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엄지혜의 기억하는 말들
“엄마, 아줌마 같아.” 아들이 5살 때 내게 했던 말. “아니, 아줌마가 어떤 건데? 엄마 지금 촌스럽고 별로라는 거야?”(라고 말하진 않았지만 얼추 비슷하게 말했다) 5살 아이한테 ‘아줌마 같다’는 건 뭘까. 추레한 차림으로 집에서 살림을 하는 모습? 딱히 미디어를 많이 접촉하는 아이도 아닌데 어떻게 ‘아줌마’라는 느낌을 ‘내가 다소 안 꾸민 몰골로 있을 때’ 언급하는 걸까. “아빠, 아저씨 같아”라는 말은 한번도 안 했으면서, 억울하고 화났다. ‘아줌마’란 무언가? ‘아주머니’를 낮추어 이르는 말. 아주머니란 무엇인가? “남남끼리에서 결혼한 여자를 예사롭게 이르거나 부르는 말” 아닌가. 그저 결혼한 여성일 뿐인데, 아줌마는 왜, 무엇이, 어째서!
결혼한 후 지금의 직장으로 이직했다. 아이를 낳지 않았을 때다. 2차 면접을 보는 날, 결혼한 사실을 굳이 밝히지 않았다. 질문을 받았을 때 비로소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덜컥 긴장됐다. 내가 남자였다면 ‘기혼’이라는 사실이 플러스가 됐을 것이다. 책임감이 더 큰 사람으로 여겨질 테니. 기혼을 밝히고 살짝 움츠러든 내가 설핏 안쓰러웠다.
아줌마 직장인과 미팅할 때면 보이지 않는 연대가 있다. ‘지금 힘드시죠?’, ‘괜찮아요?’, ‘우리 힘내요.’, ‘제가 당신, 일 잘하는 거 알고 있어요.’를 눈빛으로 보냈다. 경력이 단절됐다가 재취업에 성공한 출판 마케터 분이 있었다. 오랜만에 사회에 나오니 어떻게 일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도움을 청했다. 성심껏 알려 드렸다. 1년 후쯤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고 퇴사 소식을 들었다.
“솔직히 아줌마라고 다 일을 잘하는 건 아니죠.”, “회식도 막 안 가고 좀 그렇잖아요? 일정 빼기도 어렵고.”, “밀레니얼 세대를 알긴 알아요? 어휴, 맨날 바쁜 척. 맨날 자식 걱정. 젊은 사람들에게 일할 기회를 좀 주세요.” 이런 말을 면전에서 들은 적은 없다. 하지만 가끔 생각한다. 혹시 나를 저렇게 생각하고 있진 않을까?
내가 만난 아줌마 직장인들은 상대를 탁월하게 배려할 줄 알았다. 부담스럽지 않게, 하지만 단단하고 너그럽게 상대를 대했다. 왜 아줌마들은 이토록 따뜻한 센스가 있을까? 살림을 하기 때문에, 매일 가족을 돌보는 사람이라서. 자신을 불편하게 생각할 또 하나의 시선을 알기 때문에 더 열심히 일했다.
누군가 물을 것이다. “아니, 그럼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일을 못해요? 저는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데 제가 센스가 없어요? 배려가 없어요?” 나는 답할 것이다. “아니요. 다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아줌마’인 기혼 여성‘도’ 일을 잘한다는 사실입니다.”
수년 전 만났던 아줌마 소설가. 그는 내게 “제가 엄마인 거, 굳이 기사에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어째서 자신이 기혼 여성, 그리고 엄마인 것을 말하지 말라고 했을까. 지금 삶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육아와 살림, 그 안에서 얻는 생활감수성이 얼마나 귀한데 어찌 현재의 자신을 감추려 할까. 다시는 이 소설가가 쓴 책을 좋아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는데, 7살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은 그의 말이 더없이 애처로울 뿐이다.
“엄마, 아줌마 같아.” 이 말은 혹시 책에도 묻어나는 게 아닐까? 아줌마 작가가 쓰는 책은 혹시 핫핑크 표지를 쓰면 안 되는 거 아닐까? 오늘도 의심만 가득 안고 아이와 남편이 잠든 새벽, 몇 글자라도 써보겠다고 식탁 앞에 앉은 나. 스쿨 미투 운동을 지원한 '정치하는 엄마들'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선정하는 ‘제3회 6월민주상’ 대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읽으며 소심하게 외쳐본다. “네, 저 아줌마 작가 맞아요.”
추천기사
관련태그: 엄지혜, 생활감수성, 밀레니얼 세대, 미투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