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여자> 기억의 유령이 주위를 배회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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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에 휩싸인 듯 으스스한 분위기 속에서 미라에게 찾아오는 기억의 형태는 선명하고 명명백백하여 꼭 유령이 찾아온 듯한 인상을 준다. 기억이라는 유령이 미라 주위를 배회하고 있다고 할까. (2020.06.04)

영화 <프랑스여자>의 한 장면

여자가 카페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미라(김호정)이다. 파리에 유학 온 후 프랑스인 남편을 만나 정착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화면 사이에 둔 그녀의 얼굴에 색색의 빛이 반사된다. 뭔가 복잡한 사연이 있어 보인다. 남편이 테이블에 와 앉자 미라는 신경질적으로 맥주잔을 쳐 바닥에 떨어뜨려 깨트린다. 둘 사이가 심각하다. 남편에게 새 여자가 생겼다. 미라도 아는 여자다. 남편과는 볼 장 다 본 관계가 됐다. 자리를 뜬 미라는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려 화장실의 세면대 앞에 선다. 별안간 세면대 위의 전구가 점멸과 점등을 반복하며 깜박인다. 아예 켜지든가, 아니면 꺼지든가 하나의 세계를 확정하면 좋을 텐데 그러지 못한 전구의 상태가 꼭 미라의 정체성 같다. 

미라는 ‘경계인’이다. 한국인이면서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고, 배우를 꿈꿨지만, 지금은 그 꿈을 놓았다. 남편과의 이혼으로 마음을 정리하려 파리에서 서울로 잠시 귀국한 미라는 오랜만에 옛 친구들을 만나 학교에 다녔을 적 이야기를 나누는데 서로 기억이 맞지 않는다. 누구의 기억이 맞을까, 생각을 정리하려는 순간, 미라가 기억하는 과거의 순간이 현재로 소환되어 환상 속에 있는 듯 혼란스럽게 한다. 이게 다 지금 미라의 마음이 복잡해서다. 심란해서다. 영화는 그런 미라의 내면의 순간을 서울과 파리, 과거와 현재, 일상과 환상을 점멸과 점등을 반복하는 전구처럼 경계가 교차하는 방식으로 전개한다. 

<프랑스여자>를 연출한 김희정 감독은 미라 역의 김호정 배우에게 시나리오 작업을 하면서 참조한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이게 다예요(C’est tout)』를 읽어보라고 권했다. 그중 한 대목을 소개하면, ‘이따금 나는 아주 오래도록 텅 비어버린 느낌이다. 내겐 신원이 없다. 그게 날 두렵게 한다 우선은. 그러고 나서 그것은 행복의 느낌으로 스쳐 지난다. 그러고 나서 그것은 멎는다. 행복하다는 감정. 말하자면 얼마쯤 죽어있는 느낌. 내가 말하고 있는 곳에 얼마쯤 내가 없는 듯한 느낌.’ 이 책은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죽기 1년 전 죽음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서른다섯 살 연하의 연인에게 남긴 유서와 같은 책이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 혹은 경계에서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복잡한 마음을 다잡고 지나온 삶을 정리하려 힘들게 글을 쓰는 광경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단어는 ‘외로움’이다. 영혼이 점점 빠져나가 텅 빈 육체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정신의 사투. 죽을힘을 다해 모든 노력을 짜내는 그 순간에 인간은 보지 못한 것을 보는 능력, 말하자면 달의 뒤편을 감각하는 신비의 경험을 한다. 그럴 때 내 안의 시간은 굴절하고 공간은 허물어져 모든 것의 경계가 무화한다. 처음 겪는 낯선 상황에 대해 미라는 자문하듯 묻는다. “나는 내 선을 잘 그리고 사는 걸까?” 미라의 혼란한 심리의 공백을 가득 채우는 건 바로 유령이다. 


영화 <프랑스여자>의 포스터

기 드 모파상은 단편소설 「오를라」에 이렇게 썼다. ‘외롭게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 우리는 그 공백을 유령들로 메우려 한다.’ <프랑스여자>에서 미라는 술집을 나와 골목을 걷거나, 덕수궁 돌담길을 지나치거나, 통로 비슷한 것을 통과할 때면 살아온 삶의 시간과 공간이 섞인다. 잊었던 특별한 순간의 기억이 그녀 앞에 재생되거나 혹은 왜곡되거나 하는 방식으로 찾아온다. 안개 속에 휩싸인 듯 으스스한 분위기 속에서 미라에게 찾아오는 기억의 형태는 선명하고 명명백백하여 꼭 유령이 찾아온 듯한 인상을 준다. 기억이라는 유령이 미라 주위를 배회하고 있다고 할까. 

유령은 죽은 자이면서 산 자의 공간을 배회하는 까닭에 경계인의 정체성을 갖는다. 경계는 구분이기도 하면서 연결이기도 하다. 인간의 생, 즉 삶과 죽음을 구분하면서 연결하는 경계의 선의 정체는 순환이다. 다시 한번, 미라는 영화 첫 장면에서처럼 마지막 장면에서도 카페의 한 테이블에 자리 잡고 같은 상황을 연출한다. “난 언니가 가끔 낯설 때가 있어.” 미라의 오랜 친구이자 영화감독인 영은(김지영)이 갖는 의문의 실마리가 잡혀가는 순간. ‘프랑스 여자’가 아니라 ‘프랑스여자’로 '연결'한 단어의 제목처럼 삶과 죽음을 모두 품은 미라의 얼굴이 관객인 우리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의 정체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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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허남웅(영화평론가)

영화에 대해 글을 쓰고 말을 한다. 요즘에는 동생 허남준이 거기에 대해 그림도 그려준다. 영화를 영화에만 머물게 하지 않으려고 다양한 시선으로 접근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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