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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코츠코, 밤의 기억

물이 삼킨 나무와 돌멩이가 떠다니는 소리가 밤새도록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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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는 몹시 파랗고 커서, 언젠가 많이 그리워할 파랑이었다. 계절을 닮아 변덕스러운 마음들이, 시집의 책장을 넘기듯 천천히 물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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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척이던 밤을 지나


범상치 않은 먹구름이 가득 고여 있었다. 오랜만의 여행이었다. 숙박과 렌터카는 이미 예약한 상태였다. 불안한 마음에 뒤척이다 겨우 잠들었을 무렵, 휴대전화 벨소리가 들렸다. 설정했던 소리와 달리 무척 다급하고 시끄러웠다. 전화는 삼십 분 간격으로 울어댔다. 고막이 아플 지경에 이르렀을 때야, 화면에 찍힌 외국어를 다 뜨지도 못한 눈으로 읽었다. ‘호우경보, 산사태, 홍수 발생, 피난해야 할 수 있으니 대비 요망.’ 정말 그래야 하나, 생각하다가 전원을 끄고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맑았다. 구름은 무리 지어 빠르게 흘러가며 어수선했던 지난밤을 정리하고 있었다. 뉴스에선 산사태로 유실된 도로와 거실까지 넘친 물을 퍼내는 모습이 반복해서 재생되고 있었다. 그리고 전화벨이 울렸다. 밤새 울린 경보만큼이나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삿포로에서 오는 453번 도로는 전면 통제라고 했다. 오래전부터 예약해두었던 마루코마 료칸(여관)은 시코츠코(支笏湖) 호수를 앞에 두고, 북쪽 숲을 등진 곳에 있었다. 호숫가 도로 입구부터는 숙박객만 허가를 받고 들어갈 수 있다는 말도 전해왔다. 


길가에는 트럭이 넘어져 있기도 했고, 등산로 입구엔 통행금지 표시가 붙어있었다. 엄청난 게 지나간 걸 짐작할 수 있었다. 호수 입구에서 차를 멈췄다. 배수로에서 분수처럼 터져 나온 물이 도로를 적시고 있었다. 거기서부턴 순찰차의 전후방 호위를 받으며 호수 건너편의 숙소까지 가야 했다. 이차선 도로의 반은 떠밀려 온 바위와 뿌리째 뽑힌 나무로 뒤덮여있었다. 빨갛고 노란 사이렌 불빛이 사방에 그어지면서 왠지 더 불안하게 느껴졌다. 키 큰 나무들이 진초록 잎을 출렁이며 어두운 터널을 만들었다. 듬성듬성 튀어나온 바위들은 금세 작은 차로 달려들 것 같았다. 거기에 호수 괴물이나 주라기 공원 같은 상상이 줄을 이었다.


조물주의 파란 물웅덩이


시코츠코는 비행기에서 내려다볼 수 있다. ‘잠시 후, 신치토세 공항에 착륙한다’는 말이나, 이륙 후 일정 고도에 접어들어 안전벨트 표시등이 꺼질 때 즈음의 거리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조물주가 퍼다 놓은 것 같은 새파란 물웅덩이가 있다. 온 세상이 다 말라 비틀어졌을 때 그리워할 것 같은 파랑을 가진 호수다.


고요했다. 아니, 그 어느 때보다 고요했을 것이다. 사람의 기척보다 바람에 흔들리는 물과 숲의 기척이 컸다. 앞마당에 들어서자, 습기 가득한 나무 냄새가 무릎 밑까지 차올랐다. 온천은 백 년 전 지어진 목조 건물이었다. 도로가 생기기 전에는 한 달에 한 번꼴로 다니는 배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고 한다. 객실 문은 옛날 사람들의 작은 몸에 맞춰져 자칫 부딪힐 정도로 낮았다. 뿌연 조명이 비추는 로비에는 여인들이 호숫가에서 천연 온천을 즐기는 흑백 사진이 걸려 있었다. 마당에선 생의 끝자락에 닿은 나방 한 마리가 흙 위로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얼굴의 반은 나무를 닮고, 나머지 반쪽은 호수를 닮은 늙은 아주머니가 차려주는 저녁을 먹었다. 그녀는 날씨 때문에 예약을 취소한 사람이 많아 온천도 한가할 거라고 귀띔하며 하얀 밥을 퍼주었다. 탕에는 엄마 손을 잡은 꼬맹이 아가씨가 조잘대고 있었다. 그녀들이 떠나자 달 아래 노천탕에는 나와 어느 머리 짧은 여자만 남았다. 호숫가는 도로를 정비하는 공사로 늦도록 불빛을 내고 있었다. 그녀와는 오래도록 말을 나누었다. 목욕탕에서 처음 만난 사람치고는 어색하지 않았다. 도쿄에서 휴가를 받아 온 그녀는, 홋카이도의 북쪽과 동쪽을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이 호수를 찾았다고 했다.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움직이던 그림자들이 미지근하고 미끄러운 물속 한 귀퉁이에서 유영했다. 건너편 산 너머에서 몇 번 번개가 쳤다. 그 빛으로 호수의 물결을 살필 수 있었다.


계절의 강물, 바람, 나무…


료칸의 묘미는 천연 온천이었다. 그곳으로 가려면 아무래도 기분이 이상했다. 징검다리 같기도 하고, 폐광으로 내려가는 길 같기도 한 긴 나무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해야 했다. 얕은 돌담을 두고 한쪽은 바로 호수로 이어졌고, 그 반대는 온천수가 나오는 탕이었다. 돌담 틈새로 작은 길을 내어 호숫물이 드나들었다. 깊이와 온도는 수시로 바뀌었다. 전날 비가 많이 와서 깊이는 145cm였고, 온도는 미지근했다. 숲에서 떠내려온 나무와 흙이 돌담에 부딪히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그날 밤엔 실로 나 혼자 몸을 담그고 있었다. 호수로 흘러들어 온다는 강의 이름들을 소리 내 읽어 보았다. ‘비후에, 오코탄페, 니나루, 후레나이…….’ 그렇게 하나하나 불러주면, 물이 답을 하는 것 같았다. 출렁, 출렁. 


흙을 뒹굴던 나방은 몇 번 날갯짓을 더 했던 걸로 기억한다. 하늘은 가르마를 탄 듯했다. 료칸이 있는 호수의 북쪽엔 점점이 별들이 떠 있었고, 건너편 마을엔 비가 내렸다. 호수가 참 많은 나무와 흙을 집어삼킨 다음 날이었다. 그건 왠지 죽음이 아니라, 한 계절의 끝과 또 다른 계절의 시작을 알리는 자연의 당연한 일과처럼 보였다.


바람은 / 바람이어서 / 조금 애매한


바람이 / 바람이 될 때까지 / 불어서 추운


새들이 / 아무 나무에나 / 집을 지을 것 같지는 않은


- 박준, 『오늘의 식단 ?영(暎)에게』 中


다음 날, 번개는 멀리 떠났고, 인부들은 도로 보수 작업을 마치지 못했다. 호수는 몹시 파랗고 커서, 언젠가 많이 그리워할 파랑이었다. 마음이 작아지고 잿빛처럼 흐린 날이라면 더더욱. 나는 조물주의 물웅덩이를 배경으로 빌려다 사진을 찍었다. 계절을 닮아 변덕스러운 마음들이, 시집의 책장을 넘기듯 천천히 물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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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코츠코 호수 (국립공원으로 지정)

  - 약 4만 년 전에 형성된 칼데라 호수

  - 일본에서 두 번째로 깊은 호수. 평균 수심 250m, 최대 수심 363m.

  - 둘레 404km, 면적 78.4km?, 여의도의 9배 크기.

- 면적에 비해 수심이 깊어 수온이 1년 내내 비교적 일정하며, 겨울에도 얼지 않는 부동호.

- 신치토세 공항에서 약 50분 소요 (일 4~6회 버스 운행)

- 삿포로 역 앞 터미널에서 약 1시간 20분 소요 (겨울철 운행하지 않음)


* 마루코마 온천 료칸

- 홈페이지 및 예약: //www.marukoma.co.jp/

- 주소: 치토세시 시코츠코 포로피나이 7번지 (千?市 支笏湖 幌美?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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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송인희

홋카이도의 매력에 흠뻑 빠져 삿포로에서 살고 있다.
새로운 언어와 문화, 일상을 여행한다.
먹고 마시는 것과 사소한 순간을 좋아하며, 종종 글자를 읽고 쓴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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