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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터 2-10] 32화 : 인터내셔날로 인류가 떨치리
『마터 2-10』 연재
저어기 하늘에 별들 좀 보아. 수백 수천만의 사람들이 다들 살다가 떠났지만 너 하는 짓을 지켜 보구 있느니. (2019. 07. 29)
그 다음은 추운 겨울 날 장판 아랫목에 깔아둔 요에 발을 묻고 서로의 무릎을 헤아리면서 부르는 노래다. 노래가 끝날 때 잡힌 무릎의 임자가 벌을 받는다. 한 알 때 두알 때 삼 세 니 알 오드득 보드득 산진이 날진이 총잽이 따콩. 진오는 중얼거린다.
“옛날에는 가사 뜻도 모르고 할머니 따라 불렀는데 엄마가 야단치곤 했어요.”
“무슨 노래 말이냐?”
“국제가 있잖아요.”
“한 번 해 보렴.”
진오는 흥얼거리며 노래를 시작한다. 역시 수많은 군중이 여럿이 불러야 바다 물결처럼 휘몰아쳐오는 느낌이 들 텐데 속삭이듯 부르니 너무 슬프고 가냘프다. 마치 진기의 눈을 감고 걸어도 같이. 그렇지만 아래서 솟는 뭔가 뜨거운 느낌이 있었다.
일어나라 저주로 인 맞은 주리고 종 된 자 세계
우리의 피가 끓어 넘쳐 결사전을 하게 하네
억제의 세상 뿌리 빼고 새 세계를 세우자
짓밟혀 천대받은 자 모든 것의 주인이 되리
이는 우리의 마지막 판가림 싸움이니
인터내셔날로 인류가 떨치리
이는 우리의 마지막 판가림 싸움이니
인터내셔날로 인류가 떨치리
“근데 할머니 저는 일정 때 노래보다 요즈음 우리가 바꿔 부른 국제가가 더 좋아요.”
할머니가 나직하게 웃으며 말한다.
“세상일은 자꾸 되풀이된다는데. 그건 머 세상이나 사람이 달라지구 풍속두 달라졌는데두 그렇다는구나. 아마 사람 사는 일이 예나 지금이나 겉만 달라졌지 내용은 같다는 얘기겠지.”
진오는 더 이상 노래는 부르지 않았지만 집회에서 동료들과 부르던 노래의 가사를 목구멍 속에서 되새기고 있었다.
“너 굴뚝 위에 혼자 있는 거 같지?”
“할머니하구 이렇게 같이 있잖아요.”
그녀는 손자의 손목을 잡아 이끌었다.
“저어기 하늘에 별들 좀 보아. 수백 수천만의 사람들이 다들 살다가 떠났지만 너 하는 짓을 지켜 보구 있느니.”
진오는 다시 어린 것이 되어 할머니의 손을 잡고 영등포 시장거리로 나아갔다. 언제나 꿈속처럼 보이던 버드낭구집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의 기억은 나중에 철도관사에서 이사 나간 샛말 집에서 태어난 뒤부터였지만 아버지와 할머니에게서 하도 많이 들어서 그는 그림을 그릴 수도 있을 정도였다.
이일철은 경부선의 화물차 기관조수로 발령 받았고 용산과 영등포에서 출발하여 대전까지만 왕복하거나 때로는 대전에서 교대 숙직했다가 부산까지 가서 숙직하고 돌아올 때도 있었다. 그러니 일주일의 절반쯤은 집을 비웠다. 그가 처음 용산역 운전계 대기실에 갔더니 일본인 치고는 키가 큰 편인 칼칼하게 마른 삼십대 중반의 사내가 난롯가에 앉아서 오차를 홀짝이며 마시고 있었다. 그는 격자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는 일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오이 신입인가?”
“예, 화물계에 발령 받았습니다.”
“견습은 어디서 받았나?”
“경인선입니다.”
“자네 운이 좋구나.”
하면서 그는 이름을 물었고 그가 이일철이라고 이름을 대자 난처한 표정이 되었다.
“이, 이, 이르처르 부르기 어려운 이름이다. 그냥 이군이라면 되겠나?”
“예, 다들 그렇게 부릅니다.”
“좋아 나는 야마구치다.”
그가 기관수 야마구치였다. 출근 시간은 기차 출발시간 두 시간 전이나 적어도 두 시간 반 이전에 도착해야 하였다. 먼저 중앙사무실에 들러 자신의 운행 구간을 지령 받고 화물 수송에 관한 특이한 점이나 주의 사항을 청취한다. 그리고 운전계 대기실로 가서 함께 일할 조원들과 합류한다. 대기실은 출발 전에는 각 노선의 기관수와 조수 등이 모여 있어 조금 혼잡스럽지만 이내 기차를 향하여 몰려 나가고 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건물이 텅 비어 버렸다. 야마구치가 그에게 회중시계를 내주었다. 기관조수와 기관사가 지급 받는 회중시계였다. 모든 기관수의 회중시계는 시와 분 초침까지 정확하게 맞추어져 있었다. 기관수들 중에 초임자들은 대개 남대문 용산역 영등포역 같은 큰 역에서 기관차들을 노선에 따라 분리하고 배치하는 일을 하게 되는데 그들에게는 사무실에서 받은 선로 번호와 기관차 번호가 적힌 작은 목패가 있었다. 야마구치가 일어섰다.
“요시 그럼 가 볼까?”
그들은 대기실을 나와 객차가 서는 홈에서 벗어나 선로를 가로지르고 위쪽 창고가 늘어서 있고 화물열차가 줄지어 정차해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야마구치는 정확하게 위치를 알고 있었다. 인부들이 창고에서 수하물을 꺼내어 수레에 실어다 화물열차 폼 앞에 쌓아 놓고 연이어 화차에 실었다. 화물열차 구역의 폼에 누군가 섰다가 야마구치에게 인사를 하며 달려왔다. 그는 작업모에 작업복을 걸치고 다리에 각반을 찬 차림이었는데 일본말로 일철에게도 잘 부탁합니다 하고 인사를 했다. 야마구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철에게 말했다.
“이군 이 친구가 자네 오른팔 노릇을 할 탄부다. 성이 뭐라구 그랬지?”
야마구치가 묻자 그는 허리를 꼿꼿히 펴고 크게 대답했다.
“김입니다.”
“음 김군이라구 했지.”
일철은 첫눈에 그도 조선인임을 알아보았었다. 원래 기관수, 기관조수, 화부, 탄부로 네 사람이 기관차에 배치되기 마련이었으나 번거롭다고 하여 기관수와 조수 탄부로 세 사람이 기관실의 정원이 되었다. 화부와 탄부는 조수와 더불어 두 가지의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화부겸 탄부인 김군과 조수겸 화부인 이일철은 종잇장 하나 정도의 서열이었지만 상하 관계는 큰 차이가 있었다. 김군은 인부 용인의 직인 셈이고 이일철은 장차 기관수가 될 조수였기 때문이었다. 일터에서는 일본인 한 사람이 있어도 조선어로 조선사람끼리 담화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야마구치가 홈을 벗어나 평지에서 더욱 높아 보이는 기관차의 철재계단을 오르기 전에 일철에게 물었다.
“자네 이게 무슨 기관차인지 알고 있겠지.”
“예 미카도 형 아닙니까?”
“음 대단한 괴물이지. 이거 미국에서 사다 쓰던 것을 우리 가와사키 조선소의 공장에서 개량하여 만들어냈지. 어떤가, 국산이란 말일세.”
그는 조선에서 운행되는 기차에 대하여 학교에서 배워 자세히 알고 있었다. 화물열차용 기관차 중에 미카도는 최대형으로 중량 50톤에 기통 견인력이 4만 파운드나 되고 천분의 십 구배선에서 한 시간 평균 20마일의 속도로 최대 화물열차 24량을 견인할 수 있었다. 파시 형이라고 하는 패시픽 기관차는 미카와 더불어 형제와 같은 기관차로 여객 열차용이었다. 파시는 경부선의 지선이었던 호남 전라선의 여객열차로 운행 되었고 경부선과 경의선 그리고 만주에 이르는 국제특급열차는 탱크형 대형기관차들이 도맡게 되었다. 김군은 기관차 아래 부동자세로 서있었고 야마구치가 일철에게 말했다.
“먼저 아래를 점검하고 운전실을 보도록 한다. 다음부터 바깥은 이군이 맡아야겠지.”
“알겠습니다.”
그는 작은 망치를 손에 쥔 야마구치를 따라 기관차의 육중하고 커다란 바퀴 아래로 다가섰다. 피스톤 실린더와 압축공기 탱크를 가끔씩 두드려 보았고 연결봉과 슬라이드바가 제대로 바퀴에 맞물려 조여 있는지 살피고 또한 망치로 두드려 보기도 했다. 그는 압축기도 정비가 되어 있는지를 보았다. 이제는 기관실로 올라갔고 세 사람은 차례로 철계단으로 올라갔다. 기관수 석은 안쪽 왼편에 있었고 조수석은 오른쪽에 있었다. 정면에 제동기가 있고 역전관과 가감관이 있어서 밀면 증기구가 닫혀서 감속되고 당기면 열리면서 가속이 되었다. 기관실 가운데 정면에 보일러 탱크가 있고 그 아래 화구가 있었다. 발브를 발로 밟으면 화구가 양쪽으로 열리고 발을 떼면 닫혔다. 제동기도 기관차에만 작동하는 단독제동기와 열차에까지 전달되는 자동제동기가 손잡이에 붙어 있었다.
운전석 앞은 기관차의 몸통 옆으로 선로의 왼쪽 전방이 보였다. 조수석에도 열차의 왼쪽 전방을 향하여 창이 뚫려 있었다. 뒤에 저탄고가 있고 그 아래는 물탱크가 있어서 주수기를 통하여 보일러로 연결되었다. 탄부는 저탄고 앞에서 갈탄을 삽으로 퍼서 앞으로 던지고 적당히 쌓이면 조수와 탄부 두 사람이 화부가 되어 번갈아 화구 속으로 석탄을 퍼 넣었다. 속력을 낼 때에나 비탈을 올라갈 때 분주하게 석탄을 넣어야 하지만 화력을 눈대중으로 가늠하면서 적당히 조절을 하는 게 고참 화부의 역할이었다. 조수는 화부의 역할도 해야 하지만 운행 경험이 생겨나 숙달되면 숙면을 취하는 기관수 대신 기차를 몰았다. 그가 이리 저리 운전기기를 점검하는 동안 일철은 기관차의 위로 올라가 보일러의 안전밸브와 증기 리시버의 조절밸브를 살피고 모래탱크에 제대로 모래를 채웠는지 두드려 보았다. 시간이 되자 일철은 전방의 선로 쪽을 내다보았고 운행을 알리는 폐색기 표지판이 삐죽히 올라왔다. 장애물이 아무 것도 없다는 표시였다. 그가 손을 들자 야마구치는 증기 발브를 열어 삐이 하는 소리에 뒤이어 우렁찬 기적소리를 토해냈다. 출발한다는 신호였다.
기차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늘 하던대로 일철은 조수석의 출입구 철계단을 딛고 서서 한 손은 철봉을 잡고 다른 한쪽 팔을 들어 내밀었다. 폼 막다른 곳에 선로계의 역원이 통패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원형의 가죽테였는데 아래쪽에 조그만 지갑이 달려 있고 그 안에는 일종의 통행증이 들어 있었다. 열차가 운행하는 그 시간의 전방 선로 독점을 허용했다는 신표인 셈이었다. 운행은 매 역마다 전보로 통보가 되어 선로의 변환에서부터 통행로의 안전을 위한 장애물의 이동 등이 철저하게 시간별로 집행되었다는 표시였다. 통표가 없는 기차는 화물열차든 여객열차든 함부로 운행할 수 없었다.
철도원 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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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지」 「삼포 가는 길」 『무기의 그늘』 『장길산』… 소설의 제목만 들어도 역사가 그려지는 한국의 대표 작가. 1943년 만주에서 태어나 4.19와 5.18, 방북과 망명, 수감을 거쳐 한국의 현대사를 온 몸으로 받아낸 시대의 증인이다. 2000년대 이후 장편소설 『오래된 정원』 『손님』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 『강남몽』 『낯익은 세상』 『여울물 소리』 『해질 무렵』 등과 자전 『수인』을 잇달아 펴내고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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