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들개이빨의 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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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은 평소 뭘 보고 듣고 읽을까? 언젠가 영감의 원천이 될지도 모를, 작가들의 요즘 보는 콘텐츠. (2024.05.08)


작가들은 평소 뭘 보고 듣고 읽을까?
언젠가 영감의 원천이 될지도 모를, 작가들의 요즘 보는 콘텐츠.



『절권도』

이소룡 저 | 서림문화사


짧지 않은 시간동안 만화를 그렸지만 늘 안개 낀 초행길을 헤매는 기분이다. 그래서일까. 옆구리만 쿡 찔러도 업계에서 얻은 통찰과 노하우를 줄줄 읊는 전문가를 줄곧 동경했다. 이소룡이 그 대표주자다. 저승에 가면 꼭 찾아뵐 생각이다. 살금살금 다가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고 싶다. 특유의 명언을 쏟아낼지, 아니면 손가락이 닿기도 전에 내 팔목을 비틀어버릴지 한번 보게. 벌써부터 너무 궁금하고 긴장된다. 나처럼 옆에서 깔짝대는 소인배가 한둘이 아니었을 테니, 생전의 이소룡은 많이 외롭고 귀찮고 짜증났을 것 같다. 얼마나 짜증이 났으면 평정을 유지하며 궁극의 경지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치열한 다짐을 두꺼운 책 두 권이 꽉 차도록 적었을까, 무엄하고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소인배답게 살짝 해보았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 아무 데나 펼쳐서 읽는다. 요즘 자주 읽는다. 무심한 표정의 저화질 삽화들도 귀엽고 좋다.

 



『사랑이 없어도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요시나가 후미 글그림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어떤 만화를 그리고 싶은가? 이 작품이 그 대답이다. 생생한 개성을 지닌 등장인물들의 절묘한 관계성, 작가의 취향과 가치관과 유머 감각이 산뜻하게 녹아든 대사, 섬세함과 귀여움을 능란하게 넘나드는 화풍. 흑백의 단순한 선으로 그려졌지만 탐스럽기 그지없는 음식들. 덤으로 완벽한 제목까지. 20년 가까이 옆에 끼고 읽고 또 읽고 혹시나 해서 어제도 또 읽었는데 낡은 느낌이 없다. 읽는 즉시 행복하고 편안해진다. 왠지 작가도 뒷짐 지고 편하게 휙휙 그렸을 것 같다. 술술 읽히는 작품을 만드는 건 결코 술술 풀리지 않는 고된 작업임을 잘 알면서도, 남의 멋진 작품은 어쩐지 마법처럼 한순간에 펑 하고 나왔을 것 같다는 억측을 맘대로 하게 된다. 그런 게 대가의 솜씨겠지. 이따 또 읽어야겠다.

 



영화 <버텨내고 존재하기>

권철 감독 | 다큐멘터리


일단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쓴 듯한 영화제목에 반했다. ‘현존하는 극장 중 두 번째로 오래된 곳에서 내가 사랑하는 뮤지션이 노래를 한다’는 줄거리에 또 반했다. 결정적으로, 영화 자체에 반했다. 음악, 말소리, 빛, 색깔, 공간감…… 모든 요소가 너무 좋아서 평소라면 쌍수 들고 환영했을 짧은 러닝타임이 아쉽게 느껴질 정도였다. 동시에 분했다. 어째서 이토록 아름다운 사람들과 음악과 공간이 굳이 비장하게 ‘버텨낼’ 각오씩이나 해야 하지? 그냥 이 세상 전세 낸 듯 두 다리 뻗고 편하게들 존재하면 안 되나? 그렇게 뻔뻔한 마음에선 아름다움이 싹트지 않는 것이 세상의 얄궂은 이치이긴 하지만. 어쨌든 나의 ‘버텨내고 존재하기’에는 확실히 도움이 되는 작품이다. 지금도 내 옆에서 조용히 재생되며 이 글쓰기를 버텨낼 힘을 주고 있다.

 



야구


야구장에서 안타 치는 소리를 듣고 갑자기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일화를 처음 들었을 땐 코웃음을 쳤었다. 아니 그냥 소설 쓰고 싶어서 썼다 그러면 되지 뭘 또 그렇게 멋 부린 거짓말을 하고 그래. 그러던 어느 여름날. 한적한 야구장 외야석에 비스듬히 앉아 맥주를 마시며 경기를 관람하다가,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하루키쨩, 진심이었군요. 한 폭의 그림 같은 더블 플레이를 보니, 이상하게 무지무지 만화를 그리고 싶은 거다. 야구장을 떠나자마자 귀신같이 귀찮아져서 결국 아무것도 그리지 않았지만. 확실한 건 이날을 계기로 야구에 전에 없던 애착이 생겼다는 거. 생각만 해도 즐겁다. 술과 정크푸드를 먹으며 기뻐하고 분노하고 만화 구상을 할 여유가 넉넉하게 주어지는 이 희한한 낭만의 공놀이를(내가 특정 구단의 열성팬이 아니라 가능한 여유겠지만). 연재 도중에는 경기 영상을 ASMR처럼 틀어놓고 일이 없을 때는 외야석에서 맥주를 마시며 아무 팀을 아무렇게나 응원한다.

 



벽난로 (사이버 불멍)


사실 주간 만화 연재를 하면 주 7일 정도는 넋이 나간 좀비 상태가 된다. 좀비에겐 치밀한 세계관과 자극적인 서사에 몰입할 정신력이 없다. 이때 가장 좋은 치유제는 벽난로 영상. 극적인 장치 하나 없이 그저 속삭이듯 타닥거리며 붉게 타오르는 불꽃을 한도 끝도 없이 바라본다. 연기도 그을음도 화재위험도 없는 쾌적한 사이버 불멍. 8시간쯤 지나면 반쯤 인간으로 돌아온다. 어떤 동영상 플랫폼에 가든 벽난로 콘텐츠가 있으면 반드시 틀어본다. 불이 뭐 다 거기서 거기 같지만 타닥 소리의 리듬감과 빨간 불빛의 명도 채도가 미묘하게 달라서, 하나하나 비교해 보고 나만의 안락한 벽난로를 찾아내는 재미가 있다.



절권도 (상)
절권도 (상)
이소룡
서림문화사
절권도 (하)
절권도 (하)
이소룡 저 | 이영복 역
서림문화사
사랑이 없어도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어도 먹고 살 수 있습니다
Fumi Yoshinaga 글그림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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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들개이빨(만화가)

구석에서 글 쓰고 그림을 그립니다. 펴낸 책으로 『먹는 존재』 시리즈와 『족하』, 『홍녀』가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만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선뜻 용기를 내지 못하고 방황하다 어영부영 고시촌에 흘러들어 갔습니다. 큰 점수 차로 연거푸 시험에 낙방하고 고시촌을 떠나 방송국과 사교육 업계를 전전한 끝에 인터넷 폐인이 되었습니다. 블로그 및 익명게시판 곳곳에 뻘글과 낙서를 올리며 현실 도피를 하던 중 불현듯, 진지하게 만화를 그리고 싶어졌습니다. 언젠가는 정말로 진짜 멋진 만화를 그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오늘도 어딘가의 구석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먹을 것을 생각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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