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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때 만난 택시기사

좋은 시들은 새벽의 택시 안에서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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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차 안에서 하릴없이 흘러내리는 말들. 허공에서 흩날리다 사라지게 둘 수밖에 없는 생각들. 택시 안에서 태어난 시들은 죄다 한강에 빠져 죽었다. (2019. 02.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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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스플래쉬

 

 

새벽 2시 즈음, 친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이불에 발만 살짝 넣고, 나란히 앉아 귤을 까먹으며 도란도란 나누고 싶은 이야기.

 

요즘엔 통 안 그러지만, 그럴 일이 없어 오히려 섭섭하지만, 내겐 고약한 버릇이 있었다. 술 마신 후 홀로 탄 택시 안에서 우는 버릇이다. ‘참으로 진상이로군’, 당신이 면박을 준다 해도  할 말이 없다. 주로 차가 끊긴 새벽 시간에 그러했다.

 

새벽에 택시를 타고 강을 건너 본 적 있는가?

 

몸은 안에 있지만 마음은 차창 밖 상념을 따라 휘휘 달아나려하는 때. 얼마 전까지 웃고 떠들던 이들은 사라지고, 혼자 밤 속으로 내던져진 기분. 그때 알았다. 좋은 시들은 새벽의 택시 안에서 태어난다는 것을. 달리는 차 안에서 하릴없이 흘러내리는 말들. 허공에서 흩날리다 사라지게 둘 수밖에 없는 생각들. 택시 안에서 태어난 시들은 죄다 한강에 빠져 죽었다. 나 대신, 그들이 뛰어들었다. 좋은 것들은 다 잡을 수 없구나, 중얼거리며 나는 몰래 울었다. 슬픈 일과 청승맞은 기억, 보고 싶은 이와 미운 이, 애틋한 이의 얼굴이 떠오르도록 내버려 두었다. 지금도 한강을 건널 때면 괜히 가슴이 먹먹하다. 한낮에도 그렇다.
 
스무 살 때다. 그날은 유난히 마음을 추스르기 어려웠다. 젊었으므로 슬픔도 더 젊었다. 택시를 타자마자 맹렬히 울었다. 숨이 넘어갈 정도로 우는 나 때문에 곤란했을 게 분명한 택시 기사가 건넨 말들, 안타까워하던 목소리를 기억한다. 왜 그렇게 울어요? 너무 슬퍼서요. 뭐가요? 모르겠어요. 무슨 일 있었어요? 그냥 일이, (흑흑) 자꾸만 많이, (흑흑) 일어나요. 울지 마세요. 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지나가요. ‘지나가요’라고 말하던 그의 나직한 말투가 기억난다. 고등학교를 갓 나온 어린 애가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택시에 타더니, 꺼이꺼이 목 놓아 우는 광경이라니. 이 난감한 광경의 장본인이 나다. 그는 내가 한참 울도록 내버려두더니 갑자기 자기 이야기를 꺼냈다.

 

아가씨, 내가 가장 힘들었던 때가 언제인 줄 알아요?
흑흑, 몰라요.
성룡 알죠? 영화배우 성룡. 오래 전에 성룡이 내 여자친구를 빼앗아 갔어요.
성룡이요?
네. ‘미스 롯데’ 출신인 내 여자친구, 정말 예뻤는데. 성룡에게 빼앗겼어요.

 

그때 내 울음이 잠시 잦아들고 귀가 쫑긋해진 것은 사실이다. 울다 호떡을 본 기분이랄까. 홍콩영화라면 하루에 두세 편씩 연거푸 보던 내가, 이런 오묘한 이야기를,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흐느껴 울다, 새벽의 택시 안에서, 처음 만나는 기사에게 들을 줄은 몰랐다. 나는 조금씩 울음을 멈추고 성룡의 도덕성을 놓고, 택시 기사와 이러니저러니 흉을 보았다.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나는 무조건, 그의 편을 들었다. 강남구에서 강서구까지 한참을 왔는데, 그것도 꺼이꺼이 울며 왔는데, 지갑을 열어보니 돈이 모자랐다. 신용카드도 없던 때다. 나는 퉁퉁 부은 눈으로 돈이 모자라니 집에 올라갔다 오겠다고 말했다. 잠든 부모님을 깨워, 취한 몰골로 택시비를 달라고 말해야 하는 상황이 끔찍했지만 별 수 없었다. 그런데 그가 별안간 돈을 ‘한 푼’도 받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 아닌가. 돈은 됐으니 앞으로는 울지 말고 다녀요, 나를 다독이던 그의 말. 그 다정함에 감명 받아 나는 또 울기 시작했다. 집으로 들어가는데도 자꾸 눈물이 나왔다. 눈물이 폭포처럼 흐르던 시절이다.

 

이제 나는 아무리 슬퍼도 모르는 이 앞에서는 울지 않는다. 늦은 밤 택시를 타고 강을 건넌다 해도 울지 않는다. 옛날에 빠져죽은 아름다운 시들을 떠올릴 뿐이다. 나풀나풀 사라지던 옛 말들이 수장된 강물을, 바라보기만 한다. 눈물 대신 한숨이 더 쉽고, 한숨 대신 괜찮은 척이 더 쉬운 나이가 되었다.

 

그날 이후 텔레비전에서 성룡이 나오면 가자미처럼 눈을 흘기고 바라보는 버릇이 생겼다. ‘쳇, 당신 말이야!’ 속으로 콧방귀를 뀌고는, 그날 우리가 나눈 새벽의 대화를 생각한다. 나를 돌본, 그의 선의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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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연준(시인)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나 동덕여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에 시 '얼음을 주세요'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속눈썹이 지르는 비명』『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가 있고, 산문집『소란』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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