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 놀이터

조용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자연 속 미술관

홈브로이히 박물관 섬, 노이스,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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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셀도르프에서 차로 10여 분만 가면 노이스라는 아주 작은 시골 마을이 나온다. 지도에도 잘 표시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이 마을에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아주 특별한 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다. ‘홈브로이히 박물관 섬’이라 불리는 이 미술관은 독일인들에게조차도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미술관이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최고로 손꼽힌다.


미술과 건축, 자연이 하나되다

 

 

홈브로이히 박물관 섬 전경 .jpg

홈브로이히 박물관 섬 전경

 

 

뒤셀도르프에서 차로 10여 분만 가면 노이스라는 아주 작은 시골 마을이 나온다. 지도에도 잘 표시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이 마을에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아주 특별한 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다. ‘홈브로이히 박물관 섬’이라 불리는 이 미술관은 독일인들에게조차도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미술관이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최고로 손꼽힌다. 이곳이 특별한 이유는 빌바오 구겐하임처럼 최첨단으로 무장한 멋들어진 건축물이 있어서도 아니고 뉴욕 현대미술관 모마MoMA처럼 컬렉션이 대단해서도 아니다. 단지 이곳에는 대도시에 있는 대형 미술관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섬처럼 강으로 둘러싸인 넓은 초원 위에 띄엄띄엄 들어선 조각품 같은 미술관 건물들을 천천히 걸으면서 하나씩 발견하고 자연 속에서 미술과 조용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이다. 직접 가보지 않고서는 결코 그 진가를 알 수 없는, 특별한 추억과 경험을 제공하는 바로 그런 곳이다. 2004년 미국 미술 전문지 『아트뉴스』가 ‘세계의 숨겨진 미술관 톱 10’을 발표하면서 홈브로이히를 ‘유럽의 숨은 진주’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홈브로이히 박물관 섬의 매표소 건물 내부.jpg

홈브로이히 박물관 섬의 매표소 건물 내부

 

 

 

미술관 근처에 다다르자 카메라를 냉큼 챙겨 든 후 곧바로 매표소 건물로 신나게 뛰다시피 들어갔다. 서점을 겸하고 있는 작은 매표소 건물은 빨간색과 검은색의 심플하면서도 세련된 가구들로 꾸며져 있다. 독일 출신의 건축가이자 조각가인 올리버 크루제가 디자인한 것들이다. 이 매표소 건물을 통과하면서부터 홈브로이히 박물관 기행의 아주 특별한 여정이 시작된다. 운이 좋아서인지 유난히 쾌청하고 맑은 날씨다. 천천히 자연을 음미하면서 산책하듯이 걷다 보면 저절로 마주치는 작은 건물들이 바로 전시장들이다. 섬 전체에 걸쳐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얌전히 서 있는 각각의 독립된 갤러리들은 건축물이라기보다 차라리 그 자체가 미니멀한 조각품 같은 인상을 준다. 실제로 이곳에 있는 총 열다섯 채의 건물 중 열한 채가 독일 조각가 에르빈 헤리히가 건축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조각 작품들을 사람이 걸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크게 확대해서 이곳에 설치해놓았다고 한다. 조각품이 커져 사람이 들어갈 수 있으면 건축이 된다는 그 심플한 생각. 에르빈 헤리히는 이렇게 조각가와 건축가를 애써 분류하는 우리의 습관이 편견임을 일깨워준다.

 

 

없는 것이 많아 더욱 풍성한 미술관

 

탑 갤러리 문과 내부 .jpg

탑 갤러리 문과 내부

 

 

 

입구 건물에서 출발해 5분쯤 걸으면 만나는 첫 건물이 ‘탑’이라는 이름의 갤러리다. 투박한 탑처럼 생긴 붉은 벽돌 건물인데 내부는 군더더기 하나 없이 정갈하고 깔끔한 흰색이다. 그런데 갤러리 벽에는 아무리 눈을 비비고 찾아봐도 작품 비슷해 보이는 것도 없다. 텅 빈 공간 안에는 천창으로 따뜻한 햇살만이 조용히 비치고 있을 뿐이었다. 이곳은 내가 마음대로 정한 ‘마음을 비우는 장소’다. 마음뿐만 아니라 모든 미술사적 지식이나 미술에 대한 편견도 머릿속에서 완전히 비우는 곳이다. 그래야만 홈브로이히 박물관 섬에서 진정한 미술 감상을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컬렉션들이 전시된 다른 건물들을 보면 자연스레 알 수 있다. 탑 갤러리를 빠져 나와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나무 울타리에 숨겨진 꽤 큰 규모의 건물이 나온다. ‘미로’라는 이름이 붙은 이 건물은 홈브로이히의 주요 소장품이 전시된 갤러리다.

 

 

미로 갤러리 내부 .jpg

미로 갤러리 내부

 

 

 

이곳을 처음 방문한 사람들은 으레 작품 주변의 벽을 이리저리 살핀다. 미술관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명제표를 찾기 위해서다. 누구의 작품이며 제목이 뭔지를 확인해야 하니까. 하지만 이곳에는 어떠한 전시 관련 설명서나 명제표가 없다. 나 역시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는 명제표가 없어서 적잖이 당황했다. 대부분의 미술관들은 교육적 목적을 중시해 전시된 미술품보다 그에 대한 해설문을 더 크고 장황하게 붙여둘 때가 많다. 작품을 이해하는 데 친절한 가이드처럼 여겨질 때도 있지만 가끔은 그런 일방적인 해설이 진정한 작품 감상을 방해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곳은 동양미술과 서양미술, 고미술과 현대미술이 어떠한 설명도 없이 한 공간에 동시에 놓여 있어 시대나 문화적 배경에 대한 편견이나 구분 없이 그저 자연 속에서 작품 자체를 즐기고 감상하도록 유도한다. 게다가 전시장에는 안내원이나 지킴이는 물론 CCTV도 없어 아무런 제약 없이 정말 맘 편하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고 원하면 사진도 실컷 찍을 수 있다. 다른 미술관에서는 결코 상상할 수 없는 관람자의 자유와 권리를 이곳에서는 맘껏 누리고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특별함과 사랑스러움의 이유


그렇다고 이곳에 전시된 소장품들이 결코 방치해도 좋을 만큼 싸구려이거나 미술관 측이 소장품 관리에 소홀한 것은 절대 아니다. 렘브란트를 비롯해 클림트, 세잔, 이브 클랭, 엘즈워스 켈리, 알렉산더 콜더 등 서양미술사를 장식한 유명 작가들의 작품에서부터 중국, 아프리카, 멕시코, 고대 크메르 조각까지 시대와 역사, 국적을 초월하는 중요한 미술작품들을 미술관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다도이쓰 갤러리 전경 .jpg

다도이쓰 갤러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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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개의 방의 있는 집’ 내부

 

  

비슷하지만 각각 개성을 살린 갤러리 건물에는 저마다 이름이 붙어 있다. 일본 출신의 예술가 다도이쓰의 대형 작품이 걸린 ‘다도이쓰 파빌리온’에서부터 미술관을 건축한 헤리히의 미니멀한 조각 작품이 놓여 있는 ‘호에 갤러리’, 주요 소장품이 걸린 상당히 큰 전시장 ‘열두 개의 방이 있는 집’, 요제프 보이스의 제자였던 아나톨 헤르츠펠트의 작품이 전시된 ‘아나톨 하우스’, 그라우브너의 아틀리에이자 전시장으로 쓰이는 ‘그라우브너 파빌리온’, 고대 크메르 조각들이 전시된 ‘오랑제리’, 미로 형태의 대형 전시장인 ‘미로’, 달팽이 모양으로 생긴 전시장인 ‘달팽이’ 등 갤러리의 형태나 기능에 따라 이름을 붙이거나 작가의 이름을 붙이는 등 각각 재미있고도 인상적인 이름들을 지어놓았다.

 

 

 

홈브로이히 박물관 섬의 조각공원에서 만나는 아나톨 헤르츠펠트의 작품 .jpg

홈브로이히 박물관 섬의 조각공원에서 만나는 아나톨 헤르츠펠트의 작품

 

 

초원 속에 흩어진 전시장을 찾아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만나게 되는 예쁜 정원이나 연못, 소박한 나무다리 등도 눈길을 끄는데 이 역시 독일 출신인 환경 건축가 코르테가 설계한 것이다. 산책로 주변에 설치된 야외 조각들도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하는데, 모두 돌이나 나무 등 친환경적인 재료로 만들어졌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렇게 조각 작품 하나를 설치하더라도 이곳과 잘 어울리는 친환경적인 작품을 고집하는 것이다.


미술관 산책의 마지막 코스는 이곳의 또 다른 명소인 유기농 카페테리아로, 이 지역 농촌에서 생산된 신선한 무공해 과일과 유기농 음식들이 제공된다. 여러 종류의 잡곡 빵과 잼, 푸딩, 감자 요리, 샐러드, 삶은 달걀, 과일, 음료 등 그야말로 독일산 웰빙 음식들을 실컷 맛볼 수 있다. 뷔페식이며 무료로 제공된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일 것이다. 대자연 속에서 예술 감상뿐 아니라 휴식과 명상, 게다가 웰빙 식사까지 할 수 있는데 어찌 이 미술관이 특별하고 사랑스럽지 않을까.

 

유기농 음식이 제공되는 카페테리아 전경.jpg

 유기농 음식이 제공되는 카페테리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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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미술관을 걷다 이은화 저 | 아트북스
이 책은 대도시 유명 미술관 코스에 싫증난 이들, 한가로운 미술관 여행을 꿈꾸는 이들을 독일과 네덜란드의 국경에 자리한, 라인강 주변 자연미술관으로 안내한다. 현대미술과 관계된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은화가 지난 10년간 직접 다닌 미술관 여행을 바탕으로, 여느 여행서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는 비밀 루트를 공개했다. 미술관의 탄생 배경뿐 아니라 건축 콘셉트, 전시 프로그램, 작가와 작품에 얽힌 뒷이야기 등을 충실히 담아 여행을 계획하는 독자를 위한 내실있는 가이드북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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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은화

이은화는 현대미술가, 평론가, 독립 큐레이터, 대학 강사 등 미술과 관계된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물이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후, 독일로 유학을 떠나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미술사학과 대학원을 다녔으며, 이후 영국 런던으로 이주하여 캐빈디시 대학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했고, 윔블던 스쿨오브 아트에서 순수미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어 세계 최대의 미술 경매회사인 소더비 옥션하우스에서 최고의 예술 전문 인력을 키우기 위해 세운 런던 소더비 인스티튜트에서 ‘현대미술학(이론 및 행정)’ 석사를 취득했고 맨체스터대학과 소더비 인스티튜트가 함께 운영하는 아트비즈니스 전공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런던에서는 다수의 그룹전에 기획자와 작가로 참여했으며, 윔블던 드로잉 센터 갤러리에서 근무했고, HDT 기업 컬렉션의 아트 컨설턴트로 활동하기도 했다.

2002년 겨울 귀국한 이후 작가 및 평론가, 독립 큐레이터로 활동 중이며 현재 중앙대학교와 성신여자대학교, 삼성문화 아카데미 등에서 ‘유럽 미술관과 컬렉션’‘현대미술’ 등의 주제로 강의를 맡았다. 미국 온라인 예술잡지 『아트크러시(Artkrush)』를 비롯 『월간 미술세계』 『퍼블릭 아트』 등 국내 미술 매체에 글을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다. 2004년 아트스페이스 미음 기획으로 “웰컴-감정의 에스페란토”라는 주제의 첫 개인전을 연 이후 성곡미술관을 비롯해 서울시립미술관, 선화랑, 세줄 갤러리, 한전프라자 갤러리 등의 테마 기획전에 초대작가로 참여하여 활약한 바 있다. 현재 서울과 런던을 오가며 더 많은 이들을 현대미술의 매력 속에 빠져들게 하기 위해 강연과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자연미술관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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