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와의 인연
야구와 나는 무슨 인연인가. 아마도 고등학교 체육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뻥 소리와 함께 시계 반대방향으로 달려 베이스에 안착했다. 배트 대신 한쪽 발을 내밀고, 주먹만 한 공 대신 피구 공을 날리는 일종의 소프트볼이었다. ‘공이 날면 뛴다’는 규칙을 처음으로 이해한 날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야구를 처음 안 건 남동생이 어린이 야구단에 가입한 날이었다. 여아용 유니폼은 아예 없었다. 나는 야구가 뭔지도 몰랐으면서, 한동안 삐죽 입을 내밀고 토라져버렸다.
첫 만남이 좋지 않아서인가, 나는 야구를 마주할 때마다 조금 비뚤어진 질문을 내뱉는다. 전후반도 아니고, 쿼터제도 아닌, 아홉 번씩이나 순서를 돌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게다가 봄부터 늦가을까지 세 계절을 꽉 채워 이어진다. 일주일에 단 하루만 빼고 경기는 계속된다. 정말, 매일 야구를 봐야 하는 건가? 시즌이 끝나면 동계 합숙 훈련까지 해내는 야구선수들은 도대체 언제 쉬는 걸까? 일 년에 며칠이나 가족과 함께 보낼까? 이 모든 게 우매한 질문이라는 걸 잘 안다. 돌아올 답은 언제나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야구가 미치도록 좋다고 말하는 이들의 눈에는 별이 들어와 빛나고 있다.
나는 또 묻는다. 도대체 야구란 무엇이며, 뭐가 그리 좋으냐고.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에서도 안테나를 콧구멍까지 빼어 들고 중계를 챙겨볼 정도로 중요하며, 응원하는 팀의 일희일비에 따라 술 취해 웃고 울 정도는 아니지 않느냐며 비꼰다. 그들은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마치 사랑이란 무엇이며, 사랑은 왜 하는 거냐고 물은 것 같다. 말문이 막힌 채 눈동자만 진지하게 깊어져 간다. 그래, 당신 정말 야구를 사랑하는구나.
살며시 고백하건대, 나는 특별한 애정도 없으면서 모 프로 팀의 선수 별 응원가와 타순을 줄줄 외우고 있다. 그 구단이 12년 만에 우승했을 때에 어느 아버지와 아들은 끌어안고 울었다고 한다. 그들은 백과사전처럼 년도 별 성적과 선수들의 프로필을 읊을 수 있다. 야구라면 열 일 재치고 챙겨야 하며, 야구 이야기로 분위기가 살아나는 집으로 나는 시집을 갔다. 응원하는 팀이 수도권 원정을 올 때마다 예매 전쟁을 뚫는 데에 동참해야 했다. 전설로 불리던 선수가 은퇴하던 날엔 온 가족이 KTX를 타고 은퇴 경기를 보러 가기도 했다. 그날 우리 집 남자들의 눈에서 무언가 별처럼 반짝이는 걸 보았다.
경기장에 앉아 있으면서 사실상 경기를 열심히 본 적은 없다. 경쾌한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공과 뒤바뀌는 전광판의 숫자들 사이에서 나도 옆 사람들과 비슷한 것을 하며 9회까지 버텼다. 식어가는 치킨이나 족발, 햄버거, 떡볶이 따위가 동지가 되어 주었다. 이때 마시는 야구장 맥주는 마약이라도 탄 듯 했다. 배도 부르지 않고 감칠맛 났다. 나는 적당히 응원해가면서 맥주 마시는 재미에 푹 빠져 야구장을 드나들었다.
변화무쌍 삿포로 돔
삿포로에 온 지 일 년이 다 되도록 야구장에 갈 일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완전한 마음으로 가을을 맞이할 수 없어 보였던 남편을 위해 삿포로 돔을 찾았다. 이대호 선수가 활약하고 있는 후쿠오카의 소프트뱅크 호크스와 홋카이도의 니폰햄 파이터스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지하철 출구를 나서자 비행접시처럼 생긴 돔 경기장이 은빛으로 노을을 반사하고 있었다.
삿포로 돔의 변신 기술은 실로 놀랍다. 공기부상 방식으로 거대한 천연 축구장이 공기압에 의해 7.5cm 부상하고, 34개 바퀴로 1분당 4m씩 이동한다고 한다. 바깥으로 옮겨진 구장은 햇빛과 비를 맞으며 자라고 관리된다. 그동안 실내에선 야구, 레이싱, 콘서트 등이 열리고, 겨울엔 노르딕 스키장으로 변하기도 한다.
경기장에 들어서서 본 야구장은, 해외 스포츠 뉴스에 나오던 모습 그대로였다. 오각형 모양의 밝은 초록색 인조 잔디가 깔려 있었다. 이곳이 다른 용도로 어떻게 변하는지, 한 눈에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 불현듯 어느 여름날의 잠실 구장이 떠올랐다. 홈팀이 앉는 1루보다 해가 늦게 지는 3루 쪽에 앉아야 하는 원정 팀 응원단은 단체로 구워지고 있었다. 자리가 뜨겁게 달궈질수록 사람들은 타오르듯 소리지르고 노래를 했다. 그날 나는 더위를 먹고 때아닌 여름 감기로 며칠을 고생했다.
홋카이도 니폰햄이 승리를 이끌고 이대호 선수가 4번 타자로 뛰었음에도, 7회가 끝나기도 전에 경기장을 나왔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왔다. 야키소바와 닭튀김을 사기 위해 삼십 분 정도 줄을 섰고, 화장실에서도 긴 줄을 섰고, 기념품 매장에선 사도 되는 것과 사지 말아야 할 것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해 진을 뺐다. (그것들은 야구 기념품이라 하기엔 너무 귀여웠다.) 마침내 식은 야키소바와 닭튀김을 먹을 수 있었을 무렵 경기가 시작됐다. 2회 정도 지났을 무렵, 이 야구장엔 무언가 빠지지 않았나, 하는 느낌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유니폼에 연간 회원권 목걸이를 걸은 중년들이 응원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일본에 살며 여러 종류의 젊은 ‘오타쿠’를 보았지만, 야구의 오타쿠는 단연 중년이었다. 원정 경기를 위해 비행기 표를 끊고, 동계 훈련 때에는 오키나와까지 찾아가는 열혈 중의 열혈이었다. 그들은 팀의 연보 앞에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여유롭게 맥주를 마시고, 간간이 깃발을 흔들며 자신의 취미생활을 영유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공격 순서가 되면 북을 치고 트럼펫을 불며 한목소리로 응원가를 불렀다. 그런데 신이 나기는커녕 나는 650엔(약 6천 원)이나 하는 맥주를 세상에서 가장 맛없게 마시며 졸고 있었다. ‘멀리 날려라’ 라든가, ‘나가서 싸우자’ 등의 단정한 응원가가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구수한 욕설이나 찝찌름한 오징어 냄새, 휘날리는 신문지와 두루마리 휴지, 뒤집어쓸 비닐봉지 같은 건 없었다. 전화 한 통에 자리까지 배달해주는 족발이나 매운 떡볶이가 먹고 싶어졌고, 같은 팀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용서되는 시큼한 땀 냄새가 그리워졌다.
일찌감치 삿포로 돔을 나서며 풀리지 않는 질문을 또다시 떠올렸다. 그렇다면 이곳의 당신들은, 왜, 야구를 좋아하는가?
당신이 야구를 사랑하는 이유
혹자는 야구를 인생에 비유한다. 그 심오한 말에 깊은 동의를 하지는 않는다. 나에게 야구는 이것은 공이요, 저것은 배트며, 글러브로 공을 잡지 않으면 다칠 수 있다는 것 정도다. 그래도 야구장에선 응원가를 따라 부르고, 포물선을 그리는 공에 함성을 지른다. 그날은 이기든 지든 무언가 시원하게 날려보낸 기분이 든다.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켜는 사이 선수가 공을 밀어내고 달린다. 한 바퀴를 다 돌기 위해 혼자만 뛸 수는 없다. 예측할 수 없는 공의 움직임과 철벽같은 수비를 뚫어야 한다. 무명 선수가 홈런 한 방으로 역전 신화를 일구기도 하고, 전설의 타자일지라도 ‘투 스트라이크 스리 볼’의 풀카운트에서 포기하고 돌아서야 할 때도 있다. 그리고 마침내 홈으로 들어왔을 때, 그것은 다시 원점이다. 우리가 결국 다다르는 곳이 그러하듯이.
* 삿포로 돔 (//www.sapporo-dome.co.jp/foreign/index-kr.html)
- 2001년 완공한 세계 유일의 축구 및 야구 겸용 돔 구장으로, 축구 팀 콘사도레 삿포로와 야구 팀 홋카이도 니폰햄 파이터스의 홈 구장이다.
- 경기가 없어도 전망대에 오를 수 있으며, 매시 정각 돔 투어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
- 지하철 토호선 후쿠즈미(福住, Fukuzumi)역에서 도보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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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의 매력에 흠뻑 빠져 삿포로에서 살고 있다.
새로운 언어와 문화, 일상을 여행한다.
먹고 마시는 것과 사소한 순간을 좋아하며, 종종 글자를 읽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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