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홍준호의 구식이 아니라 클래식
스님과 불자, 혹은 어머니와 아들 윤용규 감독의 <마음의 고향>
그리운 맘 님에게로 어서 달려가 보세
한국영화가 이 작품을 필두로 몇 번씩 원점으로 돌아가지 않고 꾸준히 기세를 이어왔다면, 우리가 흔히 <살인의 추억>, <올드보이>, <지구를 지켜라!>, <장화, 홍련>이 한 해에 나왔던 ‘2003년의 르네상스’ 류의 순간들을.. 혹은 박광수, 이명세, 장선우 등의 코리안 뉴 웨이브의 태동을 좀 더 일찍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말이다.
분명 독약 같은 말인데, 가끔 묘하게 수긍하게 되는 말들이 있다. 내겐 그 중 하나가 바로 '우리나라 문화재지만, 차라리 외국에서 관리하는 게 나아 보인다' 다. 자신이 살고 있는 국가가 얼마나 모자라는지를 드러내는 말인데, 끝내 묵묵히 수긍하게 되는 나를 보게 된다. 문화재의 예시로 영화를 얘기해 보자면, 90년대 작품들의 원본 네거티브도 유실되는 판이었으니 말이다. 당연히 50년대 이전의 작품들은 2000년대 이전에는 아예 영상의 형태로 본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문화재는 곧 ‘보존’인데, 우리에겐 그 개념이 없었다. 지금에 와서야 생긴 셈이다.
이런 점에서 윤용규 감독의 1949년작인 <마음의 고향>은 한국영화치고 상당히 운이 좋았다. 개봉한지 1년만인 1950년 4월에 프랑스의 영화사인 프란시 날프 사의 제안으로 '필름 교환'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전 해에 개봉했던 <마음의 고향>은 6월 1일부터 5일까지 스카라 극장의 전신이라 일컬어지는 서울 수도 극장에서 깜짝 재개봉을 하고, 프랑스로 날아간다. 한국에서는 프란시 날프 사가 준 <꿈 속의 노래> 라는 작품이 남았다. 필름 복사? 그런 거 없다. 7~80년대 까지도 한국은 복사본이 아니라 원본 필름을 외국 영화제 쪽에 제출하곤 했다.
그리고 작품이 프랑스로 간 지 몇 주 뒤, 한국은 일제강점기 벗어나고 뭐가 또 급했는지 한 번 더 지옥행 급행열차에 탑승하게 된다. 종착역은 6.25 였다. 나운규 감독의 1926년작인 <아리랑>의 필름이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에 있었는데 이 전쟁으로 사라졌다는 소문도 들리고, 무엇보다도 윤용규 감독이 전쟁 기간 중에 월북을 한다. (이 작품에 관한 김종원 영화평론가의 글에서는 윤용규 감독은 딱히 정치, 사상적인 작품을 만들지 않았는데 어째서 월북했는지 알 수가 없다고 기록돼 있다.) 한 나라가 둘로 갈린 시점에서 감독의 월북, 군인 출신 대통령의 공안정치가 90년대 초까지 계속됐다는 걸 감안하면, <마음의 고향>이 프랑스로 넘어간 것은 확실히 행운이었다. 보존될 수 있었으니까. 비록 그로 인해 한국의 관객들이 이 작품을 볼 기회가 꽤 오랜 시간 동안 없긴 했지만 말이다. 작품은 30년대에 발표된 함세덕 작가의 아주 유명한 희곡, <동승>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그 결과, 한국 최초로 불교를 이야기하는, 더불어 아들을 잃은 한 미망인(최은희)과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동자승(유민)이 대화를 나누며 모자의 정을 느낀다는 ‘참 드문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극장가에 당도했다.
이 작품은 여배우 최은희의 가장 젊은 시절을 볼 수 있다. 최은희의 자서전에 쓰여진 대로 그녀가 1930년생이었다면 이 작품에 그녀의 나이는 19세였을 것이다. 하지만 몇몇 자료들을 찾아보면 그녀는 1926년, 혹은 1927년생으로 되어 있다. 아마 이 쪽이 더 맞을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우리는 20대 초반의 최은희의 모습을 보게 되는 셈이다.
기록 상으로 보면 그 열악한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영화계에는 꽤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제작됐음을 알 수 있다. 딱 하나 제작 금지된 장르가 있었다면, 그건 당연히 독립에 대한 이야기였다. 사전검열이 존재했던 시대에 나운규, 혹은 이규환 감독이 그 주제로, 혹은 그 함의가 포함된 작품을 만들어서 얼마나 많은 감시와 검열의 수난에 휩싸였었던가. 이런 이유로 일제가 패전한 후에 영화계에는 독립과 관련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다시피 했다. 해방 이후라는 시기를 생각할 때, 독립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지 않아서 일면 <마음의 고향>이란 작품이 가볍게 다뤄질 수도 있겠다. 허나 내겐 그 시대에도 이렇게 고요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해방 후의 혼란스러운 현실이 되려 이런 작품이 나와주기를 유도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이야기를 만들 ‘감성’이 당대의 감독들에게 남아 있었던 셈이다.
물론 <마음의 고향>은 함세덕 작가의 <동승>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다시 한 번 체감시키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말은 작품이 원작에 비해 ‘영화적인 이야기’ 로서 딱히 새로운 부분이 없다는 얘기다. 물론 작품 나름대로 각색을 한 측면들도 있다. 도성이 미망인을 위해 살생을 할 때 어떤 짐승을 잡느냐의 차이, 혹은 원작에는 없었던 어머니 캐릭터가 이 작품에서 직접 얼굴을 비추는 정도다. 하지만 그로 인해 작품이 원작과 구분될 정도로 새로워 지지는 않으며, <동승>을 접한 분이라면 <마음의 고향>이 어떻게 진행될지 뻔히 알게 된다.
뻔한 종교영화로 보지 않게 하는 유려한 영상작법
이 작품의 매력은 다른 데 있다. <마음의 고향>이 개봉하기 전 해, 한국에는 윤대룡 감독의 <검사와 여선생>이라는 ‘무성영화’가 개봉했었다. 이미 훨씬 전부터 한국 역시 열악하지만 ‘동시녹음’으로 만들어진 작품들이 여럿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 되려 영화형식의 후퇴가 이뤄진 것이다. 해당 감독의 미학적 선택이었다고 보기는 힘들며, 해방 직후인지라 영화기자재가 좋지 않았던 이유가 결정적이었다. 사실 연도의 기준으로만 보자면 <마음의 고향> 같은 작품들이 아무렇지 않게 만들어져야 옳았다. 그러나 당대의 역사가 예술의 발전을 저해하고 다시 제자리에서 시작하게 만들었다. <마음의 고향>은 빈곤한 시대의 틈바구니 속에서 핀트가 어긋난 렌즈와 일제가 쓰고 버린 낡은 촬영기들을 가진 채, 놀라운 시청각적 성취를 거두고 있다.
촬영 당시 예산 문제 때문에 세트 촬영을 거의 하지 못한 이 작품은 실제 산사에 들어가 로케이션 촬영을 했으며, 조명 또한 많이 쓰지 않은 채 대부분의 영상을 흑백 자연광으로 담아냈다. 조명을 비롯해서 전체적인 통제가 가능한 세트와 달리, 야외 촬영은 기본적으로 변수를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굳이 시기를 감안하지 않더라도 놀라울 정도의 안정감과 유려함을 보여준다. 예전 한국영화들을 보며 가장 불만족스러웠던 순간은 예전 TV 드라마를 보는 듯한 촬영, 음악, 연기. 그러니까 지나칠 정도의 평범함과 단조로움으로부터 나왔다. 그런 점에서 이미 반세기를 한참 넘어선 <마음의 고향>의 유려함은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예전 한국영화에서 가장 결여됐었고, 또 기대하기도 힘들었던 비주얼 스토리텔링을 원숙하게 선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은 미망인을 자신의 잃어버린 어머니에 대입시키는 도성의 애틋한 마음을, 대사보다 시각적 매개체를 통해 관객에게 표현하려 한다. 이를테면 작품 속에서 도성이 미망인의 방에서 커다란 털부채를 바라보는 순간이 있는데, 그것이 곧 부채를 부치는 미망인의 모습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그렇다. 여기서 부채로 넘어갔을 때 카메라가 뒤로 물러나며 미망인의 전체 모습을 잡는다던지, 작품 전체에서 자주 활용되는 디졸브와 아이리스 인, 심지어 도성의 꿈을 표현하기 위해 원시적이지만 광학 특수 효과까지 이용하는 모습을 보면 관객으로서도 한 가지 확신이 든다.
아. 이 작품은 최소한 ‘카메라가 있고 절이 배경이니 그저 찍는다’, 혹은 ‘소리가 들리니 담아낸다’, ‘예산이 없으니 그냥 로케이션을 한다’ 라는 일차원적인 관념에서 벗어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구나 하는. <마음의 고향>은 어머니를 찾으려 절을 벗어나 세상에 선 도성과도 같은 입장에서 만들어 졌다. 폐허가 됐으면 됐지, 더 나아진 건 하나도 없는 땅 위에서 한국영화는 새롭게 시작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작품은 폐허 위에서 우리는 이 정도의 기초를 다져 놨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당대 사회에 인식시킨다. 물론 아랑곳하지 않고 한국사회는 몇 번씩 영화(뿐만 아니라 많은 부분들도 포함될 것이다.) 를 황무지로 도로 되돌려 놨다. 뭐 좀 하려고 할 때마다.
<마음의 고향>은 다행히, 혹은 참 아이러니하게도 고국이 아닌 외국에 간 덕에 살아남았다. 1993년에 처음 프랑스에서 16mm 필름 프린트를 기증받은 것을 시작으로, 2005년 일본에서 기적적으로 상당히 깨끗한 상태의 35mm 원본 네거티브를 발견해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됐다. 작품은 한국의 근대문화재로 지정됐으며, 이제 마음만 먹으면 VOD, DVD를 통해 쉽게 볼 수 있다. 이 작품의 생존은 ‘40년대의 거친 토양 위에서 이런 꽃을 피웠더라’ 는 기록으로서, 후대의 관객에게 많은 감탄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동시에 아쉬움도 생긴다. 한국영화가 이 작품을 필두로 몇 번씩 원점으로 돌아가지 않고 꾸준히 기세를 이어왔다면, 우리가 흔히 <살인의 추억>, <올드보이>, <지구를 지켜라!>, <장화, 홍련>이 한 해에 나왔던 ‘2003년의 르네상스’ 류의 순간들을.. 혹은 박광수, 이명세, 장선우 등의 코리안 뉴 웨이브의 태동을 좀 더 일찍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말이다. 아마 한국에서 예술을 논한다면 이런 주장은 과거에 몇 번이고 했을 것이며, 앞으로도 몇 번을 다시 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P.S. - 현재 이 작품의 리메이크작인 박영철 감독의 <내 마음의 고향> 이 개봉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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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에서 전혀 유명하지 않은)파워블로거, 대학졸업생, 딴지일보 필진, 채널 예스에서 글 쓰는 사람. 혼자 작품을 보러 다니길 좋아하고 또 그런 처지라서 코너 이름을 저렇게 붙였다. 굳이 ‘리뷰’ 라고 쓰면 될 걸 뭐하러 ‘크리티끄’ 라고 했냐 물으신다면, 저리 해놓으면 좀 고상하게 보여서 사람들이 더 읽어주지 않을까 싶어서다. 이거 보시는 분들 글 마음에 드시면 청탁하세요. 열과 성을 다해 써서 바칠께요. * //sega32x.blog.m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