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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은 장난꾸러기

모든 단어가 같은 순간 한꺼번에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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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를 둘러싼 여러 현상은 무척 흥미롭다. 사전은 모든 단어가 모여 사는 아파트 같아 왠지 귀엽다. (2018. 01.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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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어원에서 표준국어대사건 수정 내용을 발표했다. 앞으로는 효과를 ‘효꽈’로 발음해도 된단다. 안간힘과 인기척도 ‘안깐힘’, ‘인끼척’이라고 발음하는 기존 표준 발음에 더해 ‘안간힘’, ‘인기척’이라고 발음해도 된다는데, 나는 한 번도 ‘안깐힘’을 쓰거나 ‘인끼척’을 느낀 적이 없어 당황했다. 이 발표 전까지 나는 한국어를 잘못 사용하는 사람이었는데 하루 아침에 아무 노력 없이 표준 한국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된 셈이다.

 

“이거 뭐야. 벌금 안 내고 버텼더니 면제받은 기분이네. 그동안 ‘효꽈’가 아니고 ‘효과’라고 그토록 주의 주더니 안 되겠다 싶으니까 그냥 옳다고 치자는 건 새 흐름을 받아들이는 포용력일까, 기회주의일까? 그러면서 굳이 표준어를 정해야 하나?”


“표준어가 없으면 어떤 말이 맞는지 몰라 대혼란에 빠지지 않겠어?”


“하지만 올해도 그렇고 몇년 전 ‘짜장면’도 그렇고, 틀렸다더니 어느 시점에 이르러 앞으론 맞다고 하니 표준어가 무슨 소용인가 싶어서.”


“관습을 무시할 수 없겠지. 도달해야 할 지점은 정하되 동행자의 상태를 봐가며 세부 코스를 조정해야 하지 않겠어? 불가침인 원칙을 세우고선 따르지 못한다고 전부 낙오시킬 수 없잖아.”


“우리 3학년 여름방학 때 한 아르바이트 생각나?”


“신문사에서 했던? 생각나지. 왜?”


“한 달 동안 하루도 못 쉬고 일했는데 1차 마감 끝나자 다음날 한나절씩 쉬라고 했었잖아.”


“히히히, 맞다. 다음날 우리는 오전에 쉬고 출근했더니 아무도 없었지.”


“오후 4시가 지나도 아무도 안 왔잖아. 이거 뭔가 이상한데…… 분명 한나절씩 쉬라고 했는데…… ‘우리가 아는 한나절이 한나절이 아닌가?’ 했잖아?”

 

당시 사무실에 비치된 표준국어대사전에서 ‘한나절’을 검색했더니 ‘1. 하룻낮의 반, 2. 하룻낮 전체’라고 나왔다. 아니, 어떻게 한 단어의 뜻이 ‘반’과 ‘전체’를 아우르지? 게다가 그때까지 우리는 한나절을 ‘하룻낮’이라는 특정 시간대로 한정하지 않고 아무 때의 대략 서너 시간에 해당하는 구간으로 여겼다. 나중에 그 사태가 ‘한나절’을 이용한 골리기였음이 밝혀졌지만 한 달만의 휴일을 미심쩍은 마음으로 보내게 되어 무지 속상했는데 알고 보니 우리 아르바이트가 그날이 끝이라 회식에 앞서 선배들이 벌인 이벤트였다.

 

내친 김에 ‘반나절’을 검색했다. ‘1. 한나절의 반, 2. 한나절의 1번 뜻’이란다. 과연 ‘한나절’의 1번 뜻 옆에 유의어로 ‘반나절’이 있었다. 이번에는 ‘하룻낮’을 찾았다. ‘하루의 낮 동안’이란다. 그럼 ‘낮’은? 1.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의 동안, 2. 아침이 지나고 저녁이 되기 전까지의 동안, 3. 한낮. 1번 뜻은 인간이 활동하는 사실상 하루 종일을 가리킨다. ‘아침’은 ‘날이 새면서 오전 반나절쯤까지의 동안’이라는데 반나절은 한나절의 유의어이고 한나절은 하룻낮 전체라고 하니, 허허, 뭐 이래. 사전이 사전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사전은 진지한 편찬 활동의 결과일까, 지적인 말장난 애호가들의 유희 도구일까. 그 사건 이후 사전은 엔터테인먼트가 되었다.

 

추억에 잠겨 흐뭇하게 미소 짓던 노바가 갑자기 뭘 검색했다.

 

“표준어에 이런 설명이 있네. ‘우리나라에서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로 정함을 원칙으로 한다.’”


‘교양 있는 사람들’이라……. 또 검색하는 노바.


“교양이란 ‘학문, 지식, 사회생활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품위. 또는 문화에 대한 폭넓은 지식’이라는군.”

 

사전은 언제나 야릇한 기분이 들게 한다. 단어의 뜻이 궁금해 펼쳤다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고뇌로 귀결된다. 이를테면 ‘표준어’의 뜻이 궁금했을 뿐인데 여러 질문이 줄줄이 떠오르는 것이다.

 

‘교양 있는 사람들은 두루 현대 서울말을 구사해야 하나?’


‘표준’이라는 단어 때문에 다른 지역말을 쓰면 덜 교양 있어 보인다는 착각이 생기지 않나?’


‘표준어를 구사하는 인구 중 ‘교양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 정도일까?’


‘교양이 없는 자는 표준어를 쓰면 안 되나?’

 

지면이 부족해 몇 가지만 적었지만 세세하게 파들어가거나 언저리를 건드리면 다른 질문들도 쏟아지리라. 다른 나라에도 표준어 개념이 있는지 궁금해졌다. 이거 지역차별 아닌가? 각자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나라의 언어를 쓰듯이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지역의 말을 쓰는 건 자연스러운 일인데 표준이 되는 말을 따로 지정한다니. 언어의 쓰임이나 효용에 별 관심이 없어 더 공부하지 않았지만 뭔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가 하면 외국어를 한국어로 적을 때 생기는 오해 때문에 훗날 크게 웃은 일화가 적지 않다. 어릴 적 본 동화책에 적힌 ‘그림 형제’라는 이름을 보고 ‘와, 그림을 얼마나 잘 그리면 그림 형제일까’ 하며 감탄했다. 한국에 오면 이름이 바뀌는 외국인들이 안쓰럽기도 하다. 영어 이름은 재키 챈인, 한때 성룡이라 불린 청룽이며, 과거에 주윤발이었던 저우룬파 등등. 저우룬파는 광동어 발음으로 짜우연팟에 가깝다고 하는데, 뭐, 다 모르겠다. 언어는 마법의 도구처럼 보이다가도 체계 전체가 농담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를테면 동음이의어.

 

모든 단어가 같은 순간 한꺼번에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단어가 먼저, 어떤 단어는 나중에 생겼을 텐데 왜 굳이 같은 소리로 칭했을까? 어떤 과정을 거쳐 깜깜한 밤과 먹는 밤, 사람 배와 먹는 배, 대화할 때 주고받는 말과 달리는 말이 같은 소리로 정착됐는지 궁금하다. 깜깜한 밤을 밤이라고 먼저 부르고 있는 상황이었다면 먹는 밤에는 다른 이름을 붙여도 좋았으련만 어째서? 아무리 생각해도 두 밤 사이에 별다른 유사점이 보이지 않는다. 빨리 달리는 말은 발 없이도 천 리 가는 말과 최소한의 개념적 유사성이나마 보인다만 그렇다고 굳이 같은 소리로 불러야 할 만큼의 필연성이 있는지 모르겠다. 예전에는 장음, 단음을 구분했다지만 말이 빠른 사람의 장음과 느린 사람의 단음은 헷갈리지 않았을까? 독일에 여행갔다가 현지인 누구도 ‘뮌헨’을 알아듣지 못해 애먹었다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지. 내 귀에는 ‘뮌셴’에 가깝게 들리던데 내 지각이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최근에 접한 단어 중 해독하기 힘들었던 말은 접은 책장 모서리를 가리키는 ‘도그 지어’다. 잠깐 검색하니 영어권에서 실제로 쓰이는 표현은 dog’s ear가 아니라 dog ear/dog ears인 모양인데, 확실하지 않다. ‘에이 쓰리’, ‘에이 포’도 편하지 않다. A 규격 용지를 삼등분하면 A3, 사등분하면 A4이니 에이 삼, 에이 사가 적합하다 여겨 오랫동안 그 표현을 쓰다가, 유난 떠는 것 같아 요새는 에이쓰리, 에이포라고 한다. 국민학교 다닌 사람들이 초등학교 다녔다고 하는 용법도 어색하다. 학교 명패가 초등학교로 바뀌었을지언정 졸업할 무렵에 국민학교였다면 국민학교 졸업생 아닌가? 1980년대에 정년 퇴직한 금성사 직원이 LG에 다녔다고 하면 더 젊어 보이는 효과가 생기려나?

 

아무튼 언어를 둘러싼 여러 현상은 무척 흥미롭다. 사전은 모든 단어가 모여 사는 아파트 같아 왠지 귀엽다. 내년에는 어떤 단어가 표준어로 새로이 인정받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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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이기준(그래픽 디자이너)

에세이 『저, 죄송한데요』를 썼다. 북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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