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 놀이터

걸 그룹의 섹시하고 복잡한 모험

걸스데이, 레인보우블랙, 달샤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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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이 시작되면서 흥미롭게 생각하는 건 그동안 ‘듣보잡’으로 여겨지던 걸 그룹들의 동시적인 변화다. 물론 이런 경향은 작년부터 예감되었던 것이기도 하겠지만 일단은 거의 동시에 이런 변화가 감지된다는 점에서 흥미롭게 여기게 된다. 맞다. 걸스데이와 레인보우 블랙, 달샤벳에 대한 얘기다.

이들에 대한 얘기를 하기 전에 먼저 지금 한국의 메이저 음악 산업의 구조변화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혹시 모르니 팩트보다 관점에 가깝다는 점도 밝혀둔다. 나는 한국의 메이저 음악 산업이 2009년 이후 아이돌과 비-아이돌로 완전히 양분되었다고 본다. 강조하건데 음악 시장이 아니라 ‘산업’이다(헷갈려서인지 많이들 섞어 쓰는 경우도 있는 것 같지만, 특히 대중문화 안에서 이 둘은 엄밀히 구분될 필요가 있다).

요컨대 가수의 데뷔를 포함해 음악을 만들고 판매하고 유통하는 것에 이르는 거의 전반적인 구조가 아이돌 대 비-아이돌의 이층 구조로 정립되었다는 얘기다. 이 맥락에 포함되는 건 싱어/송라이터든 댄스가수든 마찬가지다. 이런 구조에서 ‘사업’을 시도하려는 주체는 필연적으로 아이돌 가수를 발굴, 육성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한다. SM이나 YG처럼 소위 ‘잘 나가는 회사들’에 해당하는 얘기만은 아니다. 아이돌 가수의 곡에 외국 작곡가들이 많아지는 것, 기존의 독립적으로 활동하던 프로듀서들이 직접 아이돌 가수를 제작하는 것, 소년공화국이나 와썹처럼 유니버설 뮤직이나 소니 뮤직이 직접 아이돌 가수를 제작하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아이돌이 현재 주류 가요의 보편적인 형식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때 아이돌 산업의 기반으로서 팬덤이 더욱 중요해진다. 아이돌 산업은 어느 정도 확고한 이성애적 가치관 위에 존재한다. 가끔 ‘BL’이나 ‘백합물’ 같은 하위문화의 동성애 코드가 개입하기도 하지만, 아이돌 팬덤은 명백히 스타와 팬 사이의 이성애적 관계에서 형성된다. 특히 보편적으로 문화 산업의 주요 소비자들이 여성들이었다는 점(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래 전부터 여성들은 대중문화의 주요 소비자들이었다)은 산업의 주체들(그러니까 기획사들)로 하여금 보이그룹을 더 공식화된 것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이런 이유로 보이 그룹은 보통 12살 정도의 여학생들을 팬덤의 대상으로 삼고, 그들이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안정적인 시장을 형성하리라는 기대를 갖게 된다. 누나 팬에게마저도 이들은 어쨌든 ‘오빠’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여자 아이돌은 다르다. 보통 10대 소년들은 음악보다 게임에 열중하고, 그래서 걸 그룹은 조직화되지 않는, 파편화된 남성 팬덤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걸 그룹은 보이그룹들처럼 안정적인 팬덤을 기반으로 삼지 못한 채 주로 20대 이상의 성인 남성들이 집중된 군대나 학교, 지자체의 행사 같은 한시적인 시장을 노리게 된다. 특히 소녀시대, 카라, 2NE1, 브라운아이드걸스 같은 메이저 걸 그룹이 대중적 관심을 집중적으로 받았던 2009년 이후는 걸 그룹의 경쟁이 가장 치열해진 때였고, 그만큼 메이저와 마이너 걸 그룹의 대비도 선명해졌다. 이 맥락에서 여자 아이돌 그룹의 ‘병맛’ 아이덴티티가 형성된다. 오렌지 캬라멜과 크레용팝을 이 분야의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들의 정체성이나 존재감이 너무 뚜렷했다는 점이다.


걸 그룹에게 데뷔와 생존은 보이 그룹에 비해 공식화되기 어렵다. 최근 몇 년 동안 세부적인 전략이나 형태가 계속 바뀌었지만, 그 중에 성공한 그룹은 손에 꼽힌다. 이 맥락에서 걸스데이와 레인보우 블랙의 약진은 인상적이다. 이 두 그룹은 이것저것 해봤지만 늘 애매한 위치에 머물렀다. 그나마 소수 그룹으로부터 음악이 좋다거나 개성적인 매력이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특정 집단에 국한된 것이었다.

그러다 작년에 크레용팝이 등장했다. 이들의 성공은 예측불허의 것이었고, 그 점에서 분명히 압도적인 지점이 있다. 기획자의 입장에서라면 기존의 전략을 완전히 버려야할 때라고 여겼을 것 같다. 요컨대 더 이상 ‘병맛 같은 귀여움’이란 콘셉트에 승부를 걸 상황이 아니게 된 것이다. 걸스데이나 레인보우 블랙, 달샤벳의 섹스어필은 그 맥락에서 살필 필요가 있는데, 노골적이지만 다른 걸 그룹들과 비교할 때 좀 더 고급스러운 느낌 때문이다. 안무와 영상에 있어서도 노출의 강약을 조절하는 리듬이 세련된 감각을 제공하고, 그게 호감으로 전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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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중요한 건, 이들의 대중적 성과가 명백히 음악적 매력 때문이라는 점이다. 레인보우 블랙의 「Cha Cha」 는 윤상과 East4A(세종대 실용음악과 DJ/Electronic 김양우 교수)의 공동 작곡인데, 곳곳에 스며든 소울풀한 리듬이 특히 인상적이다. 들을수록 귀에 착 감기는 재미가 솟구친다는 것을 특히 강조하고 싶다. 걸스데이의 「Something」 은 프로듀싱팀 이단옆차기의 곡으로, 소울을 베이스로 삼아 꽤 자극적인 지점을 파고드는데, “여자 대통령”에서 선보였던 도발적인 음악 구조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게 인상적이다. 달샤벳의 「B.B.B」 는 신사동호랭이의 곡으로 80년대 뉴웨이브 스타일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면서 보다 댄서블한 감각을 공략한다. 유행지난 스타일로 여겨질 부분을 오히려 관습적으로 정면 돌파하는 과감함이 꽤 놀랍다. 정리하자면, 이들은 모두 노골적인 섹스어필과 음악적 완성도의 충돌 혹은 결합으로 대중에게 존재감을 각인시킨다.

앞서 걸 그룹은 보이 그룹에 비해 시장의 기반이 허약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걸 그룹은 예측할 수 없는 시장에서 기대할 수 없는 불확정성과 싸워야 하는 상황에 빠진다. 그런데 이것이 역설적으로 음악적 완성도를 지향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걸 그룹의 경쟁상대는 다른 걸 그룹의 댄스음악이 아니라 분야에 무관하게 완성도 높은 음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걸스데이의 「Something」 과 레인보우 블랙의 「Cha Cha」, 그리고 달샤벳의 「B.B.B」 를 그에 대한 가장 최근의 징후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여러 맥락에서, 걸 그룹 산업과 시장은 여전히 흥미로운 분야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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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차우진

음악웹진 <weiv> 편집장. 『청춘의 사운드』를 썼다. 대체로 음악평론가로 불리지만, 사실은 지구멸망과 부동산에 더 관심이 많은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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