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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로 채워진 무도회장, Shall we dance?

미술관: 아른험 현대미술관, 네덜란드, 아른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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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로변에서 보면 미술관은 푸른빛이 감도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규모의 2층 빌라와 슬레이트 지붕이 있는 카페, 그리고 아담한 조각공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젠틀맨스 클럽이 미술관으로

 

아른험 현대미술관

(좌)아른험 현대미술관 전경 (우)조각공원에서 바라본 아른험 현대미술관

 

 

일반 여행자들에게 아른험은 참 낯선 이름의 도시다. 네덜란드 헬데를란트Gelderland의주도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헬데를란트라는 주가 있는지도 모를 것이다. 이 낯선 이름의 도시를 나는 또 미술관 하나 때문에 두 번이나 찾게 되었다. 아른험 현대미술관이 내 호기심을 자극한 건 순전히 이곳이 옛날 무도회장 건물이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화력발전소(테이트 모던)나 기차 역사(오르세 미술관)가 미술관으로 리모델링한 사례들은 잘 알려져 있지만 옛 무도회장이 미술관으로 변신한 건 뜻밖이었다. 유럽에서 살 때도 무도회장에 가본 적이 없어서 더욱 궁금했다. 헤매고 헤맨 끝에 겨우 미술관 근처에 다다랐다. 아른험 현대미술관은 위트레흐트 거리Utrechtsweg라 불리는 지대 높은 언덕길에 위치해 있었다. 그래서 미술관 가는 길에 마치 트래킹 하는 기분이 든다. 처음 미술관을 찾았을 때는 생각보다 소박한 외관에 실망이 컸다. 아마도 번쩍번쩍 빛날 정도로 크고 화려한 무도회장 건물로 오버해서 상상했던 것 같다. 대로변에서 보면 미술관은 푸른빛이 감도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규모의 2층 빌라와 슬레이트 지붕이 있는 카페, 그리고 아담한 조각공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미술관 건물은 1873년 인도에서 돌아온 사탕수수 농장주들을 위한 젠틀맨스 클럽 건물로 지어졌다고 한다. 이 클럽은 당시 아른험 지역 상류층 남성들의 사교 장소로, 이곳에서 그들은 젊은 여인들을 만나 춤을 추고 친구를 사귀고 비즈니스 정보를 교환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다 1918년부터 시립미술관으로 전환되어 몇 번의 증축 공사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개관 시간 전에 도착해 조각공원부터 둘러보고 미술관을 관람할 계획이었지만 길을 헤매 늦는 바람에 바로 매표소로 향했다. 매표소를 겸한 아트숍은 이곳에서 열리는 전시 도록과 함께 독특한 디자인의 머그컵이나 가방, 넥타이, 스카프 등의 디자인 상품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특히 도자기 장식품들이 많이 진열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띄는데 대부분 네덜란드 출신의 젊은 도예가들이 만든 디자인 상품들이었다.

 

육각형으로 된 돔홀 전시장

육각형으로 된 돔홀 전시장

 

미술관은 매표소 바로 뒤로 위치한 돔 홀을 중심으로 동쪽 날개관과 서쪽 날개관으로 길게 뻗어 있어 전체적으로 보면 C자형을 이룬다. 돔 홀은 과거 클럽 시절 무도회장으로 사용되었던 반구형 천장이 있는 공간으로 지금은 특별전을 위한 전시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육각형으로 된 공간의 특성상 설치 조각 작품이 전시될 때와 회화작품이 걸려 있을 때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높은 벽에 걸린 금빛 장식의 파이프 오르간은 이곳이 옛 무도회장이었음을 알려주는 마지막 지표 같다. 최신 유행하는 패션으로 한껏 멋을 부린 남녀가 저 오르간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이곳에서 춤을 추었을 것이다.

 

 

돔홀 천장의 파이프 오르간

돔홀 천장의 파이프 오르간

 

 

미술관의 숨은 명소 3

 

폴란드의 디자인 작품을 전시중인 방

폴란드의 디자인 작품을 전시중인 방

 

 

라인강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라인홀 전시장과 그 옆방은 1950~60년대의 폴란드 디자인전展으로 꾸며져 있었다. 의자, 테이블, 태피스트리, 도자기 등 아직 세계에 덜 알려진 당시 폴란드 디자이너들의 역량을 보여주는 전시였다. 특히 라인홀은 관람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명소이기도 한데, 이곳의 대형 유리창을 통해 라인강의 아름다운 조경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술관 측은 이 대형 유리창을 ‘독일과 네덜란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술관 창문’이라고 자랑하고 있다.

 

서쪽 날개관에서는 최근 국제적으로 가장 주목받고 있는 미디어아트 작가 중 한사람인 카타르지나 코지라Katarzyna Kozyra, 1963~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다. 폴란드 출신인 그녀는 섹슈얼하면서도 도발적인 사진과 영상 작품으로 종종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작가다. 남자 사우나의 모습을 촬영한 영상과 사진 등을 선보였는데 선정성 문제로 19세 이하 청소년들은 관람을 제한하고 있었다. 1층 관람을 끝낸 후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더니 강당과 미술관의 소장품을 전시하는 상설 전시실이 위치해 있었다. 특이한 건 20세기 미술과 1960년대 이후 현대미술 작품도 19세기 방식으로 벽에 다닥다닥 붙여서 보여준다는 것이다. 벽 전체에 간이 철망 벽걸이를 설치한 후 그림들을 위아래 옆 할 것 없이 최대한 밀착시켜서 걸어놓았다. 마치 동네 옷가게 진열대처럼 주어진 공간 내에 최대한 많은 그림을 걸어둔 것이다. 현대미술관에서 이러한 고전적인 방식으로 전시한 것이 오히려 더 신선하게 다가왔다.

 

 

폴란드의 젊은 미디어아트 작가 카타르지나 코지라의 작품이 전시된 방

폴란드의 젊은 미디어아트 작가 카타르지나 코지라의 작품이 전시된 방

 

 

이곳의 카페와 조각공원도 빼놓을 수 없는 명소다. 런던 소재의 디자인 회사 소다Soda가 인테리어를 맡았다는 카페는 벽들이 모두 통유리로 되어 있어 라인강과 조각공원을 조망하기에 딱 좋은 곳이다. 현대 조각들이 곳곳에 설치된 조각공원은 미술관을 찾는 관람객뿐 아니라 산책 나온 이웃 주민들에게도 휴식처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다. 1960년대 이탈리아의 중요한 미술운동인 아르테 포베라를 이끌었던 알리기에로 보에티를 비롯해 케스 프랑세, 마리아 로선, 이네케 카흐만 등 이 지역에서 활동하는 젊은 작가들이 다양한 매체로 만든 야외 조각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특히 이네케 카흐만의 조각은 재료의 특성 때문인지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몸은 사람이 고 얼굴은 돼지나 개를 연상시키는 검은 청동 조각 위에 점토같이 생긴 분홍 반죽을 마치 수제비 뜨듯 덕지덕지 붙여 만든 작품이었다. 그런데 재료를 자세히 보니 점토가 아니라 씹던 껌이었다. 길바닥에 붙어 있을 때는 환경과 미관상의 문제로 애물단지가 되는 껌의 존재가 어떤 작가에게는 이렇게 훌륭한 미술의 재료가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껌을 붙여 만든 이네케 카흐만의 작품

껌을 붙여 만든 이네케 카흐만의 작품

 

한때 지역 상류층 남성들의 프라이빗 사교 클럽이었던 곳이 이제는 공공미술관이 되어 남녀노소 누구나 예술과 함께 춤추며 즐기는 공공의 무도회장이 된 것이다. 지난 2007년 패션 비엔날레를 연 것에 이어 2012년에는 제1회 헬데를란트 국제 비엔날레까지 이곳에서 개최했다. 이 기간 동안에는 조각공원에 야외 특설 무대를 꾸며 연극, 춤, 팝 음악, 클래식 음악, 시 낭송과 퍼포먼스 등 그야말로 다채로우면서도 융복합적인 문화 이벤트를 함께 열어 지역민뿐 아니라 네덜란드와 인근 유럽인들에게 또 하나의 새로운 문화 축제의 장을 선사했다. 이제 아른험 현대미술관은 지역 미술관에서 국립미술관으로 그리고 나아가 국제적인 미술관으로의 행보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미술관을 빠져나올 때 쯤 누군가 내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이는 듯했다. ‘아른험에서 예술과 함께, 섈 위 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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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미술관을 걷다 이은화 저 | 아트북스
이 책은 대도시 유명 미술관 코스에 싫증난 이들, 한가로운 미술관 여행을 꿈꾸는 이들을 독일과 네덜란드의 국경에 자리한, 라인강 주변 자연미술관으로 안내한다. 현대미술과 관계된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은화가 지난 10년간 직접 다닌 미술관 여행을 바탕으로, 여느 여행서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는 비밀 루트를 공개했다. 미술관의 탄생 배경뿐 아니라 건축 콘셉트, 전시 프로그램, 작가와 작품에 얽힌 뒷이야기 등을 충실히 담아 여행을 계획하는 독자를 위한 내실있는 가이드북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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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이은화

이은화는 현대미술가, 평론가, 독립 큐레이터, 대학 강사 등 미술과 관계된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물이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후, 독일로 유학을 떠나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미술사학과 대학원을 다녔으며, 이후 영국 런던으로 이주하여 캐빈디시 대학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했고, 윔블던 스쿨오브 아트에서 순수미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어 세계 최대의 미술 경매회사인 소더비 옥션하우스에서 최고의 예술 전문 인력을 키우기 위해 세운 런던 소더비 인스티튜트에서 ‘현대미술학(이론 및 행정)’ 석사를 취득했고 맨체스터대학과 소더비 인스티튜트가 함께 운영하는 아트비즈니스 전공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런던에서는 다수의 그룹전에 기획자와 작가로 참여했으며, 윔블던 드로잉 센터 갤러리에서 근무했고, HDT 기업 컬렉션의 아트 컨설턴트로 활동하기도 했다.

2002년 겨울 귀국한 이후 작가 및 평론가, 독립 큐레이터로 활동 중이며 현재 중앙대학교와 성신여자대학교, 삼성문화 아카데미 등에서 ‘유럽 미술관과 컬렉션’‘현대미술’ 등의 주제로 강의를 맡았다. 미국 온라인 예술잡지 『아트크러시(Artkrush)』를 비롯 『월간 미술세계』 『퍼블릭 아트』 등 국내 미술 매체에 글을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다. 2004년 아트스페이스 미음 기획으로 “웰컴-감정의 에스페란토”라는 주제의 첫 개인전을 연 이후 성곡미술관을 비롯해 서울시립미술관, 선화랑, 세줄 갤러리, 한전프라자 갤러리 등의 테마 기획전에 초대작가로 참여하여 활약한 바 있다. 현재 서울과 런던을 오가며 더 많은 이들을 현대미술의 매력 속에 빠져들게 하기 위해 강연과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자연미술관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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