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 놀이터

뉴욕, 넌 내게 모욕을 줬어

지갑은 쉽게 열리지만 입은 쉽게 열리지 않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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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기서 뭐하는 거지?’ 그녀는 내가 언어 머리가 있다고 치켜 세우곤 했지만 이 곳에 와서야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뉴욕을 즐기지 못한 것은 다름 아닌 평생 배워 온 영어를 능숙하게 말하지 못한다는 ‘자격지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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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봐요. 당신도 뉴요커들이 상대해 주지 않던가요?’ 뉴욕에서 나는 사진 속 남자처럼 어깨가 축 쳐저 있었다.

 

 

뉴요커, 네이놈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사람들의 영어는 마치 요정의 말 같았다. ‘Hi, how do I get to there? (저기. 여기 어떻게 가요?)’하고 물으면 ‘우엑아크라쉣불르암밭칫’ 정도로 돌아왔다. 내 귀는 그들이 뱉는 강력한 스코티쉬 엑센트에 눌린 단어를 찾아낼 수 없었다. 나는 묻고 그들은 못 알아듣고, 겨우 대답해도 나는 이해 못 하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영어로 고생한 기억을 들춰보면 뉴욕도 만만치 않다. 이 망할 뉴요커들은 영화에서 본 것과 달리 농담도 할 줄 모르고, 커피 한 잔의 여유도 없었다. 길 위에서 의사소통을 시도해봤다. 횡단보도 앞에서 지도를 펴고 ‘저기. 여기 어떻게 가요?’하고 물어도 대꾸가 없다. 아니,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것은 여행자뿐이고 그들은 빨간 신호에도 차만 없으면 냅다 뛰었다. 다들 바쁘게 걷고, 표정은 날카로웠다.

 

식당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중국 음식을 배달시켜볼까 했는데 못 알아 듣겠다며 전화를 끊어 버린다. 캐주얼한 레스토랑에 들어가 혀를 잔뜩 꼬아가며 메뉴를 골랐지만 내 주문 끝에는 ‘What?’이라는 한 단어가 돌아왔다. 그의 일그러진 표정으로 ‘네 말을 못 알아 듣겠다’는 의미를 알 수 있었지만 그래도 이 양반아. 내가 뱉은 단어만큼은 돌려줘야지 한 단어로 끝내면 어쩌나? 뉴욕에서 나의 영어는 불합리한 거래 조건이었다.

 

남의 속도 모르고 ‘얘네들이 너무 신경질적인 거니까 상처받지 말라’며 내 영어를 추켜세우는 그 여자는 한껏 들떠 있었다. 그 여자가 링컨센터를 들락거리며 지적 허영심을 채우고 있는 동안, 나는 스타벅스에 홀로 앉아 아무 말 없이 브로드웨이 가를 지켜봤다. 침묵이 필요했다. ‘내가 여기서 뭐 하는 거지?’ 그녀는 내가 언어 머리가 있다고 치켜세우곤 했지만, 이곳에 와서야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뉴욕을 즐기지 못한 것은 다름 아닌 평생 배워 온 영어를 능숙하게 말하지 못한다는 ‘자격지심’이었다.

 

영어로 두들겨 맞은 만큼 실력이 늘었으면 좋으련만 언어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지금도 스코티쉬 영어는 요정의 언어로 들리고, 뉴요커의 말은 표정부터 쏟아져 나오는 날카로움이 느껴진다. 하지만 얻어맞고, 무시당한 만큼 외국어 맷집도 함께 늘어났는지 이제는 그들이 알아듣건 못 알아먹건 뻔뻔하게 영어를 할 수 있다. 이제서야 내게도 외국어 따위는 몰라도 보고 싶은 공연 찾아다니고, 길을 헤매어도 당황하지 않는 그런 자신감이 생겼나 보다.

 

다시 뉴욕에 가면 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 맨해튼 구석에 위치한 레스토랑을 예약하고 웨이터와 사사로운 농담을 주고받다가 음식과 와인을 추천받는다. 식사가 끝난 뒤, 쉐프에게 요리가 훌륭했노라고 인사를 건네고 테이블에 조금 과한 팁을 남기고 일어나 노란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웨이터가, 쉐프가, 택시기사가 내 영어를 이해하고 못 하고는 상관없다. 우리는 어떻게든 통할 테니 말이다.

 

영화에서 보았음직 한 사사로운 허영을 누려보고 싶은데 다시 그곳에 갈 기회가 쉽게 오지 않는다. 왜 난 뒤돌아 서야 후회하고 반성하는 걸까? 내가 느끼는 언어의 부담감을 그 여자가 반이라도 가져가 주면 좋으련만. 외국어 따위를 몰라도 자신 있게 자리 하나 차지하고 앉아 공연을 보고 나오는 그 여자의 허영심이 탐난다. ‘나는 이번 생에는 텄고 당신이라도 충분히 즐겼으니 그걸로 됐구려. 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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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양각색의 얼굴을 지닌 맨하튼. 바쁜 뉴요커를 대신하여 나는 이 도시의 진면목을 누리고 왔다.

 


뉴욕의 허세녀


맨해튼을 배경으로 하는 미국 드라마 <슈츠>(suits). 야욕에 가득 찬 변호사가 정보를 캐내기 위해 동료의 비서에게 뇌물(?)을 주는 장면이 나온다. ‘당신이 내 일만 도와준다면 링컨 센터 VIP 시즌권을 주겠다.’는 대사를 듣고 드라마 속 비서처럼 정신이 아찔해 져서 이마를 짚고 말았다. ‘그냥 시즌권도 아니고 VIP라니!’ 그 남자는 ‘뇌물이 뭐 그따위냐’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지만 나는 이 정도 뇌물이라면 악마에게 자신의 영혼을 저당 잡힌 파우스트처럼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다.

 

고백하건대 나는 영어를 읽을 줄만 알지 듣지도 말하지도 못한다. ‘언어 바보’인 내가 세계를 여행할 수 있는 건 순전히 그 남자의 탁월한 언어 능력 때문이다. 그는 한사코 자신은 언어를 잘하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것뿐이라고 겸양을 떨지만 나는 혀를 있는 대로 굴리며 내뱉는 그의 완벽한 중국어 발음과 리드미컬한 성조에서 이 남자의 섹시함을 발견했다. 어디 중국어뿐인가! 그의 영어 발음은 네이티브 스피커 못지않고 여기에 뻔뻔함까지 갖춰 응당 외국어를 배우려는 자의 완벽한 자세까지 갖추었다.

 

그런 내가 맨해튼 링컨센터에 상주하며 오페라와 연극을 보겠다고 했을 때 남자는 이해도 못 하는 공연을 보러 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며, ‘여행지에서 고급문화를 즐기며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에 도취해 있다’고 일침을 가했다. 그 남자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다. 공연 내용을 알아듣지 못해 후회한 적도 많았으니까. 대사가 들리지 않기에 장면만으로 스토리를 상상해 내기도 했다. 그러나 기본적인 줄거리를 알고 가면 들리는 단어 하나하나로 이야기를 유추할 수 있는 공연도 많았다.

 

현대 사회의 가장 비싼 가치인 ‘시간’과 ‘돈’을 들여 ‘희소한 경험’을 만들어 냈다는 자부심이 내 안에 있었다. 굳이 ‘경험이 경쟁력이다’라는 경쟁 원리에 입각하지 않더라도 뉴욕에 와 봤다는 것 자체로 그리고 링컨센터에 상주하며 그토록 많은 공연을 보고 왔다는 ‘희소하고 차별화된 경험’ 그 자체를 즐겼다. 누구나 뉴욕에 왔다고 에단 호크 Ethan Hawke가 열연하는 <맥베스>를 볼 수 있는 게 아니고 알론소 쿠아론 Alfonso Cuaron 감독이 직접 행차한 <그래비티> 관객과의 대화에 참여할 수는 없지 않은가.

 

사실 뉴욕만큼 지갑이 쉽게 열리는 곳도 없다. 맨해튼을 화려하게 수 놓은 각종 상품 등이 ‘어서 나를 사 가라’며 손짓한다. 이곳에서만큼은 ‘소비’가 천박한 것이 아닌 미덕으로 섬겨지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매일 1만 톤 이상의 쓰레기와 넘쳐나는 물자 그리고 나처럼 지갑을 열어젖히기로 작정한 여행객들이 모여 더럽고 정신없는 ‘소비의 끝판 왕’ 맨해튼의 거리를 채운다.

 

어쩌면 지적 허영심 많은 나 같은 사람에게 제격인 도시인지도 모르겠다. 천박한 소비의 왕국임을 알면서도 나는 기꺼이 뉴욕과 사랑에 빠졌다. 뼈 속까지 뉴요커인 우디 알렌 Woody Allen<맨하탄>(Manhattan)에서 자신의 모습을 희화해 내레이션을 읊조렸다. “그는 뉴욕을 사랑했다. 아니 터무니없을 정도로 그곳을 우상화했다.” 뉴욕을 찾은 내 모습이 딱 그랬다.

 

뉴욕은 내가 할 수 있는 ‘소비’의 가장 고상한 형태, 즉 문화 귀족이 되어볼 수 있는 도시였다. 파우스트는 젊음, 즉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얻기 위해 악마와 거래를 했다. 하지만 나는 고작 돈만 지불하면 영혼은 안전하게 보존하되 ‘링컨 센터 VIP 시즌권’을 얻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뉴욕에서 이 정도의 고상한 소비는 눈 감아 줄 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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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백종민/김은덕

두 사람은 늘 함께 하는 부부작가이다. 파리, 뉴욕, 런던, 도쿄, 타이베이 등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도시를 찾아다니며 한 달씩 머무는 삶을 살고 있고 여행자인 듯, 생활자인 듯한 이야기를 담아 『한 달에 한 도시』 시리즈를 썼다. 끊임없이 글을 쓰면서 일상을 여행하듯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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