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걷기

서로의 속도에 맞추어 느긋하게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생각한 대로 몸을 움직이고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점점 얌전하고 느긋한 인간으로 만들었다. 서두르거나 욕심을 부릴 수 없으니 묘하게 겸손해졌다.

편집.gif

 

평소에 횡단보도를 건널 때는 그런 적이 없는데 차 안에 있을 때는 보행자 신호가 길다는 느낌을 종종 받았다. 노약자들도 건너야 하니까, 라고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약속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거나 길이 막힐 때는 길다, 길다, 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물론 보행자일 때 나는 신호등의 숫자가 한 자리로 줄어들거나 초록색 바가 뚝뚝 떨어지는 순간에도 용감하게 뛰어들어 건너곤 했다. 아슬아슬함을 즐기는 건 아니지만 가만히 서서 다음 신호를 기다릴 정도로 느긋한 성격도 못되어서이다.


임신해서 배가 많이 나온 뒤로는 신호 중간에 뛰어드는 짓 같은 건 못하게 되었다. 6개월에 접어들었을 때부터 만삭이냐는 얘기를 숱하게 들을 정도로 남달랐던 포스의 몸이라 신호가 바뀜과 동시에 걷기 시작해도 길 건너편에 겨우 도착할 때가 많았다.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앉았다가 일어설 때도 움직임이 느리고 공간을 많이 차지해서 사람들이 붐비는 곳에서는 자주 거치적거리는 존재가 되었다. 생각한 대로 몸을 움직이고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점점 얌전하고 느긋한 인간으로 만들었다. 서두르거나 욕심을 부릴 수 없으니 묘하게 겸손해졌다.


누군가 옆을 빠르게 스쳐지나갈 때마다 나는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아이들이나 무릎이 아파 느리게 걸을 수밖에 없는 노인들, 안내견과 함께 이동하는 시각장애인이나 휠체어를 사용해야 하는 장애인들의 고충에 대해 어렴풋하게 짐작했다. 그리고 다시 예전의 몸으로 돌아가게 되더라도 조금 느리게 걷고 천천히 움직이며 살자고 생각했다.


우리 모두는 한때 노약자였고 누구라도 노약자가 될 수 있으며 실제로 늙어가고 있는 중이니까.

 


[관련 기사]


- 여자의 배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메슥거림 (2)
- 하지 않을 용기
- 무리와 조심 사이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2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서유미(소설가)

2007년 문학수첩 작가상을 받으며 등단. 같은 해 창비 장편소설상을 탔다. 장편소설 『판타스틱 개미지옥』 『쿨하게 한걸음』 『당신의 몬스터』를 썼고 소설집으로 『당분간 인간』이 있다. 에세이 『소울 푸드』에 참여했다."

오늘의 책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모디아노의 신작 소설

‘우리 시대의 프루스트’ 파트릭 모디아노.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문학세계를 정의한 장편소설이 출간됐다. 주인공 보스망스는 놀라울 만큼 작가의 실제와 닮아 있다. 유년시절 추억의 장소에서 기억의 파편들이 발견하면서, 그 사이사이 영원히 풀리지 않을 삶의 미스터리를 목도하는 소설.

AI와 공존하는 시대

IT 현자 박태웅이 최신 AI 트렌드와 인사이트를 담은 강의로 돌아왔다.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인공지능 6대 트렌드를 제시하고, 그에 따른 잠재적 위험과 대처 방안까지 담았다. 인공지능과 공존해야 할 미래를 앞두고 우리는 어떤 것을 대비해야 할까? 이 책이 해답을 제시한다.

일본 미스터리계를 뒤흔든 최고의 문제작

『명탐정의 제물』 이후 일본 미스터리 랭킹 상위권을 놓치지 않는 시라이 도모유키의 신작. 독보적인 특수설정 1인자답게 이번 작품 역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기괴한 죽음 속 파괴되는 윤리성, 다중추리와 치밀한 트릭 등이 복잡하고도 정교하게 짜여 있다. 보기 드문 매운맛 미스터리.

우리가 먹는 건 독이었다

초가공식품이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 대개 햄버거 등 패스트푸드를 떠올릴 텐데, 초가공식품의 범위는 훨씬 방대하다. 유기농 식품도 초가공식품일 수 있다. 이 책은 우리 식탁 위를 점령한 초가공식품을 정의하고 그 위험성을 고발한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 실은 독이었다.


PYCHYESWEB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