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을 바꾼 음반 한 장
Dream Theater 신보 소식
Dream Theater가 신보 The Astonishing를 발표했다. 음반 커버부터 화려한 이 작품은 2CD에 컨셉트 앨범이라는데, 사뭇 기대가 크다.
음반 한 장으로 삶이 바뀌었다는 말은 거짓일 테다. 한 사람의 삶은 무수히 많은 사건과 사물과 부딪쳐가며 만들어지니까. 관 뚜껑이 닫히기 전에 그 사람의 인생이 또 어떻게 변할지 누가 안담. 그럼에도 인생을 바꾼 음반을 1장만 꼽으라고 말하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Dream Theater(이하 'DT')의 5번째 정규 앨범 「Metropolis Pt. 2 : Scenes From a Memory」라고 답할 것이다. 여기서 '것이라'라고 말한 이유는, 아직은 그 누구도 저런 질문을 던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남의 취향에 별로 관심이 없다. 역시 아무도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오늘은 2년만에 새로운 앨범을 낸 DT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2CD에 두툼한 가사집, 아이도 신남
현재 나는 두 돌 아이를 둔 아빠다. 출퇴근길에는 곰 세마리와 반짝반짝 작은 별 그리고 모여라 딩동댕 엔딩송을 흥얼거리지만 한때는 메탈 키드였다. 초등학교 때는 터보와 젝스키스를 좋아했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댄스 음악을 즐겨 듣는다는 건 존재 증명이라는 면에서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에 교복을 입고 나서는 다른 음악을 찾아 듣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뒷골목 소년들이라든가 서쪽 삶 같은 남자 보컬 그룹을 좋아했지만, 당시 대세였던 Limp Bizkit을 알게 되었다. Nookie 이외에는 딱히 들을 만한 곡이 없었지만, 앨범을 사서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들었다. Offspring이라든지 Megadeth, Helloween 등 장르 가리지 않고 유명한 밴드라면 일단 사고 봤다.
그 시기에 마침 DT의 5번째 앨범이 나왔다. 민족주의자였던 나는 베이스 멤버인 존 명이 한국계라는 사실을 듣고 테입이 아니라 무려 CD를 사버렸는데, 아니 웬걸. 대박이었다. 70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 숨소리 한 번 제대로 낼 수 없었다. 압도적이었다. 음반이 한 번 다 돌고 나서는, 일어서서 기립 박수를 쳤다. 눈물도 찔끔, 흘렸다. 방 안에 홀로 틀어박힌 상황이라 그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궁상맞은 짓이었지만, 왠지 저렇게라도 해야 할 듯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지금도 ‘safe in the light that surrounds me’라는 내레이션이 나오면 가슴이 벅차 오른다.
DT를 알고부터는 내 삶이 달라졌다. 중학생 때부터 본격적으로 CD를 사 모으기 시작했다. 돈은 매번 부족했다. 문제집 살 돈의 일부를 횡령해서 CD 사는 데 댔다. 삶에서 몇 번 없었던 일탈 중 하나였다. DT의 정규앨범을 샀고, 라이브를 샀고, EP를 샀다. DT를 다룬 잡지도 모았다. 고등학교에 가서는 학교 밴드부 문을 두드렸다.
“이곳이 열심히 연습하면 DT 곡을 카피할 수 있다는 그곳인가요. 저는 조던 루데스처럼 되고 싶습니다.”
“아니. 무한궤도의 ‘그대에게’ 정도는 연주할 수 있지.”
DT를 카피할 수 없다는 좌절감 때문에 딱 무한궤도의 ‘그대에게’ 한 곡만 합주하고 밴드부를 탈퇴했다. 대학생이 되고나서는 이들의 내한 공연도 찾았다. 하숙생 시절 한달 생활비의 절반에 해당하는 88,000원을 티켓 값으로 치르고 보름을 편의점 삼각 김밥으로 때웠다.
2008년 1월 12일 토요일. 스탠딩보다 좌석이 먼저 마감되는 메탈 밴드라니, 해괴하다 생각하며 악스홀로 갔다. 혼자는 아니었다. DT를 좋아하는 친구 한 명이 있었는데 우리는 내한 소식을 뒤늦게 안 탓에 스탠딩 구역이었고, 입장 번호도 1,200번대였다. 입장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서 그 친구와 국밥에 소주 한 병을 나눠 마시고 적당히 얼큰한 상태로 공연장으로 들어갔다. 다행히도 악스홀은 크지 않았다. 1,200번대로 입장했지만 내 눈과 무대까지 거리는 가까웠다.
Wacken Open Air(유럽의 유명한 메탈 페스티벌)를 머릿속에 그리며 갔지만, DT의 라이브는 좀 특이했다. 메탈 밴드 공연이라 하면 슬램, 헤드뱅잉, 바디서핑 등 팬들이 과격하게 몸을 흔들며 노는 장면을 연상할 테지만 DT 공연은 전반적으로 차분했다. 일부 팬 - 아마도 DT를 잘 모르지만 내한 공연은 즐겨 가는 사람 - 이 앞자리에서 헤드뱅잉을 시도하긴 했다. 그러나 DT 특유의 변박은 헤드뱅잉에 어울리지 않는지라, 그들은 흠칫 흠칫 놀라다 이내 헤드뱅잉을 포기했다. 심지어는 "거참, 우리 이제 모두 앉아서 편하게 좀 감상합시다."라고 말하는 팬도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DT 팬들 대부분은 '으음, 역시 DT군' 하는 표정으로 진심 행복해하고 있었다. 스탠딩 구역에서 눈을 감고 감상하는 사람도 있었으니, 청각만으로 청중을 압도하는 콘서트라 할 만했다.
그날 콘서트가 상징하듯, DT 음악은 홀로 감상하기에는 참 좋지만 함께 어울리기에는 약간 모자란 면이 있었다. 이점이 바로 내 인생을 크게 바꾸어 놓았는데, 사연은 이렇다. 중학교 때부터 DT를 비롯한 몇몇 밴드 음악을 듣는 것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노래방에 갈 때 생겼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 노래방은 여성과 남자가 모이는 사교장이었다. 여남공학이라고는 고등학교 하나이고, 나머지는 죄다 여중여고와 남중남고로 이뤄진 학군에서 자란 탓에 학교간 미팅이 종종 이뤄졌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입시 압박이 별로 없었던 1학년 신분이라 미팅은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한 여학교와 미팅이 잡혔다. 우리에게는 필살기가 있었다. 4대천왕 중 한 명이 바로 내 친구였다. 나머지 참석자도 스스로 생각하기에 그다지 꿀릴 것 없는 외모라 자신했다.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문제는 장소였다. 미팅 장소가 노래방으로 정해졌다. 여기서는 노래 잘 부르는 게 잘 생긴 외모만큼이나 중요했다. 나는 노래를 못했다. 아니, 아는 노래가 없었다. 그래서 안 불렀다. 대신 다른 친구들이 댄스와 발라드를 적절히 섞으며 분위기를 띄웠다. 한 번씩 차례가 다 돌고, 두 번 돌고도 나는 부르지 않았다. 상대편에서 한 명이 와서 내게 마이크를 주고 갔다. 슬며시 마이크를 딴 친구에게 넘겼다. 그런 과정이 몇 번 반복되고, 더 마다하지 못하는 상황이 됐을 때 결국 나는 번호를 눌렀다. 내 차례가 되고, 이윽고 노래방 기기 화면에는 글자가 떴다.
Pull me under
저건 무슨 노래지? 다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봤다. 위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도입부가 다소 길다. 이 음악 말고 DT 노래 대부분이 그렇다. 러닝 타임 10분에, 인트로 2~3분이 기본이다. 간주가 다소 길어진다 생각한 친구는 마디 점프를 대신 눌러줬다.
“Lost in the sky, 켁켁.”
Pull me under(남무성 저자의 『Paint it rock』 표기대로 ‘풀밑언덕’으로 기억하면 외우기 쉽다)는 혼자서 흥얼거리기만 했지 노래방에서 부른 건 저 때가 처음이었다. 반주가 길어서도 문제였지만 더 심각한 것은 듣기와는 달리 보컬 라브리에 음이 고음라는 사실이었다. 내가 소화할 수 있는 음역대가 아니었다. 대참사였다. 다행히도 친구가 더 망신 당하기 전에 곡을 껐다. 그리고 날 데리고 화장실로 갔다.
"야 임마. 엄한 노래 부르지 말고 가요를 부르란 말이야, 가요를."
자리로 돌아왔더니,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감미로운 발라드가 흐르고 있었다. 흐르는 음악 속으로 4대천왕의 외모는 빛났다. 곧이어 댄스와 발라드가 적당히 섞이면서 또 다시 내 차례가 왔는데, 그래 나도 연애 좀 해 보자, 는 생각으로 한국 음악을 선곡했다. 아는 곡이 있긴 했다. 바로 cryingnut의 '말 달리자'. 10대 피 끓는 남학생에게는 가사에서 거듭 반복되는 '닥쳐'라는 말이 굉장히 멋있게 느껴졌다. 상대편은 아니었나 보다. 노래가 구리다 생각했는지, 그 곡이 끝나자마자 몇 명이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로 나가더니, 남은 몇 명도 전화를 받고는 나갔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만남을 위해 필요한 휴대폰 번호를 비롯한 개인정보는커녕 유리구두 한 짝도 남기지 않은 채로 말이다.
상황은 내게 불리했다. 그때까지 소개팅, 미팅에서 단 한 차례도 에프터를 받지 않은 적이 없었던 4대천왕은 자존심이 크게 상했다. ‘풀밑언덕’과 ‘닥쳐’가 그의 높은 콧대와 백옥 피부를 산산조각 낸 셈이었으니, 그를 비롯한 미팅 참가자들은 날 타박했다. 덕분에 그 미팅은 고등학교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미팅이 되어버렸다. 나머지 친구들은 미팅이 있는 날이면 나를 교묘히 따돌렸고, 그런 상황은 졸업 이후에도 이어져 클럽이나 나이트 갈 때도 나는 철저히 소외되었다. 이 모든 게 DT 때문이었다.
여성 만날 기회가 없다 보니 남중남고 인생에서 연애 경험은 전무했다. DT 모르는 여성과 만나서 뭐하겠어, 하는 마음 가짐으로 살아서 대학에 가서도 연애다운 연애가 없었다. 졸업하기 직전에 기적적으로 한 여성을 만났고 결혼까지 성공했는데 그런 면에서 DT는 우리 결혼을 있게 한 장본인이다.
뭐 여하튼, DT가 낸 새 앨범 「The Astonishing」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사놓고 아직 듣지는 못했다. 듣지 않아도 안다. 그들은 충분히 좋은 음악을 만들어냈을 테다. 더구나 이번에는 5집 앨범처럼 컨셉트 앨범이라니, 사뭇 기대가 크다. 해설에는 컨셉트 앨범이 아니라 스토리 앨범이라고 하는데, 무슨 차이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집에서는 곰 세마리나 반짝반짝 작은 별이나 모여라 딩동댕 엔딩송을 들어야 한다. 참고로 아내는 DT 음악을 싫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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