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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질 특집] 작가의 덕질 - 곽재식, 박솔뫼, 최세희, 허남웅, 조영주

<월간 채널예스> 2020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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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번역가, 영화평론가 등 글을 다루는 다섯 명의 필자에게 청해 듣는, ‘내가 그 작가에게 빠진 이유는 말입니다!’ (2020.08.11)


소설가, 번역가, 영화평론가 등 글을 다루는 다섯 명의 필자에게 청해 듣는, ‘내가 그 작가에게 빠진 이유는 말입니다!’ 


지금 듀나를 추천하는 일



곽재식(소설가)

책꽂이나 가방 안을 한번 살펴보자. 혹시 듀나 작가의 단편집 『면세구역』이 있는가? 만약 없다면 『태평양 횡단 특급』이라는 책은 있는지 확인해보자. 그 책도 없다면, 지금 인터넷 서점 사이트에 들어가서 두 책 중 한 권을 당장 주문하는 것은 무척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두 권의 책은 누구나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재미있는 책이고 한편으로 SF의 묘미를 깊숙하게 느끼기에도 무척 좋다. SF의 영역을 넘어 시중에서 살 수 있는 모든 단편 소설집 중에서 고른다고 해도 이 정도로 재미있고 감동적인 이야기로 꽉 차 있는 책은 흔치 않다고 생각한다. 두 책의 내용 전체는 아직까지는 한국어로만 나와 있으므로,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한국어를 잘 아는 사람들뿐이라는 점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한국어를 알면서 이 책을 읽지 않았다는 것은 한국어를 알면 좋은 점 한 가지를 놓치는 일이라는 뜻이다. 한국어를 알면 이런 책도 읽을 수 있구나 하는 보람을 줄 수 있는 책이라고 할 만하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이야기들은 현실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놀라운 사건들을 가져와 눈앞에서 보여주는 내용이 많다. 그러면서 삶에 치이는 도중에는 생각하기 어려웠던 굵직굵직한 고민거리들을 던져 넣어준다. 삶이란 무엇인가, 인생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우주는 어떤 곳일까, 사람의 역사에서 발전의 방향이란 주어져 있는 것인가, 흩어져 소용돌이치는 것인가. 그런데 자칫 뜬구름 잡는 것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고요한 골짜기에서 깊이 명상해야 한다는 책은 결코 아니다. 이 책 속 소설들은 그런 소재를 생생하게 와닿는 짜릿한 사건을 통해 펼쳐 보인다. 잡다한 상식을 많이 알고 있는 아버지가 들려주는 나의 출생의 비밀에 대한 이야기부터, 배가 고파 식량을 구하기 위해 험악한 도시의 골목을 돌아다니다 편안하게 놀고 먹을 곳을 발견해 좋아하는 내용까지, 사람을 호기심으로 이끌어 당겨서 책 속 세상에 휘말아 넣는 구체적이고 생동감 있는 사연들이 힘 있게 펼쳐진다.

거기에 더해 정신없이 다음 이야기로 내닫는 말들을 펼쳐 놓다가 한두 마디로 쿡쿡 짚어놓고 넘어가는 단어 몇 개가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흔들 수 있는지, 조용한 설명조로 줄거리를 풀어내다가 결정적인 장면에서 감상을 진하게 풀어내는 한두 문장이 얼마나 오래 마음에 남는지, 아름다운 글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보고 즐길 것이 많은 책이다.

그뿐 아니라 두 권의 단편집에는 언급해볼 만한 다른 장점도 많다. 분량이 넘쳐 이 두 책에 관한 이야기를 더 늘어놓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생각하는 이름 로베르토 볼라뇨



박솔뫼(소설가)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로베르토 볼라뇨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했다. 올해의 책, 좋아하는 작가, 영향받은 소설가…. 그런 것들을 말해야 할 때마다 볼라뇨를 말하고 『2666』이나 『야만스러운 탐정들』을 추천해왔다. 그게 아니더라도 볼라뇨에 대해 이야기한 사람은 많고 그중 의미 있는 것을 모은 『볼라뇨, 로베르토 볼라뇨』라는 훌륭한 책도 있고 게다가 이 책은 무료다. 그러다 보니 짧은 글이지만 볼라뇨에 관해 또 쓸 필요가 있을까 싶어졌고 이번 원고 제안은 거절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볼라뇨라…. 문득 오랜만에 볼라뇨를 생각하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고 잠시지만 볼라뇨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 시간이 무척 좋았다. 어떻게 쓰더라도 내가 그의 소설에 대해 느끼는 놀라움, 쓸쓸함과 우정의 순간들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겠지만 무엇보다 그러한 것들을 생각해보는 시간이 정말로 좋았다. 볼라뇨의 소설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정말 좋은데, 예를 들어 『야만스러운 탐정들』 시작 부분의 문학에 미친 청년들의 모습이라든가, 『먼 별』 결말 부분에서 화자가 바르셀로나를 걷는 장면이라든가 그런 것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우연히도 볼라뇨의 번역자에게서 연락이 와 안부를 주고받았고 볼라뇨의 새로운 번역서에 관한 소식도 전해 들었다. 그런 이야기. 볼라뇨를 생각하고 볼라뇨 작업은 어떻게 진행되고 계세요 같은 대화. 나는 그런 것이 좋고 길을 걷고 커피를 마시며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또 떠올려보는 것이 좋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지금 쓰고 있다. 

볼라뇨의 『야만스러운 탐정들』은 양장판 상하 두 권으로 출간되어 있지만 가볍게 한 권으로 합해져 출간된 버전도 있다. 여름에는 그것을 들고 바닷가 호텔에서 그것만을 읽고 싶다.


제니퍼 이건의 ‘결정적’ 방문



최세희(번역가)

작가 제니퍼 이건에 관한 한, 나는 성공한 덕후다. 우선, 한국에서 출간된 그의 책을 모두 내가 번역했다. 그의 독자들에겐 죄송할 일이나 덕후로선 가문의 영광이다. 어디 그뿐이랴. 그가 2011년 퓰리처 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직접 통화하면서 ‘팬 인증’을 받기까지 했다! 처음부터 뜨거웠던 사랑은 아니었다. 나만의 촉으로 발굴한 운명도 아니었다. 출판사의 의뢰로 처음 만난 『더 킵』은 만화 같은 인물과 멜로 드라마의 구태로 문학의 카타르시스를 만들 줄 아는 작가라고 생각하는 데서 그쳤다. 발을 끊은 지 수십 년 넘은 마음의 만신전에서도 상석에 그를 모시게 된 결정타는 『깡패단의 방문』이었다. 역시 출판사에서 보내온 책을 받아 든 그해 정초에 나는 이른바 중년의 위기에 유별나게 허덕이고 있었다. 갈수록 옹졸해지는 자신을 못 잡아먹어 늙으면 이 주접도 숨이 죽겠지 싶어 기다렸던 중년에 초입부터 엎어진 터였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살아서 헛것이었다’라는 기형도의 시구만 떠올라 소주잔만 거푸 뒤집고 있었다. 그때 만난 『깡패단의 방문』은 하필이면, 치명적이게도, 미숙해서 슬픈 나의 무수한 데자뷔로 다가왔다. 다른 사람의 사소한 물건을 훔치면서, 거기 깃든 추억과 시간을 소유한다고 믿었던 여자라니, 자신의 욕망에 솔직할 수 없었고, 그럴 시간도 찾지 못한 채 결국 영영 입을 다물고 있다 자의 반 타의 반 허망하게 죽어버리는 게이라니, 록음악을 들으며 쉼표가 등장할 때마다 음악은 아직 끝난 게 아니라고, 그러니 아직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며 안심하는 자폐아라니. 『깡패단의 방문』은 인생과 시간의 잔혹한 결탁 속에서 진즉 나가떨어진 사람들이 눈물로 쓴 교환일기였다. 기어코 건진 희망의 메시지란 게 ‘그럼에도 <아직은> 살아 있다고. 지금 우리의 시간은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라고. 그러니 죽지 말자’가 전부지만, 그것이야말로 문학의 변치 말아야 할 소임이 아닐까. 문학이 이렇지 않다면 얼마나 많은 덕후가 그 한 몸 던질 열락 없이 화병으로만 삭았을까!


나는 스티븐 킹의 실패한 덕후다



허남웅(영화평론가)

나는 실패한 덕후다. 한때 출간되는 스티븐 킹 책은 모두 구매하고, 있는데 또 사고, 다 읽고, 다시 한번 읽고, 소비한 돈의 액수와 모은 책의 권 수와 읽은 페이지의 분량이 스티븐 킹을 향한 내 사랑의 크기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근데 왜 나는 실패한 덕후라고 이 귀한 지면에서 자책하는 것인가?

지난해 11월 출간된 『고도에서』를 구입하고, 읽고, 글을 쓰고 한 이후에 그의 소설을 단 한 권도 손에 넣지 못했고, 그래서 읽을 수 없었고, 자칭 타칭(내가 스티븐 킹 왕팬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월간 채널예스』에서 이렇게 청탁을 해왔다!) 스티븐 킹 덕후로서 자격 미달의 자책감에 시달리며 술과 담배와 도박에 빠져 사는 건 아니고, 이제나저제나 언제 스티븐 킹의 ‘성덕’이 될 수 있을까, 일 때문에 부족한 책 읽는 시간과 예전 같지 않은 열정을 자책하며 보내고 있다.

영화 전문지 기자 시절이었다. 영화와 관련한 책이 매주 출판사로부터 전달됐다. 그중에는 스티븐 킹의 책도 당연히 있어서 지구멸망 소재의 걸작인 『스탠드』 여섯 권이 몇 주 간격으로 순차적으로 배달됐다. 잡지사 수신의 책은 기본적으로 회사 재산이라 기자 개인이 가져갈 수 없었는데 나는 조건을 들어 손에 넣었다. “제가 꼭 스티븐 킹 인터뷰를 성사시키겠습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한국에서 ‘미미 여사’로 유명한 미야베 미유키의 인터뷰를 추진하여 직접 일본에서 만난 적이 있다. 자신감을 갖고 스티븐 킹의 국내 출판사를 통해 문의한 결과, 기대와 달리 어렵다는 답변을 듣고 인터뷰가 불발된 아쉬움은 무슨! 어떻게 하면 『스탠드』 전집을 회사에 돌려주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던 기억이 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잡지가 폐간하고 회사가 문을 닫으면서 『스탠드』는 지금 내 집 책꽂이 가장 양지바른 곳에 보관되어 있다.

최근에 나온 『욕망을 파는 집』을 아직 읽지 못했고, 스티븐 킹 인터뷰도 못 한 나는 실패한 덕후다. 더는 스티븐 킹 덕후 안 하련다. 농담이고, ‘실덕’의 알리바이를 벗기 위한 사랑이 더 커지는 걸 느낀다.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는 꼭 스티븐 킹과의 인터뷰를! 그전에 먼저 『고도에서』 이후의 작품부터 섭렵해야겠다.


이상한 현실의 분홍 토끼


 

조영주(소설가)

오프라인 서점 매대에 깔린 책의 제목을 일일이 읽어보는 일을 좋아한다. 『그럴 땐 바로 토끼시죠』 역시 그러다 발견했다. 초록색 바탕 표지에 컵 속으로 ‘잠수’하는 분홍 토끼가 그려져 있었다. 잠수하는 분홍 토끼라니, 바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떠올렸다.

어린 시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처음 폈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건 앨리스가 아니라 토끼였다. 주인공 앨리스를 이상한 나라로 인도한 수상한 흰 토끼. 흰 토끼는 앨리스가 부르는 걸 무시하고 도망친다. 앨리스는 이런 흰 토끼가 떨어뜨린 장갑을 전해주려고 쫓아가다가 ‘이상한 나라’를 만난다. 김토끼의 책 역시 그랬다. 내가 살고 있는 현실과 미묘하게 다른 또 하나의 세계로 나를 인도했다.

끊임없이 적고 싶은 기이한 버릇,

떡볶이를 좋아하고,

걸핏하면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들고,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니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

현실이라는 이상한 나라를 살아가는 토끼 한 마리.

작가의 사생활이 궁금해졌다. SNS를 찾아내 팔로를 하고, 김토끼가 만든다는 굿즈와 이모티콘를 탐냈다. 그러자 김토끼도 내게 호기심을 갖기 시작했다. 서로의 글에 ‘좋아요’를 누르고 덧글을 달다가 인스타그램 DM으로 대화를 텄다가 또 하나의 인연을 발견했다. <채널예스> 칼럼 취재를 통해 만난 『게놈 익스프레스』의 조진호 작가가 김토끼 지수의 은사님이란다. 아아, 인연이다 싶어 지난 7월 18일 노들서가에서 열린 북토크 겸 생일 파티에 김토끼를 초대했다. 

생일 당일, 작가는 아직 서점에 안 깔린 신간 『맨손 체조하듯 산다』를 선물로 갖고 왔다. 책을 펴자 낯익은 토끼와 함께 내 생일 날짜가 적혀 있었다. 생일 즈음이 배경인 책을 발견하면 늘 반갑다. 하물며 내 생일 날짜가 적힌 책이라니, 최고의 생일 선물을 받아버렸다. 그렇게 올해, 잊지 못할 생일이 또 한 번 추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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