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김지연의 그림의 등을 쓰다듬기
예술가와 관객을 잇는 현대미술 비평가 김지연 작가의 에세이. 격주 화요일 연재됩니다. |
드문 여름날이었다. 낮에는 예고도 없이 큰 비가 내려 갑자기 우산을 샀다. 비가 그치고 서늘한 회색 공기가 가라앉았다. 아무래도 한여름이라고 볼 수 없는 날씨였다.
낯선 지역에 도착하면 거리를 거닐며 동네의 분위기를 살핀다. 그날도 그랬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는 그의 얼굴을 살피지만, 특별히 바라볼 얼굴이 없으면 사방을 둘러본다. 빈 곳을 관찰한다.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거리에서 나는 익명의 관객이고 그곳은 하나의 그림이다. 건물의 높낮이와 보도블럭의 넓이, 간판의 색깔과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옷차림, 가로수의 수종과 바람에 섞인 골목의 냄새 같은 것들이 모두 동등하게 거리의 분위기를 만든다. 때로는 언어보다 그 자리에 있는 것들이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한다.
그날 테이블 위에 남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가끔 생각한다. 늦은 저녁, 어느 동네에나 있을 법한 어두운 술집은 웅성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주말의 들뜬 분위기가 나머지 틈마저 채웠다. 부딪히는 술잔과 오가는 이야기 사이로 확인되지 않는 마음을 가졌다. 다음 장면은 오지 않았다. 사랑에는 재능이 있어도 연애에는 소질이 없는 사람들이 벌이는 흔한 사건이었다. 새벽 공기가 살짝 축축했지만 비는 더 이상 오지 않았고 새로 산 우산은 다시 펼치지 않았다.
테이블을 찍은 사진 한 장만이 그날을 증명한다. 정지된 한 장의 이미지지만 내게는 오후에서 깊은 밤까지 흐르는 시간이 보인다.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함께 존재했더라도 우리는 언제나 서로 다른 것을 안다. 그러나 마주 앉았던 테이블이 거기 있었다는 사실은 모두가 기억한다. 감정이나 기억처럼 구체적 형상이 없는 것들을 붙잡기 위해서는 때때로 테이블처럼 확실하게 눈에 보이는 것이 필요하다. 여름의 드문 날과 함께, 사람들이 떠나고 남겨진 테이블 위를 그린 그림들을 떠올렸다.
작가는 흐릿한 기억을 붙잡아 고정하기 위해 빈 테이블을 그린다고 했다. 인물이 있는 그림에서 우리는 인물을 먼저 본다. 가득 찬 그릇과 잔을 볼 때 역시 담겨 있는 것에 먼저 시선을 둔다.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이 부재하고 나서야 시야를 넓히고 전체의 장면을 본다. 누군가의 흔적이 남겨진 빈 의자, 빈 그릇과 술잔은 이제 분위기를 담는다. 당신만 알거나 나만 아는, 혹은 우리 모두 눈치채지 못한 뉘앙스가 거기 있다.
한 장의 그림은 정지된 순간이 아니라 시간을 통과하는 분위기를 짓는다. 넓게 펼쳐내며 화면을 장악하는 붓질의 방향은 그날의 감정을, 물감의 농도는 테이블 위로 흐르던 공기를, 유리잔 위로 어른거리는 빛은 그곳에 닿았던 흔들리는 눈빛을 담는다. 대조적인 색깔의 리듬으로 오가는 목소리의 높낮이를 가늠한다. 망설이며 움직인 작은 터치와 함께, 입꼬리의 미세한 각도처럼 쉬이 눈치채기 어려운 것들이 산재해 있다. 잔과 잔 사이, 빈 접시 위, 테이블과 의자의 간격에서, 끊임없이 돌아봐도 여전히 선명한 그날의 분위기를 목격한다.
소설집 『기후변화 시대의 사랑』의 서문에서는, “뉘앙스는 텍스트보다 우위에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말을 들어도 그 말을 전부 믿기보다 표정의 빛과 그림자를 살피며 진짜 언어를 찾으려 한다고. 어쩌면 테이블 위로 오갔던 말보다 중요한 것은 주변의 공기를 채운 뉘앙스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떤 이미지들은 영상보다 더 생생하게 상황을 은유한다. 한 작가의 촬영 과정을 들은 적이 있다. 아름다운 해변을 담은 작가의 사진 속에는 빨간색 탱탱볼이 갑자기 등장한다. 마치 합성처럼 보이는 이 사진을 찍기 위해 작가는 탱탱볼을 높이 던지고 빠르게 달려가 장면을 포착한다. 해변은 낯선 유토피아를, 탱탱볼은 낙원에 안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작가 자신의 모습을 상징하지만, 나는 그의 작품을 볼 때마다 다른 장면을 떠올린다. 해가 쨍쨍한 해변을 달리는 그의 몸짓, 이어서 찰칵 소리와 함께 떨어지는 탱탱볼과 역시나 긴장이 풀려 털썩 주저앉는 그의 실루엣이 보인다. 사진은 포착된 장면 바깥으로 넓어지며, 앞뒤의 시간을 이어낸다. 그런 의미에서 사진은 언제나 실행 중인 이미지다.
회화나 사진은 이제 낡은 장르라지만, 여전히 사람의 몸짓이 묻어 있는 이것으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하나의 이미지는 앞뒤로 이어지는 시간을 횡적으로 담고, 이미지 속의 분위기는 오래전부터 쌓아온 이야기를 종적으로 담는다. 가로축과 세로축이 교차하는 곳에 작가의 시선이 닿고, 붓을 휘두르거나 달려가 셔터를 누르는 몸의 흔적이 포개진다. 이미지는 그렇게 순간이 아니라 영원을 붙잡는다. 직전의 과거로부터 직후의 미래까지 흐르는, 영원히 재생되는 하나의 장면이 한 장의 이미지 속에 있다.
어떤 장면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 장면이 지금 눈앞에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무언가가 부재하기 때문에 그것을 기억한다. 그리거나 찍는 행위도 마찬가지다. 그날 밤이 깊어지고 공기가 조금 더 서늘해질 즈음, 자리에서 일어나며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비어버린 테이블 위에는 불규칙하게 늘어선 병과 잔 두 개, 반쯤 빈 접시, 동그랗게 내려앉는 노란 불빛이 있었다. 당신도 뒤를 돌아보았는지 모르겠다. 사진을 더 찍어둘걸, 같은 생각은 하지 않는다. 분위기는 거기 테이블 위에 남아 있고, 이미지는 한 장이면 족하다. 마치 오랫동안 곁에 두고 볼 한 점의 그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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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가. 예술과 도시, 사람의 마음을 관찰하며 목격한 아름다운 장면의 다음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쓴다. 현대미술과 도시문화에 관한 글을 다수 매체에 기고하며, 대학과 기관, 문화 공간 등에서 글쓰기와 현대미술 강의를 한다. 비평지 <크리티크 M>의 편집위원이며, 예술 감상 워크샵, 라디오 방송 등 예술과 사람을 잇는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쓴 책으로 『당신을 보면 이해받는 기분이 들어요』(2023), 『필연으로 향하는 우연』(2023), 『반짝이는 어떤 것』(2022), 『보통의 감상』(2020), 『마리나의 눈』(2020)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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