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최민석의 영사기(映思記)
신사의 덕목 <킹스맨>
도대체 신사란 누구인가?
누구하나 알아주는 이 없는 고독한 삶이지만, 스스로 품격을 잃지 않기 위해 지치지 않고 꾸준히 자신을 가꾸고, 내면을 다스리는 것, 그리고 하나를 덧붙이자면, 모든 것에 웃으며 인내할 줄 아는 것. 이것이 신사의 길이 아닌가 싶다.
지난 2주간 극장에서 <서유기>와 <폭스캐처>, <킹스맨>을 봤고, DVD로 <킬러들의 도시>를 봤다. <서유기>는 나의 고질병인 ‘극장 내 기면증’에 의해 몇 번 졸다보니 끝나버렸고, <폭스 캐처>는 함께 간 음악 평론가가 옆 자리의 젊은 아가씨와 역동적인 논쟁을 벌인 바람에 결국엔 ‘거, 참. 사는 게 쉽지 않군’ 하는 생각 밖에 남지 않았다. <킬러들의 도시>는 나의 또 다른 고질병인 ‘소파 위 기면증’에 의해 또 숙면을 취하고 말았다. 지난 3개월간 오로지 역사로만 장식된 유럽에 있다 돌아온 터에, 마침 또 영화 속에서 유럽 거리를 보니 어쩐지 긴장감이 사라져 그만 곯아떨어져버린 것이다.
이런 소거법에 의해 결국 <킹스맨>에 대해 쓸 수밖에 없게 됐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 영화 역시 배경이 유럽이었다. 결국 ‘거, 참. 유럽은 피할 수 없게 됐군’ 하며 이번에야 말로 정신을 차리고 봤는데, 영화를 보고 나오니 머릿속에 남는 생각은 ‘신사에 필요한 덕목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점이었다.
영화에서 ‘킹스맨’이라는 비밀첩보조직에 속한 콜린 퍼스는 얼핏 보기에도 신사다. 아름다운 선의 양복을 입고, 간결한 화법을 구사하며, 어떤 것이 좋은 술인지 알고 있다. 물론 영국식 영어를 구사하며, 전통을 지키지만 구습에 대해 항거할 줄도 안다. 이런 항목이야 아무리 늘어놔봐야 자수(字數)를 채워 원고료나 챙겨보겠다는 속셈에 지나지 않으므로, 필자가 진정으로 주목한 것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콜린 퍼스는 고독을 다룰 줄 알았다. 물론, 영화가 그의 연애사나, 현재 가족 상태에까지 시시콜콜하게 설명해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일반적인 상식을 가진 관객이 이해하자면, 그는 독신남이었다. 한때 언론학을 전공했던 필자로서, 저널리즘적 접근법으로 그의 행적을 파헤쳐보자면 그는 97년 중동에서 작전을 실행할 당시, 이미 40대의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노안이었을 가능성을 고려하여 그가 당시 삼십대 후반이라 해도, 2015년 현재 그는 오십대 초중반이 된다.
결국, 그는 오십대 중반의 독신남을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혹은 이때가 될 때까지 독신으로 살아온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결코 ‘아아, 이거 외로워서 첩보원 짓도 못 해먹겠군’, ‘이제 고독이 몸에 이끼처럼 달라붙어서 임무는 수행 못하겠어’ 따위의 대사를 읊지 않는다. 물론, 그가 중간에 가정을 이뤘다 돌아왔다거나, 끔찍하게 사랑했던 여인으로부터 절교를 당했을 수는 있지만, 적어도 2015년의 킹스맨 첩보원으로 활동하는 그는 ‘고독 따위는 신사의 동공에 자리할 수 없어!’라는 듯이 강직한 눈빛으로 상대를 제압하고, 강인한 어투로 상대의 도발에 대응한다. 나는 영화를 보며 ‘아! 신사란 저런 자구나!’하며 감탄했다.
물론, 혼자 영화를 보러 간 나의 우측 커플은 영화의 서사와 상관없이 포옹을 했고, 좌측 커플은 쪽 쪽 거리는 입술끼리의 마찰음을 냈지만, 나는 신사답게 그런 것쯤엔 개의치 않고 보았다. 간혹 ‘어이. 거긴 만지지 말란 말이야!’하고 말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지만, 고독의 무게는 1그램도 허용하지 않는 콜린 퍼스를 떠올리며 과묵한 신사가 되는 길을 택했다.
그나저나, 런던처럼 비가 잔뜩 내리고, 음식이 맛없는 곳에서 고독을 다루는 신사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때론 헝클어진 머리에 무릎이 튀어나온 청바지를 입고 외출을 하는 게 인생의 맛인데, 매번 수트를 챙겨 입고 머리를 넘겨 빗어 나서면 지치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런던이니까 결국은 어떨 땐(아니, 상당히 여러 번) 수트를 입은 채로 ‘피쉬 앤 칩스(감자와 생선 튀김)’을 먹고, 맥주를 마셔야 하는 아이러니라니. 게다가, 광을 낸 구두와 잘 다려진 양복을 입고 어떨 땐(아니, 거의 일상처럼) 옷차림을 조롱하듯 퍼부어대는 비라니. 누구하나 알아주는 이 없는 고독한 삶이지만, 스스로 품격을 잃지 않기 위해 지치지 않고 꾸준히 자신을 가꾸고, 내면을 다스리는 것, 그리고 하나를 덧붙이자면, 모든 것에 웃으며 인내할 줄 아는 것. 이것이 신사의 길이 아닌가 싶다.
물론,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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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