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 대탐험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일대 도박을 걸어보고 싶은 모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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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안경점을 차린다면 시착하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을 따로 만들어 만화책을 잔뜩 쌓아두고 커피 정도는 제공할 텐데. (2017.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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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와 달리 다소 비싼 모델이 놓인 선반을 둘러보는데 슈베르트를 연상시키는 타원형 테가 눈에 띄었다. 무척 가벼웠다. 코 패드 없이 브릿지를 바로 콧등에 얹는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코받침이 휘어 불편할 때가 잦았는데 앞으로 그런 일은 없으리라 생각하니 신세계가 열리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실제로 그랬다. 여름이면 땀에 미끄러져 흘러내리곤 하던 안경이 굳건히 제자리를 지켰다. 딱히 불편을 느끼지 못했더라도 전보다 편해지면 그동안 얼마나 불편했는지 비로소 깨닫는 법이다. 부적절한 장식 없는 간결한 디자인은 내 인상까지도 바꾸는 듯했다.


이후 안경은 일대 관심거리가 되었다. 인간이란 자고로 도구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동물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는 물건이 있다면 내 경우엔 안경이다. 없으면 보지 못하니까. 안경은 눈의 확장이자 향신료다. 이제 쓰던 안경이 낡지 않아도 새로운 제품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그게 이토록 애달픈 일이 될 줄이야.


고전적인 형태의 얇고 가벼운 안경을 갖게 되자 좀 더 존재감이 확실한 놈을 더하고 싶었다. 르코르뷔지에의 안경 같은. 쉽지 않았다. 안경은 언뜻 보면 다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양이와 호랑이 만큼의 차이가 있고 매해 새로운 종이 출시된다. 르코르뷔지에가 쓰던 안경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모델은 찾을 수 없었고 간혹 비슷한 놈이 걸려도 나한테 어울리지 않았다. 쓰고 싶은 안경과 어울리는 안경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특정 모델을 포기하자 많은 가능성이 열렸다. 하지만 두꺼운 뿔테 안경이라는 범주는 유지하기로 했다. ‘뿔테’라는 명칭을 쓸지 말지 한참 망설였다. 요새는 이른바 뿔테 안경의 소재가 대부분 셀룰로이드나 아세테이트라고 하는데 아마 예전에 동물 뿔을 깎아 만든 형태의 안경을 인공 소재로 재현했다는 이유로 뿔테라 부르는 모양이다.


셀룰로이드와 아세테이트는 외관이 비슷해 전문가도 구분하기 힘들다고 하니 소재를 명칭으로 삼기에 곤란하겠고, 플라스틱 테라고 하자니 범위가 너무 넓어진다. 아무튼 안느에발랑탱이라는 브랜드에서 나온 뿔테를 발견했다. 둥그스름하면서 살짝 각진 프레임이 멋스러웠지만 육중한 무게 탓에 하루만에 콧등이 까졌다. 안경점에 가져가니 원래 있던 코받침을 갈아내고 금속으로 다리를 덧붙여 실리콘 패드를 달아주었다. 하지만 실리콘이 피부에 달라붙는 감촉이 거슬렸다. 무엇보다 무게 때문에 신경이 콧등에 집중되어 일을 할 수 없었다. ‘존재감’이 덜한 놈이 필요했다.

 

후속으로 마련한 장마릴 역시 무거웠다. 르코르뷔지에의 안경은 도대체 어땠을까? 훨씬 두꺼웠던 만큼 더 무겁지 않았을까? 그 무게를 어떻게 견뎠지? 이미지를 위해 참았나? 어쩌면 그 시대의 안경은 소재나 제작 방식이 달라 더 가벼웠을지도 모른다. 안경점에서도 진짜 뿔로 만든 테는 가볍다고 했다. 하지만 만약 문제가 생길 경우 국내에서 다루기 힘들어 생산국에 보내야 하는데 그 기간이 반 년 정도 걸린다며 권하지 않았다. 너무 비싸 살 생각도 없었지만 권하지 않을 안경을 파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튼 연달아 들인 두 놈 모두 쓰지 못하게 되었다.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한 개 더 사고 싶었다. 르코르뷔지에에게 골탕 먹고 나서 내 레이다는 헤르만 헤세를 향했다. 결과만 언급하자면 이번에도 역시 구할 수 없었다. 안경점을 수십 군데 돌고서야 타협이 유일한 방법임을 깨닫고 다시 한 번 카메만넨을 택했다(안경 대탐험을 부추긴 놈이 카메만넨이었다). 누렇게 도금한 티타늄 골조에 누런 캡을 씌운 원형 테였다. 대만족. 여전히 즐겨 쓴다. 그럼에도 뿔테 안경을 향한 욕망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럴 즈음 눈에 들어온 놈이 요지 야마모토. 다리가 티타늄이라고 해서 속는 셈 치고 샀다. 안느에발랑탱이나 장마릴보다 얇고 가벼웠지만 그래도 약간은 신경 쓰이는 무게였다. 안경을 살 때 고약한 점은 한나절은 써야 무게를 실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직 사지 않은 안경을 쓰고 몇시간 동안 가게 안을 서성이기란 상당히 고단한 정신노동이다. 내가 안경점을 차린다면 시착하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을 따로 만들어 만화책을 잔뜩 쌓아두고 커피 정도는 제공할 텐데.

 

그러다 깃털처럼 가벼운 테를 알게 되었다. 린드버그라나. 뭔가 현대적인 분위기에 소문 대로 가벼웠다. 하지만 린드버그의 첨단 제조 기법과 현대적인 디자인은 나한테 어울리지 않았다. 안타까움의 한숨이 안경의 정령을 불렀는지 볼프강 프록슈라는 놈이 나타났다. 린드버그만큼 가벼웠다. 테도 무지 얇아서 거의 무테로 보일 지경이었다. 냉큼 샀다. 그런데 너무 가벼워서 문제였다. 테가 낭창거려 콧등에 안정적으로 자리잡지 못했다. 귀 옆 무성한 곱슬머리 사이로 다리가 비집고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여린 테였다.

 

언제까지 반려 안경을 찾아 헤매야 할까. 어디든 낯선 동네에 가면 안경점에 들르게 되었다. 그러다 부산의 한 백화점에서 엄청난 놈을 보고 말았다. 검정 쇠붙이를 망치로 뚝딱뚝딱 두드려 만든 듯한 프론트에 대나무 다리를 붙인 놈이었다. 대장간 냄새가 물씬 났다. 일찍이 보지 못한 만듦새였다. 심지어 잘 어울리기까지 했다. 일본 안경 장인의 솜씨란다. 가격을 듣는 순간 세상이 잠시 정지하는 듯했다. 대나무 다리에 손 기름을 묻혔으니 사라고 할까 두려워 얼른 내려놓았다. 서울에 돌아와서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존재를 안 것만으로 축복처럼 여겨지는 물건이었다. 믿음직스러운 단골 안경사와 상담했다.

 

“대나무는 피팅 자체가 불가합니다. 절대 사지 마세요.”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일대 도박을 걸어보고 싶은 모델이다.

 

결국 몇달 전 도쿄에서 만족스러운 뿔테 안경을 구했다. 일본인은 물건을 참 잘 만든다. 다른 나라에서 쇼핑을 할 때도 마음에 쏙 드는 물건은 대부분 일본제였다. 줄곧 찾던, 가벼우면서 브릿지와 다리가 림의 중앙 가까이에 달린 놈이었다. 그만하면 괜찮았지만 경첩에서 다리로 이어지는 부분에 가는 선을 몇개 새겨 넣은 디자인이 별로였다. 뿔테 프론트에 가는 금속 다리를 달면 우아할 듯한데, 안경 디자이너의 눈은 그래픽 디자이너의 눈과 아무래도 다른 모양이다.

 

(몇 가지는 건너뛰었지만) 여기까지가 올 봄까지의 여정이다. 새로 장만한 뿔테 안경을 착용하고 이 글을 쓰는 지금은 한여름이다. 기온이 워낙 높아 테가 살짝 늘어난다. 소재의 특성이라니 어찌할 도리가 없다. 여름?겨울 주력 안경을 따로 둬야 하나? 갈수록 복잡해진다.

 

얼마 전 새로 문 연 안경점에서 은색과 로즈골드 조합의 티타늄 테를 발견했다. 여름용으로 딱이다. 색도 멋지거니와 브릿지와 엔드피스를 림에 결합한 부위의 장식이 돋보였다. 이 정도라면 골수 모더니스트도 환영하지 않을까? 알 두 개, 다리 두 개로 펼쳐보일 수 있는 세계가 이리도 무궁무진하다. 그런데 브릿지의 깊이가 얕아 얼굴과 안경의 거리가 너무 좁았다. 깊이 조절이 가능하다면 기꺼이 고려해 볼 만했다. 단골 안경사에게 의견을 구했다.

 

“그러면 밸런스가 무너집니다.”

 

천만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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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이기준(그래픽 디자이너)

에세이 『저, 죄송한데요』를 썼다. 북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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