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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구체적인 그것

장석남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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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떠나와서 여행을 생각하는 일도 여행자의 일과에 포함된 것일까. (2019. 02. 01)

출처 언스플래시.jpg

            언스플래쉬


 

겨울 바다에 다녀왔다.

 

기차를 타고 강원도 강릉으로 가면서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라는 말을 여러 번 궁굴려보았다. 아시다시피 저 문장은 김금희 소설가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 여러 편의 짧은 소설을 모아놓은 책은 진즉에 다 읽었는데, 밑줄을 그은 여러 문장 중에서도 유독 저 문장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것의 자리’에 그것이 아닌 단어를 바꿔 넣으며 새로운 문장들을 만들다 보면 작가가 이 문장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이 고심했을지, 친구 금희의 수척한 안색이 떠오르기도 하고, 무엇보다 누군가, 어딘가, 무언가를 아주 오래 생각하며 기쁨과 슬픔의 진원을 발견하기도 했다.

 

나는 겨울 바다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해, 나는 파도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해, 나는 모래성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해, 나는 조개껍질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해, 나는 시간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해, 나는 영원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해…. 여운이 긴 문장 하나를 들고 여행길에 오르는 자가 진정한 방랑자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계획도 없고, 읽을 책도 없고, 쓰기 위한 노트북도 없는, 옷과 세면도구뿐인 여행 가방을 메고 기차를 오르내리면서 여행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했다. 여행을 떠나와서 여행을 생각하는 일도 여행자의 일과에 포함된 것일까.

 

숙소에 짐을 풀고 해가 뉘엿뉘엿 지는 경포해변을 걸을 때는 바람이 차고, 저녁 물빛이 그윽하여 옛 생각을 했다. 재작년 겨울에는 경포해변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서더리탕에 밥을 말아 먹으면서 ‘영원의 머리가 든 매운탕’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했다. 얼큰하고 시원하여 내세를 앞두고 다짐하였다. ‘다음에는 더 멀리 가게 하소서.’ 밤의 해변에서 혼자 걷는 사람을 떠올리다가 밤의 해변을 혼자 걸었다. 그때 본 조악한 불꽃놀이가 그토록 환하게 보였던 건 젊음의 환호성 때문이었으니, 마침 경포해변을 같이 걷던 여행의 동반자도 세월에 대하여 내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그때의 강릉은 다 사라졌구나….

 

이튿날에는 강문해변에서 안목해변을 향해 걷다가 강문의 끝자락에서 두 사람의 이름을 보았다. 병훈과 승희였다. 이름들은 거대한 하트 속에 있었다. 병훈과 승희에 대하여 오랫동안 생각했다. 두 사람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만나 이곳 강문해변까지 와서 모래사장에 사랑의 증표를 남기게 된 것일까. 연인들의 흔적은 언제 나타났다 사라지는 걸까. 둘만의 하트에 감히 침범할 수 없어서, 하트를 빙 돌아가면서 나는 사랑에 대해서 오랫동안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여행을 떠나와서 사랑을 생각하는 일은 연인의 일과에 포함된 것일까. 우정 여행 중에 우정이 깨지고, 사랑 여행이 이별 여행이 되어버리는 알 수 없는 인간사에까지 잡념이 뻗치다 보니 어느덧 안목커피거리에 서게 되었다.

 

‘보사노바’라는 다방에서 흘러 나왔던 노래 한 곡이 잊히지 않는다. 칼라 보노프의 「The water is wide」다. “바다가 너무 넓어 건널 수가 없어요. 배를 주세요. 두 사람이 탈 수 있는 배를. 둘이 노 저어 갈게요. 내 사랑과 내가”라는 노랫말을 「두려움 없는 사랑」이라는 시에 빌려 적었는데, 지금 나와 함께 창밖의 바다를 내다보는 사람을 머릿속에 그리며 적은 시였다. 우연에 대해서 오랫동안 생각했다. 시를 쓰기 위해 메모했다. 쓰지 말자 다짐하고 여행을 떠나와서 쓰기를 생각하는 일은 작가의 일과에 포함되는 것일까. 기억할 만한 문장 하나를 마음의 품에 넣어 지니고 다니는 사람을 진정한 여행가라고 부른다면 이상할까.

 

이 여행은 순전히 / 나의 발자국을 보려는 것 / 걷는 길에 따라 달라지는 / 그 깊이 / 끌림의 길이 / 흐릿한 경계선에서 발생하는 / 어떤 멜로디 / 나의 걸음이 더 낮아지기 전에 / 걸어서, 들려오는 소리를 / 올올이 들어보려는 것 / 모래와 진흙, 아스팔트, 자갈과 바위 / 낙엽의 길 / 거기에서의 어느 하모니 / 나의 걸음이 다 사그라지기 전에 / 또렷이 보아야만 하는 공부 / 저물 녘의 긴 그림자 같은 경전 /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 끝없는 소멸을 / 보려는 것 / 이번의 간단한 / 나의 여행은,

-장석남 지음,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  중 「여행의 메모」 전문

 

순전히 잘 먹고 잘 자고 잘 걷기 위한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며 올려다본 서울의 밤하늘은 느닷없이 맑고 투명했다. 무슨 이유일까.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했다. 올해는 어딘가로 떠났다가 돌아오는 그것을 여행이라는 말 대신에 생각이라고 부르면 좋으리. 2박 3일 동안의 ‘강릉 생각’이라는 말이 꽤 그럴싸하게 여겨졌다. 마지막 날 걸었던 ‘정동심곡바다부채길’에서는 재회를 예감했으므로 간단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드디어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장석남 저 | 창비
한층 깊어진 시선으로 “가장 근원적인 인간, 가장 인간적인 인간, 가장 아름다운 인간이란 어떤 모습일지”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하는 아늑한 서정의 세계를 펼쳐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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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현(시인)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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