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 남동부 해안도로 1박 2일
‘히다카’에서 ‘에리모’까지
온몸과 마음으로 붙잡아 둔 순간은 사진보다 선명하고 입체적이다. 이는 꽤 유효한 여행의 기록 장치다.
어떤 시, 어떤 음악, 어떤 순간
갈매기 우는 소리에 몇 번 잠에서 깼다. 천장이 낮고 외벽 타일이 닳은 호텔이었다. 창문 틈새로 소금기 섞인 신선한 바다 내음이 새어 들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안의 오래된 공기를 내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우라카와 인(Inn) 302호엔 장식이라고는 A4 만한 크기의 액자 하나뿐이었다. 거기엔 시가 한 편 담겨 있었다. 애달픈 정감을 주는 무명씨의 고백이었다. 듣는 이 없이 홀로 속삭이는 듯한 짧은 시를 옮겨 적었다. 그 한마디는 퀴퀴한 호텔 방 냄새만큼 나에게 강렬하게 스며들었다.
날 좋아한단 당신의 말만 내내 듣는 나로 살고 싶어
때로는 사진보다 유효한 여행의 기록 장치들이 있다. 스쳐 가는 생각을 적은 낙서라든가 평소 나누지 못했던 솔직한 대화도 그 범주에 속한다. 여행지와 어울리는 목소리를 가진 가수의 앨범을 통째로 돌려 듣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듣고 또 듣다 지겨워져 집에 돌아가고 싶을 때까지 듣는 거다. 그 모든 형태의 기억은 곧 기록이 된다. 온몸과 마음으로 붙잡아 둔 순간은 사진보다 선명하고 입체적이다.
홋카이도 남동부 해안도로 1박 2일은 그런 여행이었다. 멈춰있는 풍경 사진이 아니라, 바람 타고 날아온 향기와 시, 해안선과 초원의 곡선을 따라 흔들리던 몸으로 기억하는 여행이었다. 장소는 히다카에서 에리모까지 이어지는 약 130km의 해안도로, 반복해 듣던 배경 음악은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이었다.
히다카의 초원과 말
자동차전용도로를 빠져나오자마자 드넓은 초원과 바다가 나타났다. 그때부턴 부드럽게 굽이진 해안선을 따라 섬의 동남쪽 꼭짓점인 에리모까지 가는 2차선 도로였다. 어느 고급 주택 응접실에 걸려있을 법한 액자 속 풍경 같았다. 멋들어진 수염을 기른 염소는 심심해 보였고, 털이 덥수룩한 양은 그늘 밑에서 다리를 굽히고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사람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고, 말(馬)을 낳으면 제주로 보내라’는 속담이 있다. 우리나라의 말이 제주도라면, 일본의 말은 히다카 지역이다. 홋카이도는 일본 전체 경주마의 94%를 점유하고 있다. 이 가운데 80%가 히다카에 몰려있다.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경주마의 한 종류인 ‘서러브레드(Thoroughbred)’ 생산지로도 유명하다. 그 이름을 딴 길도 있다. 사람이 사는 땅보다 말이 사는 곳이 훨씬 넓다. 두세 마리가 축구장만 한 초원을 차지할 정도로 대접이 극진하다.
히다카에 들어서자마자 내 관심은 온통 말에게 쏠려버렸다. 울타리 안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던 말들의 털은 기름졌고 근육은 탄탄했다. 아름다운 동물이었다. 경마는 없는 날이었지만, 승마 체험은 해볼 수 있었다. 경기에서 은퇴한 암컷 서러브레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흑갈색 털이 한낮의 태양에 반짝였다. 두툼한 흉부와 그걸 떠받치는 튼튼한 네 다리는 위엄 있어 보였다. 매끄러운 털을 쓰다듬으며 눈인사도 해 보았다. 10분 체험 승마로 나는 말을 정말 좋아하게 됐다. 따뜻하고 매력적이었다.
메뉴가 없는 시골 선술집
새로운 곳에 여행을 가면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먹을거리다. 그 지역 명물이라던가, 동네 사람들만 아는 숨은 맛집을 찾는 건 꽤 커다란 기쁨이다. 숙소가 있던 우라카와(浦河)에서 차로 20분 정도 떨어진 곳엔 ‘부모 자식(親子)’ 바위 섬이 떠 있고, 바로 그 앞 ‘사마니’라는 마을에 선술집이 하나 있었다. 가게 이름은 ‘시골집(이나카야)’.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담백한 작명이었다.
그 집을 찾은 건 인터넷에 딱 하나 있던 후기 때문이었다. 내용인즉슨 그날 바다에서 들어온 고기로 원하는 대로 요리를 해주며, 메뉴는 애초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날 잡은 고기는 펄펄 신선할 것이고, 메뉴가 없다는 건 그만큼 손맛에 자신이 있다는 뜻일 테다. 실패 확률은 10% 미만으로 보면 됐다. 예상은 적중했다. 역사가 한참은 됐을 법한 화로가 놓인 선술집엔 거대한 칼이 걸려있었다. 연기에 그을린 생선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주인장과 그보다 더 주인 같았던 단골손님이 도란도란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주인은 일본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서비스 안주를 세 가지나 내주었다. 손님방으로 쓰는 위층 문을 열어 사냥한 곰 가죽을 펼쳐 보여주기도 했다. 으스스했지만, 홋카이도엔 정말 곰이 살고 있다는 걸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달큼히 취기가 올라 온천에 몸을 담그러 가는 밤길 역시 바닷길이었다. (운전자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눈앞에 주먹만 한 보름달이 휘영청 밝았는데, 땡그랑 하고 떨어질 듯 바다 근처에 붙어있었다. 살면서 가장 가까이서 본 달이었다. 그 빛에 모습을 드러낸 밤 파도는 진귀한 야경이었다. 모든 게 몽환적으로 느껴졌다. 다음 날 아침이면 그 자리엔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다. 어렸을 적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봤던 유치한 공포 영화처럼 말이다.
에리모를 기억하는 법
이튿날 최종 목적지인 ‘에리모 곶(岬)’으로 향하는 길엔 야생화가 만발해 있었다. 홋카이도의 남동쪽 끝점에 위치한 에리모는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었다. 강풍에 견디어 살아남은 야생화의 줄기는 두껍고 곧았다. 봉긋봉긋 끝없이 이어진 언덕엔 풀과 꽃이 빽빽했다. 물안개와 구름도 바다에서부터 언덕 능선까지 살포시 내려앉아 있었다. 이 길 끝에 천지 신령이 기다리고 있다 해도 믿을 수 있었다. 자연은 아마도 신(神)과 가장 닮았을 테니까. 그곳은 만물이 시작하고 끝나며, 돌고 도는 곳이었다.
평화롭고 고요한 해안가 언덕길을 얼마나 달렸을까. 그 길 끝엔 또 한 편의 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람을 보고, 바람에 귀 기울이고, 바람과 놀다’ 지역 단체에서 만든 에리모 곶 홍보 포스터에 있던 문장이었다. 그러니까 표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그걸 마주한 나는 잠시 이런 상상에 빠져들었다. ‘달빛을 따라 천지 신령이 지키는 초원을 달린다. 보름달은 그 어느 때보다 크고 밝다. 나는 매끈한 털과 탄탄한 근육을 가진 말 위에 올라타 있다. 물안개 사이를 가로지른다. 바람을 보고, 바람에 귀 기울이고, 바람과 논다.’ 이런 몽환적인 상상으로 나는 히다카에서 에리모까지의 1박 2일을 기록했다. 붙잡아 두고 싶은 순간은 이렇게 기억하는 게 옳다는 확신이 들었다.
* 사마니 선술집 ‘시골집(田?屋)’
- 주소: 北海道?似郡?似町本町1-68
<바다를 바라보며 노천탕을 즐길 수 있는 온천>
- 니이캇푸 온천 레코도노유 (新冠?泉レコ?ドの湯 )
ㅇ 홈페이지: //kurazou.ambix.biz/
ㅇ 주소/전화번호: 北海道新冠郡新冠町字西泊津16-3 / 0146-47-2100
- 미츠이시 온천 (三石溫泉)
ㅇ 홈페이지: //kurazou.ambix.biz/
ㅇ 주소/전화번호: 北海道日高郡新ひだか町三石鳧舞162 / 0146-34-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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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의 매력에 흠뻑 빠져 삿포로에서 살고 있다.
새로운 언어와 문화, 일상을 여행한다.
먹고 마시는 것과 사소한 순간을 좋아하며, 종종 글자를 읽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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