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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 보여주고 싶은 세계

계속 더 나은 방향으로 변하는 게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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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끝나면 아이들이 사는 세상이 갑자기 인종과 나이와 성별에 상관없이 평등해지는 유토피아가 되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세상은 유토피아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면서도, 나름의 즐거움을 찾게 해주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칼럼 명을 따라 솔직히 말하면, 나는 디즈니를 좋아한다. 다섯 살 때부터 <라이온킹>을 질릴 때까지 봐서 나중에는 알파벳 하나 모르면서 노래를 따라 불렀다. 잠시 잠깐 부모님이 내 자식이 혹시 영어 천재가 아닐까 하고 기대했지만, 그 당시 내가 따라 부른 노래는 스와힐리어로 된 노래였다. 피아노를 배우면서 체르니는 못 쳤지만 <인어공주>의 「under the sea」를 듣고 쳐내면서 역시 실력은 덕질에서 온다는 말을 체감했다.

 

그러나 약간 핀트가 어긋났던 건, 동물이 나오는 영화에는 환장했지만 사람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신데렐라><미녀와 야수><뮬란>과……. 하여튼 예쁘고 멋진 왕자와 공주가 나오는 내용은 별로였다. 굳이 좋아했던 캐릭터를 꼽으라면 <인어공주>의 세바스찬, <라이온킹>의 라피키, 티몬, <미녀와 야수>의 찻주전자와 찻잔 모자. 정말 취향 확실하다. 어렸을 때부터 대인 공포증이라도 있었던 모양이다.

 

 

세바스찬.jpg
명색이 주인공인 인어는 안 좋아하고 가재를 좋아했었다. 출처_디즈니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를 돌이켜 생각해보니, 디즈니 작품이 흔히 비판받는 ‘공주의 유일한 해피엔딩은 잘생기고 부유한 왕자를 만나 결혼’이라는 틀이 그 당시에도 낡고 매력적이지 않아서였던가 싶다. 일곱 살한테 결혼을 통한 신분상승은 딴 세상 얘기였다. 물론 레이스와 핑크에 눈이 돌아가는 친구들은 많았지만 나는 비 온 모래장에서 성을 쌓거나 미끄럼틀을 타는 걸 더 좋아했다. 디즈니의 여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미끄럼틀을 타기에는 최악의 옷을 입고 있었다. 아, 뮬란 빼고.

 

그리고 20년이 지나고 나온 디즈니 영화를 보고 있자면 세상이 변하기는 했다. 이미 충분히 성 불평등과 인종 차별에 대해 까인 덕분인지, 꿈이 결혼이 아닌 당당한 여주인공은 기본이다. <겨울왕국>에서는 정말 주체적인 주인공을 그리고 싶었는지 영화가 시작한 지 5분 만에 부모님을 풍랑에 성의 없게 죽여버리고 스토리를 확확 진행한다. 예전 같았으면 아빠는 영화 내내 주인공의 자아실현을 막고 삼지창으로 가정 폭력을 일삼다 영화 끝에 이르러서야 눈물을 훔치고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라며 남편한테 놓아줬을 텐데(<인어공주>). 왕자님도 없다. 주인공은 전국을 다 얼려 버릴 수 있는 짱 센 여왕님이 되고, 여동생 안나는 왕자와 결혼할 법도 한데 얼음 장수 남자친구랑 사귄다. 지금 봐도 신나는데 어렸을 때 보면 얼마나 신났을까. 스토리 작가가 누군지는 몰라도 <신데렐라>를 안 좋아했던 건 분명하다.

 

그리고 저번 주 대망의 <주토피아>를 봤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영화였다. 우선 털이 복슬복슬한 동물들이 잔뜩 나오는 데다, 작화가들은 어떻게 하면 이 동물들이 귀여워 보일지 너무 잘 알고 있다. 다양한 동물이 사는 도시가 다인종사회를 암시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파워 알파걸 주인공 토끼와 엮이는 건 여우였다. 애초부터 종이 다르니 결혼은 꿈도 꾸지 말라는 제작자들의 일침 같다. 둘은 모두의 박수를 받으며 결혼하는 결말 대신 같이 경찰이 되어서 더 나은 사회를 만든다.

 

주토피아.jpg
출처_디즈니

 

영화를 보면서 더 신났던 건, 해피엔딩이 없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지만 <슈렉>에서 나왔듯이,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They lived happily ever after)’는 건 눈 가리고 아웅일 뿐, 모든 악당을 물리치고 마을에 평화가 찾아왔어도 삶은 계속된다. 디즈니는 이제 아이들이 바보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영화가 끝나면 아이마다 갑자기 잘생기고 예쁜 짝을 찾고, 세상이 갑자기 인종과 나이와 성별에 상관없이 평등해지는 유토피아가 되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세상은 유토피아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면서도, 나름의 즐거움을 찾게 해주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반짝이 핫팬츠를 입은 채 엉덩이를 살랑대는 춤을 추는 근육질 호랑이라든가.

 

또 하나 신났던 점. <주토피아>의 동물은 자기 습성대로 산다. 각 동물의 크기에 맞는 문이 열차와 건물마다 있고, 나무늘보는 자기 속도로 한 건을 처리하고 나면 한밤중이 되지만 여전히 교통국에서 일할 수 있다. 경찰청에서 일하는 표범은 늘 도넛을 먹어서 볼과 목 사이에 도넛이 껴도 모를 정도로 뚱뚱하지만, 누구도 표범이면 날씬하고 날쌔야 한다고 잔소리하지 않는다. 아마 현실이라면 나무늘보는 저성과자로 해고될 것이다. 거리에는 기득권을 잡은 동물 크기에 맞는 문과 집과 도로가 있었겠지. 쥐들은 몸을 크게 키우는 옷을 입고 기린은 목을 꺾어야 하는.

 

비록 세상이 그렇게 평등하지 않다고 해도, 평등한 내용을 만들어내는 것 자체가 부럽다. 과연 이런 내용이 아이들의 가치관에 영향을 줄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인어공주>를 아무리 봐도 내가 날씬 허리에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여성이 되지 않았던 것처럼, 디즈니가 그리는 세계는 그저 그 세계에서만 끝나는 반짝 마법일 수도 있다. 그래도, 부럽다. 적어도 지금 디즈니가 아이들과 어른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세계는 이렇게 아름답고, 계속 더 나은 방향으로 변하니까.

 

마지막으로, 기술 만세다. 털을 저렇게 사실적으로 그릴 수 있다니, 당장 화면으로 뛰쳐들어가 토끼와 기린과 사자와 늑대의 목덜미를 만지고 싶다. 디즈니 이 잔인한 놈들, 이렇게 귀여운 캐릭터를 인형과 스티커로 만들어서 팔려는 수작을 누가 모를 줄 알아. 나만 당할 수 없다. 여러분 주토피아 보세요. 아이랑 손잡고 가서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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