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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 칼럼] 별 가루가 흩어질 때

김지연의 그림의 등을 쓰다듬기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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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해 작품을 만들고, 그 이야기를 듣고 글을 쓰고, 작품을 바라보고 글을 읽는 것, 결국 모두 이어지기 위한 일이다.


예술가와 관객을 잇는
현대미술 비평가 김지연 작가의 에세이.
격주 화요일 연재됩니다.  


별의 조각들이 거기 있었다. 서교동 골목의 주택을 개조한 작은 전시장이었다. 산뜻한 색과 섬세한 붓 터치로 야무지게 영근 별의 물질이 이쪽 벽에서 저쪽 벽을 건너며, 공간의 모서리와 모퉁이마다 빛나고 있었다. 이 물질의 기원을 떠올렸다. 

여름이었지만 비가 와서 긴소매를 입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연히 들어선 전시장에서 처음 보는 작가의 첫 개인전을 만났다. 전시의 이름은 《별의 물질》. 주의 깊게 바라보지 않으면 흩어져 버리는 것들을 기록한다고 했다. 서늘한 전시장 안에 작지만 꽉 찬 우주가 펼쳐졌다. 이제 막 세상에 이야기를 펼친 자리, 작가들의 첫 개인전은 서툴지만 유난히 반짝인다. 때로는 대단한 작가의 작품보다 그런 작고 빛나는 전시가 마음에 남는다. 별 가루가 반짝이는 사이에서 나의 처음들이 스쳐 지나갔다. 


김은주 개인전 《별의 물질》(킵인터치, 2020)

그 여름에는 소설 수업을 듣고 있었다. 단지 수업에 등록하기까지 몇 년이 걸렸다. 첫 수업이 끝나자 삶의 모퉁이를 하나 돌았다는 생각에 벅찬 마음과 안도감이 동시에 차올랐다. 나뿐이 아니었다. 다양한 경력을 가진 수강생들은 모두 별처럼 반짝이는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은 항상 빛나지. 하지만 이제 모퉁이를 돌았을 뿐, 다음 모퉁이까지 얼마나 오래 걸어야 할지 아직 모른다. 기쁨만으로 가득 찬 여정이 아닐 거란 사실만 안다. 걷다가 넘어지고 무참히 깨져도 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고 나는 또 넘어진다. 빛나는 처음의 마음은 그래서 애틋하다. 물론 나는 아직도 장편 소설의 첫 장을 완성하지 못했다. 

누군가 처음의 마음에 글을 보태 달라고 하면 망설여진다. 그때도 여름이었다. 흙으로 작업하는 작가가 첫 개인전의 서문을 맡겼다. 다른 사람의 글을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신진 작가의 글을 쓰는 일은 해석의 자유가 큰 반면 책임감도 크다. 자기 이야기를 꺼내는 데에 아직 익숙지 않은 사람의 말을 들으며, 그의 세계를 천천히 더듬어 간다.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깊이 닿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가능하다면 자신도 발견하지 못한 것을 꺼내 주고 싶다. 

전시나 작품에 대한 글을 쓰고 나면 작가의 피드백이 있기까지 약간의 긴장이 있다. 내가 찾아낸 것이 맞을까, 우리가 연결되었던 걸까, 계속 되묻는다. 전시 첫날, 작가는 글을 읽고 눈물이 났다며 짧은 편지를 건넸고, 집에 오는 길에 편지를 읽으며 나도 조금 울었다. 그는 눈물의 이유가 ‘글이 좋아서’라고 했지만, 사실은 타인에게 자기 이야기가 닿았다는 감격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모두 내가 만든 것이 누구에게도 닿지 못할까 봐 떨곤 하니까. 마음을 다해 작품을 만들고, 그 이야기를 듣고 글을 쓰고, 작품을 바라보고 글을 읽는 것, 결국 모두 이어지기 위한 일이다. 이곳에는 늘 여러 겹의 마음이 있다. 

그러는 동안 계속해서 별의 물질을 지켜보았다. 작은 그룹전에서, 청년 작가들의 아트페어에서, 작가의 SNS 계정에서. 시절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색과 솜털처럼 새겨진 작은 붓 터치들을 목격했다. 작은 조각들은 어떻게든 더욱 단단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어떤 태도로 그리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무언가 만드는 건 태도의 문제다. 나는 언젠가 글을 쓰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을 자주 한다. 태도를 만드는 건 삶의 영역이며, 표현은 꼭 글이 아니라도 괜찮을 거라고. 전하고자 하는 건 글자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것이다. 그림도 같다. 한 작가의 성장을 지켜보는 건 그가 세상을 향해 쌓는 태도를 지속해서 응시하는 일이다. 첫 개인전 후 사라지는 작가도 많으니, 언제나 주어지는 기회는 아니다. 지켜보는 대상의 다음을 볼 수 있는 건 고마운 일이다. 

흙을 만지던 작가는 취직하겠다는 소식을 전했다. 아쉬웠지만 한편 그에게 필요한 과정일 거라는 생각이 앞섰다. 다만 흙을 쥐던 그의 손길을,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하던 그의 눈빛을, 편지에 담긴 마음을 기억한다. 사라지지 않을 심지가 거기 있었다. 당신이 만드는 것이 무어든, 언젠가 글을 보탤 기회를 주었으면 좋겠다는 말만 전했다.  

몇 번의 여름을 보낸 뒤, 오랜만에 별 가루의 다음 장면을 만났다. 줄곧 단단해지던 별의 조각들은 수면 위로 내리는 반짝임이 되었다. 고운 별 가루가 흩어졌다 모이며 파도의 모양을 그려냈다. 피어나는 사랑과 함께 멀리 갈 채비를 마친 듯했다. 그는 단단해지기보다 유연해지며 사랑의 자리를 만들고 있었다. 처음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서둘러 꼿꼿해지기보다 널리 감싸 안아야 한다는 사실을 이미 깨달은 것으로 보였다. 


김은주, 〈파도〉 2022, oil on canvas, 112.1 x 112.1 cm

언젠가 작가는 아침에 일어나 어제 그리다 만 그림을 가만히 바라보며 잠시 명상을 한 뒤 또 같은 하루를 시작한다고, 그런 시간이 좋다며 동그랗게 웃었다. 한 사람의 세계가 어디까지 넓어지고 깊어질지 모른다. 하지만 꽁꽁 뭉쳐 단단해지기보다 유연해지길 택하는 사람이 조금 더 멀리 갈 수 있다. 그리하여 시간이 흐른 뒤에 비로소 단단해진다. 

처음의 마음은 물론 흐려지거나 변한다. 펼쳐지고 증식하며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흩어져 버릴지도 모르는 것들을 유심히 관찰해 기록한다는 작가의 태도처럼, 처음의 마음을 기억해 주는 것은 바라보는 이의 몫이 아닐까. 언젠가 아주 멀리 나아간 별의 조각을 보면, 혹은 흙을 어루만지던 손으로 만들어 낸 무언가를 만나면, 나는 그 기원을 떠올리며 동그랗게 웃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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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지연(미술비평가)

미술비평가. 예술과 도시, 사람의 마음을 관찰하며 목격한 아름다운 장면의 다음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쓴다. 현대미술과 도시문화에 관한 글을 다수 매체에 기고하며, 대학과 기관, 문화 공간 등에서 글쓰기와 현대미술 강의를 한다. 비평지 <크리티크 M>의 편집위원이며, 예술 감상 워크샵, 라디오 방송 등 예술과 사람을 잇는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쓴 책으로 『당신을 보면 이해받는 기분이 들어요』(2023), 『필연으로 향하는 우연』(2023), 『반짝이는 어떤 것』(2022), 『보통의 감상』(2020), 『마리나의 눈』(2020)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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