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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결박당한 편집자의 운명에 대하여

<월간 채널예스> 2019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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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로지 책에 속한, 그 텍스트에 우리의 운명을 의탁하는 자들입니다. (2019. 02.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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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의 자리마다 혁명을 추동해낸 굳건한 텍스트가 있었습니다. 혁명의 사람들은 책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수현,

 

명멸하는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길을 잃을 때가 있고, 길을 잃어야만 닿을 수 있는 삶의 진실이 있습니다. 간혹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은,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트위터의 타임라인은 하나의 가상현실virtual reality처럼 보입니다(또는 여러 가상현실을 동시에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수많은 페르소나의 욕망들이 발현하여 불의에 분노하고 정의를 부르짖으며 진실을 요구하지만, 정작 세상은 지독한 무관심과 이기심으로 슬픔의 사람들을 포위하고 겁박합니다. 대체로 세상의 슬픔은 굳건하지만 우리의 일상은 평온합니다.

 

확신에 찬 수많은 말들이 우리를 둘러쌀 때면 저는 종종 길을 잃던 청춘의 시간을 그리워합니다. 서른 즈음, 길 잃은 저의 청춘이 다다른 곳이 책 만드는 일이었지요. 대학원을 휴학하고 출판사에 입사했습니다. ‘학문’의 세계에서 길을 잃었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지요. 무작정 한국을 떠나고자 아르바이트를 하고자 했을 뿐인데 회사에서는 정규직을 제안했습니다. 제 첫 보직은 회사에서 운영하던 직영서점 관리와 문서운동이라는 생소한 업무였습니다. 무수한 책들 사이에서 좋은 책을 선별하여 추천하고 공급하는 것이 중요한 업무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런 일을 하며 월급을 받아도 되는가 싶었습니다. 운이 제법 좋았습니다. 그곳에서 오롯이 삼십 대를 보내며 저는 출판 기획의 중심에서 일하는 편집자가 되었으며, 잠시 마케팅과 영업을 총괄하는 자리에도 올랐으니까요.

 

저의 삼십 대를 사로잡은 건 ‘좋은 책’이었습니다. 좋은 책 속에 길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좋지 못한 책, 더 나아가 나쁜 책들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책을 소개하고 만들던 저의 삼십 대는 소위 ‘나쁜 책’들과 싸우는, 고요했으나 뜨겁던 시간들이었습니다. 희망과 슬픔의 책들 사이에서 환호했으나 한편으론 텍스트의 본위를 잃고 독선과 오만에 휩싸이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이른바 ‘좋은 책’들이 저를 배신하기 시작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저를 배신한 건 ‘좋은 책’을 쓰고 만들던 이들의 위선이었습니다. 그것은 더욱 교묘하고 공고했습니다. 분노로 시작했으나 절망으로 마무리되었던 건, 결국 저의 현실도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저의 위선은 좋은 책이란 허명 속에 은밀하게 자리 잡고 있었지요. 꼬박 십 년을 일했던 출판사를 제 발로 나온 건 그즈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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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만들다 지치면 헌책방을 찾곤 합니다. 명멸하는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저는 다시, 기꺼이 길을 잃습니다.

 

 

수현,


책에 대한 당신의 강고한 확신을 지켜보며 우리의 운명을 헤아립니다.


당신의 확신과 저의 회의는, 책으로부터 결박당한 이들의 것입니다.

 

언젠가 제가 만들었던 책의 저자가 추문에 휩싸인 적이 있습니다. 편집자로서 저자의 몰락을 지켜보는 것은 몹시 아프고 슬픈 일입니다. 과연 저를 사로잡았던 그의 사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오래 간직해야 할 텍스트이므로 마땅히 책으로 만들어야 한다’라고 설득하거나 설득당했던 그 순간의 희열은 다 무엇이었을까요. 저자의 추문이 사실로 밝혀지던 즈음 저는 극심한 우울을 앓았습니다. 어느 불면의 밤, 그의 책을 다시 꺼내 읽었습니다. 잔뜩 벼린 논리는 서늘했고 깊고 둔중한 사유는 뜨거웠습니다. 그리고 그 책을 원래 있던 서가에 고이 꽂아두었습니다. ‘그의 책’은 이제 ‘그 책’이 되었습니다. 언젠가 다시 꺼내 읽을 것입니다. 그 책을 절판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어떤 이들의 요청에 대해 저는 답을 얻은 것 같았습니다. 정답이 아니라 결심을 했던 것이겠지요. 애도는 이별의 조건입니다. 또한 애도는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므로, 저자로서의 그의 죽음은 애도하되 그의 텍스트는 지켜내자고 다짐했습니다.

 

책은 저자 혹은 출판사의 것일까요. 물론 이 질문은 저작권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저자에게 명백한 귀책사유가 있을 경우 출판사는 출판권을 포기할 수 있지만(절판시킬 수 있지만), 이 질문은 출판사의 법률적 권리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본질적으로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책으로 발화된 텍스트는 누구의 것입니까. 그 텍스트의 당위는 누구로부터, 무엇으로부터 획득되는 것입니까.

 

저자의 삶이 책의 내용을 보증한다는 말은 믿지 않습니다. 좋은 독자는 저자를 맹신하지 않습니다. 독자는 치열한 독서로, 저자가 아닌 텍스트와 고투해야 합니다. 그다음 독자는 그 책을 소유하거나 버려야 합니다. 저자를, 번역자를, 편집자를, 발행인을 떠난 텍스트는 독자의 삶에서 또 다른 사유와 서사로 움틀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텍스트는 퇴화될 것입니다. 그것이 책의 소명입니다. 저자가 몰락하더라도, 그 책의 숙명을 그에게 내버려두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은 편집자의 염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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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을 잃어야만 닿을 수 있는 삶의 진실이 있습니다.

 

 

혁명의 자리마다 혁명을 추동해낸 굳건한 텍스트가 있었습니다. 혁명의 사람들은 책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일본의 현자 사사키 아타루는 텍스트가 혁명의 본질이라고 언명합니다. “텍스트를 읽고, 다시 읽고, 쓰고, 다시 쓰고, 번역하고, 천명하는 것. 그 과정에서 폭력적인 것이 나타나는 일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혁명에서는 텍스트가 선행합니다. 혁명의 본질은 폭력이 아닙니다. 경제적 이익도 아니고 권력의 탈취도 아닙니다. 텍스트야말로 혁명의 본질입니다.”(『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자음과모음, 2012) 우리를 결박하는 것은 바로 그 혁명의 텍스트입니다. 우리가 발견하고 보듬는 어떤 텍스트는, 이제 다시 우리를 매혹하고 사로잡고 결박합니다.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헤어나올 수 없다면, 우리는 비로소 혁명의 텍스트를 만난 것입니다. 우리는 출판사에 속한 자들이 아닙니다. 자본이나 경영자는 우리를 결박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책에 속한, 그 텍스트에 우리의 운명을 의탁하는 자들입니다. 

 

책을 만들다 지치면 헌책방을 찾곤 합니다. 명멸하는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저는 다시, 기꺼이 길을 잃습니다. 길을 잃어서 결코 그 책들 사이를 헤어나오지 못하기를 빌면서 말입니다. 당신과 함께 길을 잃기를, 당신의 강고한 확신이 저의 무수한 회의를 뚫고 저 혁명의 텍스트에 닿을 수 있기를 빕니다.

 

당신의 안부를 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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