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에세이스트] 5월 우수상 – 노주와 아지랑이
부모님께 꼭 전하고 싶은 말
아빠는 울타리의 문을 열고 들어가 본인만큼 큰 몸집의 로즈의 목을 한참 쓰다듬었다. 그날은 햇볕이 따뜻한 1월의 어느 날이었는데, 아빠와 로즈 사이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2020.05.04)
언스플래쉬
채널예스가 매달 독자분들의 이야기를 공모하여 ‘에세이스트’가 될 기회를 드립니다. 대상 당선작은 『월간 채널예스』, 우수상 당선작은 웹진 <채널예스>에 게재됩니다. ‘나도, 에세이스트’ 공모전은 매월 다른 주제로 진행됩니다. 2020년 5월호 주제는 ‘부모님께 꼭 전하고 싶은 말’입니다.
- 노주 죽어다
- 응?
- 노주 죽어서
앞뒤 설명 없는 아빠의 문자 메시지를 받고 인상을 찌푸렸다. ‘뭐가 죽었다는 거야?’ 메시지 전송 버튼을 누르자마자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노주, 로즈 죽어부렀다.”
로즈는 아빠가 기르던 말리노이즈 벨기에 셰퍼드다. 내가 견종을 알고 있는 이유는 아빠가 로즈 이야기를 할 때마다 ‘말리노이즈 벨기에 셰퍼드라 여간 똑똑하당께’라는 말을 빼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리노이즈 벨기에 셰퍼드는 사나운 야생동물로부터 가축을 지켜주는 ‘목양견’ 일명 양치기 개로 개량이 된 종이다.
아빠는 경비견, 구조견으로 훈련되기도 한다는 대형견에는 썩 어울리지 않는 ‘로즈’라는 로맨틱한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는 로즈를 ‘노주’라고 불렀다. 로즈는 아빠가 평생 운영해온 자동차 부품 가게를 지켰다. 아빠는 부품가게 입구 옆에 아늑함, 따뜻함과는 거리가 먼 거칠고 투박한 개집을 지어주었다. 로즈는 그곳에서 아빠와 함께 5년을 보냈다.
아빠는 내가 고향인 목포에 내려갈 때마다 레퍼토리를 조금씩 바꾼 ‘로즈어천가’를 읊었다. “노주는 내가 말 안 해도 딱 알아. 나랑 친한 사람한테만 경계심을 풀제, 아니면 절대 안 풀어. 밤에 누가 지나만 가도 난리 난당께.” 대부분 ‘말리노이즈 벨기에 셰퍼드’ 종의 영민함과 용맹함을 증명하는 에피소드들이었다. 나는 로즈를 실제로 딱 한 번 만났다. 내가 아빠와 닮아서였는지 로즈는 나를 처음 보는데도 짖지 않았다. 대신 아빠가 “노주!”하고 부르자 로즈는 울타리를 잡고서 아빠를 기다렸다. 아빠는 울타리의 문을 열고 들어가 본인만큼 큰 몸집의 로즈의 목을 한참 쓰다듬었다. 그날은 햇볕이 따뜻한 1월의 어느 날이었는데, 아빠와 로즈 사이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런 아빠의 노주가 죽었다. 아빠는 휴대폰 너머로 로즈의 죽음을 전해왔다. 말을 마친 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심장사상충을 앓던 로즈는 수술을 받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한다. 나는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 가만히 듣기만 했다. 이틀 전부터 상태가 안 좋아서 불길했다는 이야기. 어젯밤 부품가게 문을 닫고 집에 오는데 발길이 안 떨어지더란 이야기. 밤새 꿈속에서 로즈가 몇 번이고 죽었다는 이야기. 그래서 오늘 출근하기가 너무 싫어, 오후에 겨우 가게에 가보니 로즈가 정말 죽어있더라는 이야기. 말을 전하는 아빠의 목소리가 쓸쓸했다.
나는 로즈는 아빠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으니 좋은 기억만 가지고 갈 거라는 힘없는 위로를 내뱉었다. 전화를 끊고 로즈를 처음 만난 날 찍어 두었던 로즈 사진을 찾아 아빠에게 보냈다. ‘고맙다’는 답장이 왔다.
아빠는 다음 날 아침 일찍 매화나무 사진을 보내왔다.
- 노주랑 같이 놀던 곳
주말이라 늦잠을 자다 일어난 참이었다. 아빠가 보낸 메시지를 보자 눈물이 울컥 쏟아졌다. 사진에는 꽃망울을 터트린 매화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해가 뜨기 전인지 주변이 밝지 않았다. 새벽부터 로즈와 함께 놀던 매화나무를 찾은 아빠의 마음을 떠올리자 아득해졌다.
독선적인 아빠. 자기 얘기만 늘어놓고, 상대의 의견을 자주 틀렸다고 지적하는 아빠에겐 친구가 없다. 가끔 온 가족이 모여도 아빠의 말이 길어지면 다들 휴대폰을 꺼내거나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나는 로즈가 아빠의 유일한 친구였다는 것을 안다. 로즈는 지난 5년간 아빠의 곁을 지킨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올해 7월 아이를 낳는다. 작은 아이의 보호자가 된다. 아이를 낳으면 지금보다 더 나은 어른이 될 줄 알았는데, 나의 부모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그저 듣는 것뿐이었다. 아빠는 그 후로도 내게 목련 나무, 벚꽃 나무 사진들을 보내왔다. 로즈와 놀던 곳이라며. 나는 그 사진을 받고 가만히 “노주~”하고 자랑스럽게 로즈를 부르는 아빠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나는 아빠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네지 못했다. 다만 곧 태어날 아이와 함께 고향에 내려간다면, 한 번쯤 그 아이와 함께 아빠가 보내온 사진 속 매화나무 밑을 찾아가 보고 싶다. 그 아이의 작은 손이 아빠에게 아지랑이 같은 위로가 될 수 있길 바라며.
최유라 언젠가 터질 이야기의 씨앗과 폭풍 태동으로 바쁜 8개월 태아를 함께 기르는 중
* 나도, 에세이스트 공모전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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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터질 이야기의 씨앗과 폭풍 태동으로 바쁜 8개월 태아를 함께 기르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