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에이핑크는 왜?

‘놀랍게도’ 한 번도 섹시한 콘셉트를 표방하지 않은 소장파 걸 그룹 에이핑크의 새 앨범 『Pink Bloss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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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에이핑크가 이렇게 어중간한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에는 여러 이유, 특히 밖에서는 알 수 없는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요컨대 멤버들의 부모가 섹시한 콘셉트를 결코 수용하지 않는다던가 하는 식의). 그런 이유와 무관하게 큰 일이 없는 한, 이런 스타일을 꾸준히 유지할 것도 같다.

솔직히 말하자. 에이핑크는 별로 인기가 없다. 보편적인 기준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들이 정확히 언제 데뷔했는지도 모르거나 발표했던 곡 제목도 기억하기 힘들 것이다. <응답하라 1997>의 정은지가 속한 걸 그룹이라고 하면 그제야 알 것도 같다는 표정을 짓겠지만, 동시에 다른 멤버가 누구고 어떤 옷을 입었으며 어떤 음악인지 도대체 모를 것이다. 심지어 여타의 걸 그룹들처럼 에이핑크도 야한 콘셉트의 댄스 음악을 부를 거라는 짐작을 할수도 있다. 아이돌에 관심이 많지 않다면 당연하다고 본다. 아이돌과 비-아이돌로 양분된(여러 번 밝혔듯이 나는 이런 분화가 이미 고정되었다고 생각한다) 가요계에서 극한 경쟁은 필연적이고, 특히 포화 상태인 걸 그룹 생태계에서 인지도를 높이려면 뭐라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섹시함을 선택하는 건 오히려 자연스럽다. 하지만 에이핑크는 ‘놀랍게도’ 한 번도 섹시한 콘셉트를 표방하지 않은 소장파 걸 그룹이다. 그리고 나는 이게 에이핑크의 정체성에 중요한 기능을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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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31일 정오, 에이핑크의 새 앨범 『Pink Blossom』이 공개되었다. 반주곡을 제외한 6곡이 실린 이 네 번째 ‘미니앨범’은 기존에 에이핑크가 발표했던 곡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기존에 발표한 곡이 어떤지 모를 테니 부연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팬들이라면 에이핑크의 음악을 ‘순수하다’고 표현할 것 같고, 보편적인 감상자의 입장에서라면 ‘착한 이미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다는 얘기를 할 수밖에 없다. 이들의 음악은 90년대 아이돌 음악부터 특징 없는 가요, BGM의 기능에 최적화된 미드 템포의 팝의 연장에 있었다. 2011년의 데뷔곡 「몰라요」는 쿵짝대는 리듬 위에 뻔한 멜로디를 구축한 뒤 어설픈 랩을 삽입한 90년대 댄스 가요의 전형을 따랐고, 2012년 5월에 발표된 정규 1집에 수록된 「Hush」는 소위 ‘뽕댄스’의 구조, 훅이 강조되는 구성으로 원초적인 관심을 끄는 데 충실했다.

 

그게 나쁜 건 아니지만(훅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기도 하지만 훅이야말로 대중음악의 핵심이다) 매스미디어에 최적화하는 걸 우선적인 목표로 삼으면서 피로감과 지루함을 극복하지 못한 건 사실이다. 반면 2013년 7월에 발표한 「NoNoNo」는 매끈하게 정돈된 팝을 표방하며 어느 정도 상업적 성공을 거두지만 그룹의 인지도나 영역의 확장으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나쁘진 않지만 그렇다고 대중에게 확실한 각인을 남기는 곡은 아니었던 것이다. <응답하라 1994>의 성공은 그 뒤에 왔지만 그마저도 정은지 개인의 인지도가 그룹의 정체성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정은지가 걸 그룹의 멤버란 사실조차 헷갈린다)

 

 

이렇게 뻔한, 혹은 쉬운 음악은 특정 대상을 겨냥하기보다는 불특정 다수를 노린다. 바꿔 말해 특정 집단이 아닌 보편적 감수성에 호소하게 되는데, 시사적인 건 대중적으로든 비평적으로든 성공한 아이돌 팝이 오히려 확실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이런 보편성을 추구하는 태도가 오히려 음악적 개성을 가리며 대중성을 놓치게 되는 악재가 되는 셈이다. 그 점에 비추어 새 앨범을 살펴보면, 안타깝게도 거기서 크게 달라지지 않은 인상을 남긴다. 『Pink Blossom』에 수록된 곡들 중에서 이단옆차기가 주도한 「Mr. Chu」외에 딱히 어떤 곡도 남다른 인상을 남기지 못하는 것이다. 그나마 「Mr. Chu」조차도 보편적이고 관습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맥이 풀리는 앨범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재밌는 건 이때부터다. 내 기준에서 에이핑크의 음악과 정체성은 무색무취한데, 앞서 언급했듯 그것은 2011년 이후 현재까지 꾸준한 것이다. 콘셉트가 없는 게 콘셉트인 것처럼 이들은 의상이나 안무, 음악에서 튀기보다 무난한 걸 택했다. 앞서 신나서 써댄 것처럼 비판도…. 아니, 보통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 사이에 다른 걸 그룹들이 온갖 스타일과 콘셉트를 바꾸고 더 강한 이미지를 만들려 애쓸 때(그 중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무리수도 있었는데) 오히려 에이핑크는 얌전하고 순응적인 소녀 이미지를 얻었다. 나는 이 이미지가 걸 그룹 포화기에 ‘어쩌다 얻어걸린 요행’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반작용이 흥미롭기도 하다. 왜냐면 이런 정체성이야말로 메인스트림의 대중음악이 모두 추구하는 것이기도 하고 또한 우연적인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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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에이핑크가 이렇게 어중간한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에는 여러 이유, 특히 밖에서는 알 수 없는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요컨대 멤버들의 부모가 섹시한 콘셉트를 결코 수용하지 않는다던가 하는 식의). 그런 이유와 무관하게 큰 일이 없는 한, 이런 스타일을 꾸준히 유지할 것도 같다. 그러면서 지금처럼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강하게 밀착된 팬덤의 지지를 더 많이 얻어낼 수도 있으리라 본다. 사실 에이핑크의 입장에서라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물론 이들의 뻔한 정체성이 앞으로도 그대로라면, 나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음악을 소비할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흥미롭다. 꾸준하게 일관된 애매함이 마침내 대중적 관심을 자극하는 맥락 때문이다. 이 궁금증을 해소하려면 일단 팬클럽에 가입한 뒤에 이들의 음악과 콘셉트가 진심으로 좋아질 때까지 활동해야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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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차우진

음악웹진 <weiv> 편집장. 『청춘의 사운드』를 썼다. 대체로 음악평론가로 불리지만, 사실은 지구멸망과 부동산에 더 관심이 많은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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