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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의 과거, 현재 그리고 근성 : 에스파 'NEXT LEVEL'
에스파 ‘NEXT LEVEL’
SM의 근성 그리고 SM의 과거가 만든 현재를 알고 싶다면 고개를 들어 ‘Next Level’을 보라. (2021.06.02)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게 2021년 한국에서 만들어진 게 맞나 거듭 화면을 확인했다. 짧지 않은 시간 갖은 케이팝을 보고 들으며 웬만한 것에는 동요하지 않게 단련되었다고 생각했지만 큰 착각이었다. 노래가 진행되면 될수록, 영상이 재생되면 될수록 흔들리는 동공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혹자는 TV 채널처럼 휙휙 돌아가는 구성에서 2013년 발표되어 이제는 근본 없는 케이팝의 전설이 된 소녀시대의 ‘I Got A Boy’를 떠올렸다는 감상을 전하기도 했지만, 에스파의 ‘Next Level’을 듣고 난 감정은 ‘I Got A Boy’를 처음 들었을 때 느꼈던 똑 떨어지는 당황스러움과는 조금 달랐다. 굳이 비교하자면 뭔가에 ‘당한’ 뒤 남은 멍함 쪽에 가까웠다.
이게 도대체 무슨 기분인지, 호불호의 영역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건지 고민하는 사이, 주위 사람들이 하나둘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넥며드셨군요’. 노래 제목 ‘Next Level’과 ‘스며들다’를 조합한 이 말은 처음엔 이게 뭐냐고 손사래를 쳤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꾸만 노래에 손이 가는 사람들 사이 오가는 ‘야나두’적 인사였다. 그러니까 이 노래는 정말이지 이상한 구석 투성이었다. 요즘 케이팝의 상식이라는 세련된 팝 스타일과는 수억 광년 떨어진, 오히려 세기말이 딱 어울리는 베이스 리프, 특별한 멜로디랄 것도 없어 오직 ‘쪼’로 살려내는 후렴구, 이들의 세계관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코스모와 나비스와 광야의 향연. 이 의문의 조합에 ‘넥며든’ 케이팝 팬들은 어느새 이것이 바로 그 동안 그리웠던 ‘아버님(이수만 대표)의 훈육’이라는 농담을 나누고 있었다.
도무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이 막무가내에서 도망치기 직전, 우리를 붙잡는 건 단 한 번이라도 케이팝에 마음을 주었던 이라면 DNA에 문신처럼 새겨진 SM의 각종 시그니처다. 세월에 풍화된 디지털 이미지처럼 곳곳이 닳아 있지만 신묘하게도 바로 어젯밤 좋아했던 것처럼 놀랍도록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이 특징들은 SM이 시대와 유행을 외면하고 만들어낸, 그야말로 고집과 근성이 빚어낸 결과물들이다.
‘Next Level’을 채운 ‘The SM’적 요소들은 눈을 가린 채 그저 앞으로 달려 나가는 경주마의 질주를 닮았다. 거침이 없다는 말이다. 에스파의 아바타 아이(ae)가 살고 있다는 ‘광야(KWANGYA)’, 에스파와 아이의 연결을 방해하고 세상을 위협하는 ‘Black Mamba’, 에스파와 아이를 지켜주는 조력자이자 안내자 ‘나비스(NAVIS)’ 등의 개념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낯설지만, 이는 ‘절대적 룰’, ‘적대적인 고난과 슬픔’, ‘감당할 수 없는 절망’ 같은 SMP 특유의 피 끓는 비장함으로 단단하게 얽힌다. 어쨌든 확실히 지금 이곳만은 아닌 별세계(別世界)를 가리키는 배경은 H.O.T가 주연한 영화 ‘평화의 시대’와 S.E.S의 ‘Dreams Come True’가 교차하는 그 어디쯤이다. 곡의 각 파트 사이 어색한 연결 고리는 소녀시대 티파니 특유의 외침을 닮은 ‘NAVIS Calling’으로 채워진다. 닝닝과 윈터가 일종의 ‘유영진화’된 창법과 고음으로 소화해내는 이질적인 R&B 파트는 2000년대 초반 SM에서 발매된 어느 앨범의 하이라이트 멜로디를 듣는 것처럼 정겨울 따름이다. 방심한 틈을 타 툭툭 떨어지는 ‘Come On’이나 ‘Check it out’처럼 발음하는 ‘제껴라’, 엔딩의 ‘Ha!’ 같은 작은 추임새 하나까지도, 자의건 타의건 20년 넘게 SM이 만든 케이팝을 들어온 이들에게는 강제로 추억을 소환하게 만드는 익숙함이다. 요컨대 이것은 3분 42초짜리 SM 멀티 유니버스다.
이것을 자신의 근원을 찾아가는 초심여행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퇴행이라 해도 좋을지는 아직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다만 한 문장이 떠오른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 한국인의 무의식에 주문처럼 박힌 이 문장 역시 참인지 거짓인지 아직 밝혀진 바는 없다. 분명한 건 에스파의 넷 아니 여덟 명의 멤버들은 오늘도 쉬지 않고 ‘가장 SM적인 것이 가장 케이팝적이다’ 라는 기세로 광야와 코스모를 부르짖으며 부지런히 팔목을 꺾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이것이 최선인지는 미지수지만 앞으로 SM의 미래를 이야기하며 ‘Next Level’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SM의 근성 그리고 SM의 과거가 만든 현재를 알고 싶다면 고개를 들어 ‘Next Level’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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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케이팝부터 인디까지 다양한 음악에 대해 쓰고 이야기한다. <시사IN>,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