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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터 2-10] 71화 : 통합해야 할 책임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있다
『마터 2-10』 연재
이철은 영등포를 떠난 이튿날 문학산 산책로에서 처음으로 김근식과 만났다. 그들은 지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서로의 실천과 생각이 어떤 수준인지를 가늠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채널예스>에서 황석영 소설가의 신작 『마터 2-10』을 매주 월/수요일 연재합니다.
이이철은 이미 김근식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그가 당 재건 파의 초창기 오르그였다는 것과, 그는 또한 공장지대가 모여 있는 인천의 특별한 상황에 따라 국제당의 권모의 조직과도 연결을 갖고 있었다는 것도 알았다. 이철은 김근식의 견해와 입장이 자기와 같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겉으로는 조직이 와해되었으나 아직 현장 노동자들의 공장별 야체이카는 드러나지 않았으니 이를 수습하여 새롭게 전국적으로 연결 통합해야 할 책임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있다고 이철은 생각했다. 그는 보호관찰에서 놓여나려면 영등포와 경성 지역을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박선옥을 통하여 연락선을 잇고 인천에 가서 김근식을 만났다.
김은 강인하고 배짱도 있었지만 오랜 활동가답게 노련했다. 인천에는 각 공장의 독서회나 친목회 모임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치안당국과 회사 경영진에 거스를만한 직접 행동은 삼가고 있었다. 문건을 배포하고 읽고 소각하는 일은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동양방적과 인천철공소 니노미야철공소 아리마정미소 가또정미소 경인메리야스 인천부두 등의 현장에는 각각 많게는 칠팔 명에서 적게는 서너 명씩의 오르그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공장별 세포 위주로 활동하며 이전처럼 세포책들이 따로 합동모임을 한다든가 함부로 남의 독서회에 참여한다든가 하지 않고 일이 있으면 개별적으로 만났다.
이이철은 지난 사건에서 방우창 등과 함께 검거되어 부두를 맡았던 조 십장과 분산된 독서회를 연결하려던 장 아무개가 어느 선까지 자백하고 무엇을 감추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김근식은 드러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검거된 자들은 조사를 받는 동안 인천에서 김과 관련을 맺은 현장 노동자의 조직을 보호하려는 일관된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고작 자기 일터를 중심으로 문건을 돌려보던 이들을 몇몇 불었고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어쨌든 김근식과 현장 오르그는 활동을 중지하고 문건으로만 연결되고 있었다. 이철은 영등포를 떠난 이튿날 문학산 산책로에서 처음으로 김근식과 만났다. 그들은 지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서로의 실천과 생각이 어떤 수준인지를 가늠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오후 내내 주변을 거닐며 담화를 나누고 나서 김근식이 결정을 내렸다.
“이 동무는 여기서 취업을 해야겠습니다.”
“저는 선반 기계제작 일을 배웠습니다. 며칠 일해 보면 곧 능숙해질 겁니다.”
“인천 철공소에 자리를 마련해 봅시다. 다음 주 월요일에 공장에 가서 박용길 동무를 만나세요. 내가 얘기해 놓겠습니다.”
일터를 알선해주겠다는 것은 즉 그를 이 지역의 조직 안에 받아들이겠다는 의사 표시였다. 김근식이 헤어지기 전에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기거할 곳이라도 있습니까?”
“여기에도 밥집이나 일세방이 있겠지요?”
김은 이철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 해보였다.
“오히려 그런 데가 더 안전하지 않을 수 있어요. 끄나풀들이 수시로 숙박자들을 살피러 옵니다. 당분간 공장 내에서 기거할 수 있는지 한번 알아보십시다.”
김은 속으로 날짜를 헤아려보았다.
“오늘이 금요일이니 월요일까지 사흘이군요. 부두 앞 골목으로 가면 싸구려 여인숙이 많이 있습니다. 뱃사람들이 주로 모여드는 곳이니 외지인이 많지요. 자, 그럼 별 일이 없으면 곧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이이철은 그의 말대로 인천 부둣가 뒷길의 어느 여인숙에 방을 얻어 들었다. 골목 안에는 한 집 건너 술집과 식당이 있었고 밤늦도록 뱃사람들이 드나들었다. 그는 이곳에 큰아버지 이천만과 작은 아버지 이십만이 살고 있다는 것도 알았고 그들의 집이 어디에 있다는 것도 알았다. 큰아버지 이천만은 기관장으로 화물선을 타더니 이제는 중형급 선박의 선장이 되어 중국을 왕래하고 있었고 이십만은 미두사무소와 정미소 경리를 거쳐서 이제는 미곡도매상이 되어 있었다. 삼형제 중에 막내인 이십만이 성공을 한 셈이었다. 다만 전쟁이 시작되어 미곡은 당국의 배급체제에 들어가 암거래가 아니고는 민간이 나서서 큰 이익을 볼 수 없는 처지였다. 그는 배급공단의 이사로 들어갔고 여전히 각 정미소에서 나오는 양곡을 관리하는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그는 큰형과 협력하여 중국의 대련과 연태 등지로부터 콩 옥수수 조 등의 잡곡을 들여와 일본과 대륙의 일본군 군량미로 나가는 쌀의 보충 식량을 감당하고 있었다.
처음에 이이철은 작은 아버지의 집으로 찾아가지 않았다. 물론 이백만이 형제들과 왕래하며 살지는 않았지만 서로 간에 경조사가 있을 때에는 몇 년에 한두 번 만날 때가 있어서 사촌형제들도 이름과 얼굴은 알고 지냈던 터였다. 영등포 서에서는 호적 서류를 파악하고 있을 테지만 그들은 이미 몇 년 전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 친척간의 왕래가 거의 없음을 확인했다. 아마도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보호관찰 대상의 잠적을 중요하게 살피려 하지는 않을 거라고 이철은 생각했다. 이이철은 그러나 함부로 친척집을 방문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인천 철공소의 박용길이라는 사람을 찾아가서 취업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선반부 반장에게 그를 소개했고 몇 가지 전문적인 질문을 해보고 나서 그가 경험이 많은 공원임을 즉시 알아보았다. 인천 철공소는 백여 명의 직공이 있는 중급 정도의 공장이었는데 대부분이 조선인이었고, 사장과 기사와 사무직 몇 사람만이 일본인들이었다. 공장 뒷마당에 숙직실이 있었다. 전형적인 영단주택형 집이 여섯 채 있었다. 다섯 채의 집에는 일본인 기사와 공장장 사무원 등이 살았고 집 한 채가 직공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각방은 세 칸, 부엌과 변소 욕실도 있는 집이었다. 두 칸은 공장 경비가 썼고 한 칸이 숙직실이었다. 평범한 다다미방이었다. 박용길은 인천 토박이로 이 공장의 초창기부터 일해 왔다는 사십대 초반의 선반공이었다. 그는 말없이 웃음을 짓는 과묵한 사내였다. 그들은 활동에 관한 어떤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으며 김근식에 대한 얘기는 입 밖에 꺼내지도 않았다. 이이철은 김근식의 조직 운영 방식을 신뢰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날은 일이 끝나고 숙직실로 돌아가는 그에게 박용길이 문건 몇 장을 슬그머니 내주면서 말했다.
“뒷지로 쓰시오.”
즉 문건을 읽고 나서 변소에 버리라는 소리였다. 그것은 최근의 인천의 동향과 정세에 관한 짤막한 통신 몇 가지와 이철 자신이 검거되어 미처 접하지 못했던 ‘적기’의 몇 부분이 필사된 것이었다. 비록 삼년 전의 글이었지만 그에게는 바로 코앞에 들이댄 당면 임무나 마찬가지였다. 류재익 동지가 체포되기 전까지 경기도 일원에 잠복하며 문건의 배포를 통하여 조직을 회복하려던 안타까운 흔적이기도 하였다. 그것은 창간선언 다음에 나오는 ‘적기’의 임무 대목이었다.
현재 내외의 제 정세와 중대한 혁명적 임무를 앞에 둔 우리 조선 공산주의 운동은 이론적으로 실천적으로 조직적으로 기술적으로도 완전히 분산하여 있다. 그러한 까닭에 올바른 공산주의자 간에 그들의 견해를 협소하게 하고 그들의 활동을 제한하고 그들의 정치적 활동의 숙달과 훈련을 방해하는 지방적 활동에 편중하는 사실에 의해 운동은 많은 타격을 받았다. 그것은 과거 이스끄라 시대의 러시아와 다름이 없는 까닭에 우리들은 이 결점과 오류를 제거하기 위하여 또는 지방적으로 분산된 운동을 전국적으로 집중 통일하기 위해서는 생생한 각 공장신문을 기초로 전국적 집합적 선전자이고 선동자이고 조직자이고 지도자인 유일의 정치적 신문을 발간하는 것이 급선무다. 전국적 정치기관 즉 당재건이 완성되지 못한 우리 조선에는 당의 정치적 신문을 발간하는 것이 급선무인 것이다. 전국적 정치기관 즉 당재건이 완성되지 않은 우리 조선에는 당의 정치적 기관지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 현재 우리들의 힘으로는 전조선 민중의 앞에 정치적 고발을 하는 하나의 연단을 창설할 만큼의 지위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우리들의 일정한 임무수행 과정에서 필요한 또는 우리들의 힘이 가능한 지방 즉 경성적 신문을 창간하는 것까지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이에 우리들은 각 경영 내의 오르그 동지 제군의 진정한 요구에 응하여 또는 우리들의 임무수행상의 필요에 의해 또는 일반 투사들의 열망에 응하여 전국적인 것을 거부하지 않는 전경성적 선전자이고 조직자이고 지도자로까지 앙양할 수 있는 과도적 정치적 기관지 ‘적기’를 창간하였다.
이철이 공장 내 숙직실에서 기거하며 두 달쯤 지나서 그는 박용길 외에 김수남 허창수 등의 오르그를 파악하게 되었다. 그들의 권유로 박용길의 집 이웃에 방을 얻었다. 인천에 흔히 있는 일본식 이층 목조주택이었다. 그는 이층 계단 옆방을 얻었는데 방의 창문으로 골목의 양쪽을 살필 수 있어서 유리했고 맞은편은 언덕의 낮은 곳이라 앞집의 지붕이 내려다 보였다. 지붕 너머로 멀리 부두와 바다가 보였다. 이철은 거처에 만족했다. 다시 삼 개월쯤 지나서 박용길이 퇴근길에 그에게 가만히 말했다.
“오늘 별일 없으면 막걸리나 한 잔 하십시다.”
공장에 취직한 뒤로 박이 그에게 먼저 술을 먹자고 청한 적이 없어서 이철은 좀 놀랐고 당황했다.
“박 형이 술을 드시는지 이제 처음 알았습니다.”
“아, 물론 나는 술을 먹지 않소.”
하고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 이철에게 덧붙였다.
“나는 술집까지 안내만 하리다.”
공장에서 도심지로 들어가는 길과 예전에 처음 와서 며칠 묵었던 여인숙과 술집이 많은 뱃사람 골목이 갈리는 지점에서 박용길은 골목길을 선택했다. 그는 어쩐지 낯익은 곳이라서 마음이 놓였다. 바닥이 언제나 젖어있고 소금냄새며 바다비린내에 절은 제물포 주점으로 들어섰다. 안쪽은 떠들썩한 뱃사람들이 생선 비늘 묻은 우비를 걸친 채로 모여 앉아서 왁자지껄했고 격자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바깥쪽으로 트인 진열창 바로 옆에 생선 굽는 연기가 자욱한 자리에 김근식이 앉았다가 손을 조금 올려 보였다. 박용길은 인사도 없이 갔는지 이철이 돌아보니 그가 보이지 않는다. 이철은 자연스럽게 김근식의 맞은편에 가서 앉았다.
철도원 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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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지」 「삼포 가는 길」 『무기의 그늘』 『장길산』… 소설의 제목만 들어도 역사가 그려지는 한국의 대표 작가. 1943년 만주에서 태어나 4.19와 5.18, 방북과 망명, 수감을 거쳐 한국의 현대사를 온 몸으로 받아낸 시대의 증인이다. 2000년대 이후 장편소설 『오래된 정원』 『손님』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 『강남몽』 『낯익은 세상』 『여울물 소리』 『해질 무렵』 등과 자전 『수인』을 잇달아 펴내고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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