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친 여자> 도망치지 않는 여자들

여자는 도망치지 않고,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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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여자들은 경험적으로, 본능적으로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관계라는 건 물줄기와 같아서 늘 흐르는 가운데 섞이기도, 부딪히기도 하면서 강을, 바다를 형성한다는 것을 말이다. (2020.09.10)

영화 <도망친 여자>의 한 장면

바다는 밀려왔다 밀려나는 일정한 형태의 운동으로 보여도 파도를 구성하는 물결은 매번 제각각의 형태로 모양을 달리한다. 사람들 사이의 연결성도 이와 비슷해서 안부를 묻고 수다를 떨고 음식을 나눠 먹고 감정을 공유하는 등의 삶의 겉모습은 거기서 거기인 듯해도 각자 나름의 배경과 사연으로 이 관계를 규정하고 받아들이는 바가 모두 다르다. <도망친 여자>는 바다와 같은 관계의 속성에 관한 영화다. 

닭장 속의 닭을 비추며 시작하는 영화의 주요한 배경이 되는 장소는 빌라다. <도망친 여자>는 감희(김민희)가 세 명의 지인과 만나는 이야기를 일종의 에피소드 형식으로 진행한다. 빌라와 같은 공동주택은 비슷한 주거 공간에 각각의 삶을 꾸려 바깥에서 볼 때는 단일하게 묶인 듯해도 안으로 들어가면 사는 일의 양상이 천차만별이다. 홍상수 감독은 같은 듯 다를 수밖에 없는 삶을 에피소드 형식으로 한국 특유의 거주 공간에 빗대 구조화한다. 

감희는 지난 5년 동안 단 하루도 남편과 떨어져 본 적이 없다. 남편의 출장 덕(?)에 이제 처음으로 혼자의 시간을 갖게 된 감희는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지인을 차례로 찾아간다. 영순(서영화)은 이혼한 지 얼마 안 된다. 이혼하면서 손에 쥔 돈으로 지금 사는 집을 얻었다. 뒷마당에 밭이 있어서 농작물도 기르고 여유로운 생활을 즐긴다. 감희와 이야기 도중 찾아오는 이가 있는데 이웃집 남자다. 왜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느냐며 영순에게 따져 묻는다. 

수영(송선미)은 인왕산이 보이는 삼청동으로 이사 왔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빌라에서 재밌게 살고 있다. 위층에 사는 건축가 남자와 카페에서 만나 지금은 ‘썸’을 타는 중이다. 그때 젊은 시인이 다짜고짜 찾아와 수영에게 만나 달라며 예의 없게 군다. 만만찮은 성격의 수영은 경우 없는 시인을 향해 호통도 치고 욕도 섞어가며 집 안에는 단 한 발자국도 들이지 못하게 한다. 

지인과 시간을 보낸 감희는 이번에는 혼자 극장을 찾아 우연히 우진(김새벽)을 만난다. 우진은 이 극장에서 일하고 있다. 근데 둘 사이가 좀 서먹하다. 우진의 남편 성규(권해효)가 과거 감희와 연인이었던 사이다. 그 때문에 마음에 걸렸던 우진은 감희와 만나기를 고대해왔다. 감희는 성규와는 이제 잊은 인연이라고 걱정하지 말라며 우진의 걱정을 덜어준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극장을 나오던 감희는 성규와 마주친다.   

제목은 ‘도망친 여자’이지만, 이 영화의 여자들은 난처한 상황에 부닥쳐서도 도망가는 법이 없다. 성규와 만나 이것저것 불편하게 얘기를 나누던 감희는 짜증 나는지 그를 등지고 도망가는 듯하다가 이내 멈추고 다시 돌아와 극장에서 상영 중이던 영화를 마저 본다. 그러니까, <도망친 여자>의 여자들은 맞선다. 감희가 극장에서 정면으로 응시하는 스크린에는 두 개의 물줄기가 만나 부딪히고 섞이는 바다 (혹은 강)의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영화 <도망친 여자>의 포스터

영화 속 여자들은 경험적으로, 본능적으로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관계라는 건 물줄기와 같아서 늘 흐르는 가운데 섞이기도, 부딪히기도 하면서 강을, 바다를 형성한다는 것을 말이다. 증발하지 않는 한 관계의 줄기를 이루는 무수한 만남의 물결은 밀려왔다 쓸려갔다 맴돌기 마련이어서 도망칠 수 없기에 도망치려는 시도 자체가 자기에게는 손해라는 것을 감희와 영순과 수영과 우진의 삶과 이들의 관계가 반영한다. 

오히려 정면을 보지 못하는 건 남자들이다. <도망친 여자>의 남자들은 극장에서의 남자를 빼면 모두 카메라를 등지고 있다. 관계에서 등을 지는 건 달아나거나 몸을 숨기는 것이다. 영순에게 사람과 고양이의 삶은 다르다고 먹이를 주지 말라는 남자와 수영에게 만나 달라 떼를 쓰는 남자는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할 것 같자 꼬리를 내리거나 어딘가로 사라진다. 아니면 성규처럼 말로만 진실이 어쩌고저쩌고 진실하지 않게 떠들어댈 뿐이다. 

극 중 남자들처럼 도망치지 않는 이 영화의 여자들에게 더 어울리는 수식은 ‘벗어난’이다. 영순처럼 결혼의 굴레에서 벗어나자, 수영처럼 선택을 강요받는 폭력적인 상황을 이겨내자, 우진처럼 오랜 시간으로 쌓인 껄끄러움을 극복하자, 감희처럼 익숙했던 남편과의 시간에서 잠시 빠져나오자 기존의 관계가, 세계가 다르게 보인다. 도망치려는 남자들에게서 벗어난 여자들에게는 좀 더 자유롭게 굽이치는 관계의 시간이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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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허남웅(영화평론가)

영화에 대해 글을 쓰고 말을 한다. 요즘에는 동생 허남준이 거기에 대해 그림도 그려준다. 영화를 영화에만 머물게 하지 않으려고 다양한 시선으로 접근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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