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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의 모두 함께 읽는 책] 임의적인 세계를 맞이하면서
<월간 채널예스> 2020년 5월호
코로나19 이후 임의적인 세계의 도래 앞에서 마스크만큼이나 필요한 것은 다른 배경을 지닌 삶에 대한 상상력이다. 이금이의 신작 소설 『알로하, 나의 엄마들』을 읽는 것도 좋겠다. (2020. 05.06)
4월 14일 오후 다섯 시, 인천국제공항에서는 태국 국적을 가진 135명의 승객이 비행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한국에 일하러 온 불법 체류자들로 단속에서 적발되어 추방 명령이 내려졌으나 코로나19 감염을 우려해 고국인 태국으로부터도 입국을 금지 당했던 사람들이다. 한국과 태국, 양쪽에서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는 바람에 그들은 꽤 오랫동안 외국인보호소에서 지내왔다. 태국에서는 이들을 은어로 ‘피 너이(작은 유령)’라고 부른다.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채 일거리를 찾아 떠도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다.
요즘처럼 지역 간의 이동 경로, 어떤 사람의 거주지와 출신 지역 등에 대해 예민하게 들여다보게 된 적은 드문 것 같다. 감염병의 시대를 살면서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번 확진자의 움직임에 대한 문자 알림을 받는다. 병원이나 공공기관에 출입하려면 “최근 oo지역에 다녀오신 적이 있나요?”라든가 “출입국 경력은 없죠?” 같은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90개국과 맺은 무비자협정이 철회됐다. 바이러스를 차단하려면 숙주의 물리적 이동을 파악하고 조치해야 하므로 이와 같은 변화는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이러스는 인종을 가려가면서 전파되는 것이 아니며 국적에 따라 안전하거나 위험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곳곳에서 동양인을 향한 위협이 폭증했다. 한 동네처럼 지내왔던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 마을에서도 서로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며 폭행 사건이 일어났다. 점점 더 미세한 기준으로 이방인을 나눈다. 배제의 방법은 감염병에 대한 공포를 타고 빠르게 학습된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다시 읽어야 할 그림책 1순위는 숀 탠의 작품들이다. 그는 경계를 오가는 삶에 대해 그려왔다. 『도착』 은 번역 출간 한 달 만에 4쇄를 찍었던 작품이다. 그리고 출간 7년 만에 숀 탠은 이 책의 창작 과정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이름 없는 나라에서 온 스케치』 를 내놨다. 작가는 이주 배경을 지닌 사람이 겪는 복잡한 기분과 타지의 인상, 갑자기 문화적 방향을 상실하고 이방인이 되는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서 글 없는 그림책이라는 양식을 택한다. 정확히 말하면 가공의 언어들로 언어에 취약한 주인공의 경험을 독자 앞에 재현한 것이다. 이민자들은 풍선처럼 새 땅에서 날아오르기를 꿈꾸며 출발하지만 도착한 그들의 현실은 지평선 아래 어둑어둑한 곳에 놓여 있다. 숀 탠이 『도착』 의 면지에 앞뒤로 그려 넣은 120명의 초상화는 뉴욕시 앨리스 아일랜드 뮤지엄의 기록보관소에 있는 이주자들의 사진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그는 『이름 없는 나라에서 온 스케치』 에서 실제 삶을 인용하는 것이 갖는 회화적 의미와 철학적 배경을 꼼꼼히 서술한다. 그는 “인류의 역사는 강요된 이주의 역사”이며 전쟁, 억압, 생태계의 붕괴 등이 안겨주는 두려움이 강요의 실체들이라고 말한다. 거대 생명체의 검은 꼬리는 그 두려움의 공포를 선명히 드러낸다. 2020년의 우리에게는 이것이 바이러스의 엄습으로 보인다.
같음과 다름, 소속감과 이질감은 숀 탠의 중요한 주제다. 『먼 곳에서 온 이야기들』 에 실린 단편 「에릭」은 외국인 교환학생 에릭을 맞이한 홈스테이 운영자 가족의 이야기다. 그들은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는 사람들이며 사려 깊게 에릭을 보살피려고 애쓴다. 하지만 어느 아침 에릭은 예의 바른 작별인사를 건네고 떠나버린다. 가족은 자신들의 친절과 배려가 부족했는지 염려한다. 그런데 에릭이 떠난 자리에는 그가 가꾼 놀라운 비밀의 정원이 남겨져 있었다. 여기서 정원은 에릭만의 독립적이고 독창적인 삶의 흔적이다. 숀 탠은 이 장면을 통해서 이주자들을 주체로서 인정하지 않는 정착민들의 태도를 비판한다. 어설픈 관용을 베풀며 짐짓 우아하게만 대하는 것으로서는 그들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코로나19는 이주와 역이주의 물결을 동시다발적으로 일으킨 독특한 경우다. 바이러스가 어느 방향으로 우리를 강제 이주시킬 것인지 예측이 어렵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주자가 거꾸로 위험한 이방인 취급을 받기도 한다. 『도착』 과 『이름 없는 나라에서 온 스케치』 에는 지금의 당혹감을 해석할 수 있는 열쇠가 담겨 있다. 숀 탠은 4세대에 걸쳐 3개국을 넘나드는 이주 배경의 가족사 속에 성장한 사람이다.
코로나19 이후 임의적인 세계의 도래 앞에서 마스크만큼이나 필요한 것은 다른 배경을 지닌 삶에 대한 상상력이다. 이금이의 신작 소설 『알로하, 나의 엄마들』 을 읽는 것도 좋겠다. 『도착』 의 여정을 우리 근대사와 여성사의 맥락 속에서 살펴보는 작품이다. 사진 신부가 되어 하와이로 떠난 버들이, 송화, 홍주는 타국살이의 설움 속에서 서로 연대하고 의지한다. 이들은 아마도 숀 탠 그림책 속 대양을 건너는 배에 탑승한, 그 검역소의 얼굴들일 것이다. 동양계 전학생 조던의 사립학교 적응기를 다룬 제리 크래프트의 그래픽 노블 『뉴 키드』 도 흥미롭다. 인종주의가 얼마나 견고한 뿌리를 가지고 있는지 느끼게 하는, 표면적으로는 유쾌하지만 심각한 걸작이다.
이름 없는 나라에서 온 스케치
숀 탠 글그림/엄혜숙 역 | 사계절
모든 이민자와 망명객, 난민들에게 바치는 그림책이라는 『도착』. 그림만으로 구성된 그림책이다. 『이름 없는 나라에서 온 스케치』는 『도착』이 어떤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는지 보여주는 숀 탠의 작가 노트이자 해설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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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세 번째 사람』, 『거짓말하는 어른』을 썼고 『왕자와 드레스메이커』, 『인어를 믿나요』, 『홀라홀라 추추추』 등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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