

 

 인생은 수학적인 방식으로 흘러가지 않기에, 당연히 그때부터 모든 게 바뀌었다고 단언할 수 없다. 그렇지만, 돌이켜보면 아마 그때를 즈음하여, 나는 내 글들을 많이 버리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생각나기만 하면 썼고, 때론 생각나지 않아도 무턱대고 책상에 앉아서 손가락을 육상선수의 발처럼 움직였고, 뻔뻔하게도 그 모든 걸 청탁이 들어오는 족족 발표했다. 하지만, 이즈음부터 나의 손가락은 발목에 추가 매달려 바다에 던져진 배신자의 몸처럼 허공에서 굳어가고 있었다. 뇌는 오로지 떠오른 소재들을 필터링하는데 쓰였고, 어쩌다 떠오른 아이디어는 몇 줄 구현되다, 이내 휴지통으로 던져지는 신세가 되었다.

 

 어쩌면 영화는 변해가던 나의 희생양이었는지 모른다. 음악은 취향에 맞지 않으면 꺼버리고, 소설은 덮어버릴 수 있지만, 영화는 웬만해서는 컴컴한 공간 속에서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며 밖으로 나가기 어렵다. 그렇게 꾹꾹 참아오며 봐왔기에, 애정만큼 실망도 켜켜이 쌓여 온 것이다. 그렇기에 양적으로 성장한 방화에 대한 기대치 만큼이나 상심도 느껴왔는지 모른다. 충무로 키드로 살아온 내게 방화는 어느덧 애증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이걸 누구의 잘못이라 할 순 없다. 그 안에는 영화를 예술이 아니라, 흥행의 대상으로 보고 있는 대기업의 자본과, 보고 싶은 영화를 현실적으로 차단하고 있는 유통망과, 서사와 분위기, 그리고 실험정신 보다는 오로지 스타성 있는 배우를 찾는 우리의 현실이 뒤섞인 결과물일지 모른다. 여하튼, 슬프게도 나는 더 이상 여름 대작을 믿지 않게 되었다. 이제 8월 대작이라는 말은 애석하게도 대중의 동정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시각적 갈증을 자극시켜줄 ‘조미료 영화’와 동의어로 들린다.

 

 “헐리우드 영화를 냅두고 왜 한국영화 따위를 보는거야?” “이 자식, 은근히 밝히는구먼”.
 이 말들을 뒤로 하고 텅빈 극장에서 앉아 혼잣말을 되뇌곤 했다.
 ‘언젠가는 한국 영화도 좋아질 거야’. ‘어쩌면 사람들은 언젠가 한국 영화를 더 많이 보게 될 거야. 프랑스처럼’
 물론, 그런 날이 왔다. 

 하지만, 나는 이제 험담을 들으며 봐왔던 영화들을 더욱 다시 보고 싶어졌다. 
 <나에게 오라>, <하얀 전쟁>, <나의 사랑 나의 신부>, 그리고 <세상 밖으로>…….
 
*
 제작환경뿐 아니라, 세상의 시선과 싸우며 영화에 생을 바친 이들이, 그리고 그들의 정신이 오늘따라 아득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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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민석(소설가)

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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