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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터 2-10] 8화 : 백성들은 열차 운행과 철도 공사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마터 2-10』 연재
이백만이 증조할머니 주안댁을 만나게 된 것도 참으로 기묘한 일이었다. 그가 열여덟 살 때라면 아직 공작창의 예비고원으로 혼자서 간신히 세끼니 밥이나 벌어먹을 만할 때였다. (2019. 05. 06)
철도가 놓이면서 강제로 땅을 빼앗기고, 부역에 끌려 나와 고생하고, 가족이나 친척이 살해당한 조선 백성들은 전국 곳곳에서 열차 운행과 철도 공사를 끈질기게 방해하기 시작했다. 이맘때에 국권을 빼앗기고 나라가 망하여 일어나게 된 의병들도 철도를 주요 공격의 목표로 삼곤 했다.
“영등포 정거장 부근에선 보부상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선로에다 불에 달군 기와를 쌓아 놔선 앞뒤 열차가 충돌하게 했지. 그건 우리두 몰려가서 봤던 일이네. 붙잡히면 모두 그 자리에서 즉결 포살했다구. 자갈을 쌓아 철로를 덮어버리기두 하구 화약두 묻었지. 야밤에 공사장 석재를 옮겨다 선로를 막아서 기관차와 객차가 분리되고 탈선 전복하여 타고 가던 일본군들이 수십 명 죽고 다친 일도 우리 군내에서 일어났지.”
철로변의 전신주를 쓰러뜨리고 전선을 절단하는 일은 일상다반사가 되었고 일본은 전선과 철도 보호에 관한 군율을 발포했다. 철도에 가해한 자는 사형, 사정을 알고도 신고하지 않은 자도 사형, 가해자를 잡은 자는 이십 원의 포상, 가해자를 밀고하여 체포케 한 자는 십 원의 포상, 철도 연변 전선 및 철도의 보호는 촌민이 담당하되, 촌장을 책임자로 하여 전담자를 두어 교대로 보호할 것, 마을에서 전선과 철도가 파손되었는데 가해자를 체포하지 못했을 때에는 당일 담당자를 곤장을 치고 구류할 것, 한 마을 구역에서 이차 피해가 있을 경우 한국정부에 통고하여 엄벌함, 등이 그 내용이었다. 그러나 의병들은 전국 각처에서 수백 명의 부대를 이루어 역을 습격하거나 철도공사장을 공격했다.
민씨는 그가 어깨에 칼을 맞던 날의 얘기를 꺼냈다.
“경부철도의 막바지 공사가 진행되던 때였으니 아마 구월 중순께쯤 되었을라나. 공사 초반부터 시흥 군내에서 역부로 동원된 게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나기만 했지. 헌데 역부로 동원되어 나가는 것도 우리고 역부의 임금이나 비용까지 마을에서 공동 부담하라는 게여. 한 번에 수백 냥에서 삼천 냥까지 걷으라니 이게 세금도 아니고 웬 횡액이여? 그동안 군수가 농민들을 모집할 때부터 수만 냥을 해 처먹었다느니 군 서기들은 역부 일인당 식비를 착복 했다느니 소문이 낭자했지. 군내에서 만여 명이 들고 일어났는데 똑똑한 어느 동네 집강이 사발통문을 날려서 모두 나서게 되었네. 오후에 군아에 몰려갔는데 군수가 도움을 요청했는지 일본인들이 장검과 철봉을 지니고 기다리고 있었다구. 주민들이 군수에게 언성을 높이며 항의를 하자 일본인들이 갑자기 일본도와 쇠몽둥이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네. 앞줄에 섰던 이들이 맞고 베이며 부상을 크게 입었지. 누구는 귀가 떨어지고 아무개는 머리가 박살났으며 다른 아무개는 어깨를 장검에 찍히고 쓰러졌는데 이튿날 출혈 과다로 죽었지. 그 자리에서 한 명이 죽고 아홉 명이 부상을 입었거든. 일본인들에게 갑자기 공격을 당하고 우리는 일단 관아 밖으로 밀려났다가 다시 돌을 던지며 돌진해 들어갔네.”
“애고 그때 생각을 하면 진저리나고 치가 떨려서. 글쎄 휩쓸리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했건만 점심나절에 탁주가 과하더라니.”
안양댁이 혀를 차며 원망했고 민씨는 곧 흥분했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암튼지 이 사람 없었으면 나는 진작 죽은 목숨이여.”
민씨는 몰려 들어가는 군중의 후미에 속해 있었다. 앞장섰던 이들은 관아로 쏟아져 들어가 군수와 그 아들을 타살하고 관사와 서리들의 가재도구를 부수고 불을 질렀다. 격노한 군중은 도망가는 일본인들을 쫓아가 그중 두 명을 때려죽였다. 미처 달아나지 못하고 숨었던 일본인들이 다른 방향으로 달아나자 기세등등해진 사람들은 그 뒤를 쫓아갔고 이때에 민씨도 몽둥이를 들고 급히 추격했다. 돌담이 가지런한 뒷길에 이르렀을 때에 민씨는 일본인들이 돌아서자 주춤했고 주위를 돌아보니 쫓는 이가 네댓 명밖에 없었다. 일본인들 중에 일본도를 가진 자들 둘이 잰걸음으로 달려들었고 민씨는 그제야 정신이 들어 달아나려는데 뭔가 번쩍, 하는 빛이 지나가는 듯했다.
일본인들은 다른 사람 하나를 더 베고 나서 군중이 주춤주춤하며 달려들지 못하자 다시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민씨는 피를 흘리며 땅바닥에 엎어져 있었고 남편의 행적을 찾아 조바심치며 찾아 다니던 안양댁이 마침 그 골목으로 달려와 발견했다. 아내는 치마를 찢어 피가 용솟음치는 남편의 어깨를 여러 겹으로 감싸고 묶은 뒤에 사람들에게 호소하여 장터 의원에게로 데려갔다. 비스듬히 베어진 상처 부위를 꿰매고 고약을 붙인 뒤에 붓기가 가라앉고 아물 때까지 달포를 누워 지냈다. 그때에 쇄골이 부러졌는지 이후로 왼팔이 건들건들 매달린 채 힘을 쓸 수가 없었다. 그는 수년을 후유증으로 앓았다. 민씨는 이제 아내 덕분에 다행히 밥장수에 이골이 난 셈이었다.
“그러고 나는 뒷전에 있다가 부상만 당하고 모면을 했지만, 주동했던 이들은 모두 체포되었지. 일본군 일개 소대가 급파되어선 모조리 잡아다가 헌병대에 수감했네. 거기서 먼저 갖은 고초를 겪었겠지. 급기야는 모두 재판에 회부되고 징역을 살았을 뿐만 아니라 배상금까지 물어서 집안이 아예 거덜이 나버렸다지. 그러니 어찌 철도가 조선 사람의 피와 눈물로 이루어지지 않았겠는가.”
증조할아버지 이백만은 이진오가 국민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돌아가셨다. 그때 일흔여덟 살이었으니 당시로서는 장수했던 셈이었다. 이진오는 아버지 이지산이 할아버지 이일철을 따라 이북에 갔다가 천신만고 끝에 다리 한쪽을 잃고 돌아온 뒤에 증조할아버지 이백만과 짝이 되어 공방을 지키며 살아왔던 세월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이 작업 중에 쉴 새 없이 두런거리며 나누던 옛날이야기 속에서 할아버지 이일철의 행적을 알게 되었다. 그가 큰할아버지라고 불렀던 이백만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버지 이지산도 비록 불구의 몸이었지만 혼자 공방을 지켜나갔다. 금속공예업 자체가 차츰 쇠퇴하면서 아버지는 엄마와 함께 시장 옷가게를 보러 나갔고 할머니 신금이는 집에 있는 날이 많아졌다. 아버지 이지산은 칠십 세를 넘기고 세상을 떠났는데 할머니 신금이는 아들을 먼저 보내고도 십년이나 더 살고 아흔 살이 되어서야 돌아가셨다. 그러니 진오가 그녀와 작별한 것은 불과 오 년 전의 일이었다. 이런 모든 일이 그들 가족이 살아가던 같은 시대에 벌어진 일이었다니 참으로 별의별 일이 다 많았던 나라였구나 싶었다.
이백만이 증조할머니 주안댁을 만나게 된 것도 참으로 기묘한 일이었다. 그가 열여덟 살 때라면 아직 공작창의 예비고원으로 혼자서 간신히 세끼니 밥이나 벌어먹을 만할 때였다. 그맘때에 지산리에 살던 식구들은 첫째 형 천만이가 장가들고 연안 화물선을 타게 되어 솔가하여 인천으로 나와 살았다.
하루는 형에게서 ‘부친 위독 급래’라는 전보가 왔다. 이백만은 전보를 일본인 반장에게 보이고 이틀 말미를 얻어 인천으로 갔다.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하던 형 천만이도 스물두 살에 지나지 않아서 화물선을 탄다고 해봤자 기관조수를 하던 형편이었다. 막내 십만이는 그래도 둘째 형처럼 똘똘한 편이라서 미두 사무소의 사환 노릇을 하여 집안 살림을 도왔다. 나중에 싸전으로 돈을 모았고 형제 중에서는 제일 먼저 자리를 잡게 된다.
송림산 언덕배기에 있는 집으로 찾아가니 아버지는 진작 숨을 거두었고 타관살이 형편이라 문상객도 거의 없었다. 식구들만 둘러앉았고 형의 동료인 뱃사람 두어 명이 둘러앉아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막음이가 부엌에서 내다보며 작은 오빠를 반겼다. 아버지는 아직 중년의 나이라 돌연한 죽음이라고 할 밖에 없었다. 비록 상처는 일찍 했지만 자기 밥은 제대로 챙겨먹을 줄 알던 위인이었다. 늘 나가면 벌이가 없을 적에도 빈손으로 들어오는 법이 없었다.
아버지가 얼마 전부터 어시장에 나다녔다고 했다. 조깃배 타던 시절에 잘 알던 선장이 공판장에서 경매 반장을 맡았다는데 그에게 일감을 주었다. 경매가 끝나고 선택을 받지 못한 어물이 늘 남기 마련이라 그런 어물을 모두 그가 싼값으로 넘겨 받을 수 있었다. 하루에 몇 상자의 잡어를 넘겨받아 자전거에 싣고 변두리로 나가 주점이나 식당에 약간의 이문을 남기고 넘겨주는 것이다. 푼돈이었지만 끊이지 않고 날마다 생기니 한 달이면 직장에 다니는 사람의 월급만큼은 되더란 얘기였다. 아버지는 재미가 들려서 매일 오후가 되면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섰다. 그가 죽기 이틀 전 어시장에 갔을 때 경매는 막바지에 이르렀고 먼저 인기 있는 생선들이 팔려나가고 남은 것이 물텀벙이 세 마리와 우럭 놀래미 병어 등의 잔챙이 잡어 몇 상자였다. 보통 날과 다름없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런 정도면 단골 주점에서도 허드레 횟감이나 매운탕감으로 반길 만했고 가격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특히 물텀벙이 세 마리 가운데 한 마리가 유독 덩치가 크고 싱싱한 놈이었다.
자전거 뒤에 상자를 싣고 달리는데 뒷전에서 철푸덕, 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처음에는 가끔씩 들리더니 꾸룩 꾸루룩하는 소리까지 들리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어쩐지 그 소리의 임자가 물텀벙이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지방마다 항구마다 부르는 이름이 다르기는 하지만 물메기나 삼식이나 그게 그놈이라고 알고 있었다. 빠가사리가 빠각빠각 내는 소리는 들었어도 물텀벙이가 무슨 왕두꺼비처럼 운다는 건 금시초문의 일이 아닌가. 늘 물건을 넘기는 주점에 도착하여 자전거를 세우고 상자를 내리는데 맨 아래 상자에서 또 철푸덕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위의 상자들을 치우고 아래 상자의 뚜껑을 열어 보았다. 물텀벙이 삼형제가 머리를 나란히 하고 엎드려 있었고 그중 큰 놈이 가끔씩 꼬리를 좌우로 흔드니 상자의 판자에 부딪혀서 그런 소리가 들렸던 모양이다. 허어, 이 녀석이 목숨이 끈질긴 놈이로구나! 백만이 아버지는 혼자 중얼거리다가 문득 이 녀석이 몸보신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맨날 피곤하단 소리를 입에 달고 사는 천만이나 이제 맏손자를 낳은 지 얼마 안 된 며느리나 십만이 막음이 등의 식구들과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세끼니 밥은커녕 막소주로 나날을 보내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했다. 그래 오늘은 며느리 젖이라두 잘 나오게 이놈을 푹 끓여서 온 식구가 먹어야겠다. 그러고는 상자에 그놈만 남겨놓고 맥없이 늘어진 두 마리는 다른 상자의 잡어들 사이에 던져 넣었다.
물건을 넘겨주고는 그날따라 자리 잡고 앉아 우럭 지리탕 국물에 소주 사 홉을 막사발 대접에 가득 따라 천천히 마셨다. 그가 주점에서 반시간은 족히 보내고 다시 자전거를 타고 귀가하는데 철푸덕 소리와 꾸룩꾸룩 소리는 여전히 들려왔다. 허어 그 놈 참 대단하구나. 아버지는 고개 아래 점방에 자전거를 맡겨 놓고 물텀벙이 한 마리 달랑 들어앉은 상자를 들고 비탈길을 올라왔다. 꾸룩 꾸루룩하는 소리가 크게 들려와서 그는 상자를 땅에 내려놓고 뚜껑을 들춰보았다. 커다란 입에 퉁방울 같은 큰 눈이 머리 양쪽 끝에 달린 놈은 크고 긴 입을 죽 찢더니 아버지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는 섬칫 놀랐지만 숨을 가다듬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미 날이 저물어서 사방이 어두웠을 텐데 아버지가 취중에 잘못 보았을 거라고 식구들마다 말했지만, 이백만이 나중에 그런 얘기를 들었을 때 아마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세상에는 온갖 이상한 일들이 많이 벌어지기 마련이니까.
철도원 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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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지」 「삼포 가는 길」 『무기의 그늘』 『장길산』… 소설의 제목만 들어도 역사가 그려지는 한국의 대표 작가. 1943년 만주에서 태어나 4.19와 5.18, 방북과 망명, 수감을 거쳐 한국의 현대사를 온 몸으로 받아낸 시대의 증인이다. 2000년대 이후 장편소설 『오래된 정원』 『손님』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 『강남몽』 『낯익은 세상』 『여울물 소리』 『해질 무렵』 등과 자전 『수인』을 잇달아 펴내고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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