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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설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

시인 김민정의 첫 산문집 『각설하고,』 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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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를 배반하지 않는 책 『각설하고,』 는 김민정 시인의 첫 산문집이다. 편집자 일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깐깐하게 책을 만들었을까? 오랜만에 뜨거운 라면을 후루룩 먹듯, 즐겁게 읽었다.

내 오랜 습관 중 하나는 간판을 보고 음식점의 맛을 판단하는 버릇이다. 정말 촌스럽거나 정말 세련된 간판을 단 음식점은 대부분 맛이 있다. 어정쩡한 글씨체에 멋만 부린 간판은 꼭 음식 맛도 싱겁기 그지없다. (그거 아나? 맛있는 라면집은 단무지도 맛있다는 사실!) 책도 마찬가지다. 제목 앞에 긴 카피를 늘여 쓴 책은 ‘이렇게 자신이 없나?’ 싶을 뿐이다. 카피는 짧을수록 좋다. 독자의 미감을 무시하는 띠지는 정말, 책을 들었다 놓게 만든다. 유명인사들의 추천평? 가장 쓸데없다. 편집자가 부탁해서 쓴 글이라는 느낌이 역력히 드러나는 리뷰, 오글거릴 뿐이다. 추천평은 한 명, 또는 두 명이 알맞다. 저자의 글을 진심으로 신뢰하는 사람의 추천평이라면 지명도의 높고 낮음이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김민정 시인의 첫 산문집 『각설하고,』 는 2013년 12월 27일 출간된 책이다. 내 손에 들어온 책은 올해 1월 24일 발행된 초판 2쇄본. 불황인 출판시장에서 한 달여 만에 2쇄를 찍었으니, 꽤 잘 팔린 책이다. 스스로 꾸밀 줄은 모르나, 보는 눈은 떨어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나는 표지가 마음에 드는 책은 선뜻 구매한다. 온라인서점에서 일하고 있지만 『각설하고,』 를 산 건, 오프라인서점이었다. 웬만하면, 정말 웬만하면 책 제목을 스마트폰으로 찍어 놓고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것이 10년간 나의 도서 구매 행태였는데, 『각설하고,』 는 왠지 바로 손에 쥐고 싶었다. 표지가 너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아마, 지난해 출간된 구효서의 소설집 『별명의 달인』, 황현산의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 이후, 가장 눈에 띈 표지가 아니었을까.

저자 김민정과 썩 잘 어울리는 표지, 이건 누구의 그림일까? 표지를 뒤집어보니 폴란드의 화가 빌헬름 사스날이 자신의 아내를 그린 작품 「ANKA」 이었다. 편집자의 선택이었을까? 싶었는데, ‘작가의 말’을 읽어 보니 저자 김민정의 선택이었다. 책에는 “수소문한 끝에 빌헬름 사스날에게 이메일을 보냈는데, 수신 확인 10초도 안 되어 단박에 OK!를 해줬다”는 에피소드가 실려있다. 독자인 나에게도 퍽, 반가운 일이었다. 사족을 달자면, 바쁜 척하며 늦게 회신을 하는 사람만큼 비호감도 없다.

시인에게는 무궁무진한 시어들이 있을 텐데, 첫 산문집 제목을 왜 ‘각설하고’로 정했을까? 그것도 쉼표를 붙이고. 저자는 “제목을 ‘각설하고,’라고 지은 데는 내가 내 무릎을 찍게 될 때마다 그 구부러짐을 들키지 않기 위해 빈번히도 불렀다 앉힌 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가 자주 쓰는 말이라 함은 결국 내게 자주 필요한 말이라는 뜻도 될 것”이라며.

스물넷 12월에 시인이 되고 서른여덟 12월에 첫 산문집을 펴낸 김민정. 근 14년 동안 100여 편의 시를 썼고, 2천 매 남짓의 산문을 쓴 저자는 출판사 난다의 편집자이기도 하다. 그가 엮어 만든 책은 300여 권. 시인으로 문단계에 데뷔했지만 패션지, 와인잡지 에디터로 일하기도 했다. 이제는 작가와 독자를 이어주는 징검다리, 편집자로 활약하고 있다.
흔히 텔레비전에 나온 누구누구가 든 가방 봤어? 누구누구가 입은 옷도 유행이라며?라고들 입방정을 떤다. 나는 꿈꿔본다. 텔레비전에 나온 누구누구가 든 소설책 봤어? 누구누구가 든 시집도 유행이라며?의 시절을. 물론 PPL이라는 이름으로 출판사들 책 광고 책 홍보에 바쁘지만서도 그와는 별개로 배우가 저 좋아서 산 책, 저 좋아서 읽던 책, 저 좋아서 못 내려놓는 책 좀 클로즈업해주면 안 되나. 걸어 다니는 화보집인 배우들에게 지적인 소품들 가운데 책만 한 게 어디 있다고. (『각설하고,』 책책책, 이제 책 좀 읽읍시다 p.67)
『각설하고,』 차례를 펴고는, 퍽 흥미로웠다. 제목만 읽어도 비실비실 웃음이 났다. 몇 가지를 꼽아본다. ‘네가 누구인지는 네가 잘 아실 문제’, ‘가만 좀 내비두는 것의 미학’, ‘있을 때 잘해, 나는 돼지야’, ‘너는 네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솔직히 좀 너무하잖아’, ‘질문이 너무 어렵잖아’, ‘삽질, 거 괜찮아요’ 등. 타자에게 하는 말인가 싶지만, 스스로에게 하는 속삭임이다. “당신, 왜 이렇게 살아?”라는 훈계는 없다. 삶에 대해 비관적이지도, 그렇다고 무한한 긍정성을 품고 있지도 않다. 자조적인 글도 있지만 냉소적인 반응과는 다르다. 어떤 글에서도 사람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2부 ‘용건만 간단히’는 <한국일보>에 ‘길 위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이다. 바쁜 스케줄 탓에 저자는 점심시간을 할애해 휴대폰으로 원고를 썼다고 한다. 글은 짧다. 정말 ‘용건’만 간결하게 쓴 글이다. 짧아서 읽는 맛이 한결 매끄럽다.
요리사를 업으로 살던 선배가 한 달 전에 돌연 가게를 접었다. 예고도 없이 징후도 없이 왜 갑자기 이러느냐는 타박에 무심히 말하노니, 지겨워서라고 했다. 하늘 아래 남의 돈 먹고 사는 일에 호기로울 사람 아무도 없다며 나는 찌릿 눈을 흘기기도 했으나 솔직히 마음 한구석에 부러움이 치미는 것도 사실이었다. 야, 그럼 너도 때려치워.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명절에 동태전도 안 뒤집고 교정지를 넘기냐. 인생 별거 없다, 네 몸이나 챙기고 대충 살아. 참 나, 그럼 내가 대충 살았지 안 대충 살았나 뭐……. 투덜거렸지만 가만 보면 이게 다 버리지 못해서 벌어진 사단이란 충고 같았다. (『각설하고,』 버리는 일의 버거움 p.111)
산문집을 읽고 뿌듯한 느낌이 들 때는 “아, 나도 그런데” 싶을 때다. 다른 사람 이야기만으로 느껴지지 않을 때, 나도 뭔가 끄적거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할 때, 읽을 맛이 난다. 문득, 각설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지 떠올려봤다. 누구에게나 참견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 된 요즘, 말할 때도 점점 조심스럽고 ‘차라리 무관심이 낫지’하고 입을 닫아버릴 때도 많다. 입장이 바뀌어도 마찬가지다. 타인에게 적당한 무관심을 바라는 스스로를 대면하며, ‘이렇게 계속 살 거야?’ 자문하기도 한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 옆집에 사는 사람에게는 무관심하며 얼굴도 한 번 보지 못한 SNS 친구에게는 살갑게 구는 요즘 사람들, 그리고 나. ‘각설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 줄 알았는데, 읽을 거리가 너무도 많은 시대에 글자를 낭비하고 있는 건 아닐지, 머뭇거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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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설하고, 김민정 저 | 한겨레출판
시집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를 출간하며 솔직한 언어와 역동적인 감각으로 주목받아온 시인 김민정의 첫 산문집이다. 등단 후 근 14년간 여러 매체에 연재했던 글 가운데서 묶어낸 이 책은 책을 쓰는 삶(시인)과 책을 만드는 삶(편집자)을 동시에 살아가는 그녀가 일상 속에서 스쳐가는 ‘순간순간들의 등짝에다 찍찍 포스트잇을 붙여야 했’던 것들의 기록이다. 경쾌한 문체와 리듬감 있는 그녀의 문장들은 때론 유머스러운 말장난처럼, 때론 한 편의 시처럼 읽는 사람의 가슴을 간질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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