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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랑 칼럼] 투쟁의 반복으로서 삶 -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

윤아랑의 써야지 뭐 어떡해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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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 골딘의 삶 속에서 일어난 반복들을 구조화함으로서, 포이트러스는 생활, 정치, 예술, 경제 등 세계의 많은 부분들이 서로 기이하게 뒤얽혀 있음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런 반복을 견디고 반복의 수준을 선택하며 자신의 무기로 쓸 수 있는 정치적 주체 모델로서 낸 골딘을 조명하고 있다.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을 통해 동시대 문화를 탐구했던 윤아랑 평론가가
대중문화, 시각예술 등 다양한 작품을 자유롭게 리뷰합니다. 격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영화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 공식 포스터

무력감을 억누르기 힘든 때다. 올해 초에 일어났던 사건도 몇 년 전의 일처럼 느껴지고, 세상은 내 의지와 무관하게 무자비하게 움직이며 매일매일 누군가를 낭떠러지로 몰아넣는다. 그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하나’보다는 ‘무엇을 할 수 있나’를 더 많이 되뇌게 된다. 물론 이 세계의 역사에서 안 그런 때가 얼마나 있겠냐마는, 그럼에도 이 무력감에 대처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지금을 살아가는 나는 하여튼 생각하고 마는 것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무력감에 과연 어찌 대처하고 있을까?

2022년, 사진작가 낸 골딘은 자신의 전설적인 사진집 『성적 의존의 발라드(The Ballad of Sexual Dependency)』의 새 에디션을 내놓으며 다음의 문장들을 썼다. “최근 누군가가 내 작업 덕분에 자살을 피했다고 말해줬다. 만약 내가 한 사람의 생존을 도울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내 작업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에세이를 처음 읽었을 땐 몹시 아름다운 말이라 생각하면서도, 어쩌면 이는 무력감에 대해 너무 순진하고 소박한 대처에 그치진 않나 의심했었다. 안 그래도 골딘은 종종 평자들에게 ‘시대착오적인 낭만주의자’ 취급을 받곤 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영한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를 보면서, 나는 내가 틀렸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영화는 골딘의 문장들이 액추얼하고 필사적인 투쟁의 언어임을 아주 강렬하게 증언하고 있던 것이다.

2014년 낸 골딘은 베를린에서 손 수술을 받은 후 진통제로 오피오이드 계열 약품인 옥시콘틴을 처방받았다. 그 당시에는 위험성이 지금처럼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사실 이 진통제는 아주 강력하며 부작용도 심각한 마약성 진통제였다. 그는 옥시콘틴에 순식간에 중독되었으며, 죽음의 문턱까지 밟았다 돌아올 만큼의 고통에 3년가량 시달리다 겨우겨우 중독에서 벗어났다. 이후 골딘은 이런 고통이 자신만의 경험이 아니라 오피오이드 위기라 불리는 광범위한 사회적 문제임을 깨달았고, 그 원인이라 할 (옥시콘틴의 제약사인) 퍼듀 파마와 (회사의 소유자인) 새클러 가문에 대한 투쟁을 시작했다. 여기서 감독 로라 포이트러스는 그런 골딘의 옆에 붙어 이 투쟁을 카메라에 충실히 담는 한편, 이 투쟁 이전의 골딘의 삶을 골딘 자신의 안내와 함께 차근차근 살펴본다.

한데 이상하다. 전자의 현재와 후자의 과거를 계속 교차시키면서, 포이트러스는 이 둘을 (가령 현재가 과거에 코멘트를 더하는 식으로) 적당히 접합하는 대신 적잖이 비약적으로 병치한다. 낸 골딘의 언니인 바바라가 가족 속에서 겪는 수난 다음에 골딘이 새클러 가문에 대한 투쟁을 시작하는 순간이 이어지고, 맨해튼 바워리에서 골딘이 “가족”이라 부른 퀴어 커뮤니티와 지낸 나날 다음에는 투쟁이 구체적인 성과와 실천을 거두는 장면이 이어지는 식인 것이다. 지안프랑코 로시나 차재민처럼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들 정도의 비약은 아니나, 이는 분명 이상한 병치 방식으로 보인다.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가 하여튼 낸 골딘의 전기영화라는 건 아마 대다수가 동의할 테다. 허면 이렇게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이 방식은 골딘의 삶을 이전과 다른 맥락 속에서 바라보고 이해하려는 모종의 시도라고 말이다.


영화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의 한 장면

누군가는 낸 골딘의 삶이 투쟁의 연속이었다고 할 것이다. 물론 그럴듯한 결론이다. 퀴어 여성으로서 겪은 다양한 억압과 폭력, 그리고 그에 대한 매번 다른 투쟁. 그러나 적어도 이 영화에 따르면, 그건 너무 쉬울뿐더러 부정확한 결론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골딘의 삶은 투쟁의 반복으로 재구축되기 때문이다. 다만 이때의 반복이란 차이를 지닌 반복, 즉 다른 형태로 나타난 사건들을 적극적으로 겹쳐 놓는 반복임을 명심하자. 바바라를 자살로 몰아넣은 (여성혐오적이며 또한 퀴어혐오적인) 가족과 사회의 힘은 훗날 골딘의 “가족”을 모욕하고 죽음으로 몰아넣은 에이즈 위기에서, 그리고 더 훗날 골딘을 죽음의 문턱까지 몰아넣고 방치한 오피오이드 위기에서 반복된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골딘에게 있어 “스스로를 믿을 수 없”게끔 한 부모에 맞서 자신의 ‘소수자적’ 경험을 표현하려는 필사의 시도였던 사진은 훗날 에이즈 위기에 맞서 퀴어 커뮤니티의 ‘애도’를 수면 위에 올리고자 큐레이팅했던 전시 《증언들: 우리의 소멸에 맞서》에서, 그리고 더 훗날 오피오이드 위기에 맞서 새클러 가문의 무책임함을 가시화하고 그들의 “피 묻은” 자선기금을 거부할 것을 미술관과 대학에 요구한 P.A.I.N.(반 오피오이드 운동 단체)의 운동에서 반복되는 것이다. (초반부에 P.A.I.N.의 한 관계자는 자신들이 반 에이즈 위기 운동 단체인 액트 업(Act Up)의 활동을 의식적으로 벤치마킹했다고 밝히기도 한다) 혹은 좀 더 미시적인 예시로, 미 국립예술기금이 “예술에 중점을 두지 않았다”는 이유로 《증언들》의 보조금을 취소한 데에 반대해 국가예술훈장을 거부했던 (그 자신이 클로짓 게이이기도 했던)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을 현재의 골딘이 (무의식적으로?) 반복한 것을 거론할 수도 있을 테다. 그런데 어떻게? 유력 예술가로서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 미술관들이 자기 작품을 전시하지 못하도록 협박하는 식으로.

이렇게 골딘의 삶 속에서 일어난 반복들을 구조화함으로서, 포이트러스는 생활, 정치, 예술, 경제 등 세계의 많은 부분들이 서로 기이하게 뒤얽혀 있음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런 반복을 견디고 반복의 수준을 선택하며 자신의 무기로 쓸 수 있는 정치적 주체 모델로서 낸 골딘을 조명하고 있다. 자본가들의 돈세탁과 문화예술의 제도가 긴밀히 공모하고 있듯, 그리고 골딘이 생활과 예술과 시위를 가로지르며 여전히 투쟁을 이어오고 있듯. 물론 그렇게 투쟁이 쭉 반복되는 삶은 차라리 죽는 게 편할 만큼 두렵고, 고되며, 고통스러울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도 몹시 솔직하게 다뤄지듯, 사실 그건 골딘 역시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하지만 그는 그 “악취 나는” 것들을 외면하거나 ‘극복’하는 대신 기어코 대면하고 끌어안은 채 나아가려 애쓴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혹은 “열렬한 희망.” 여기서 나는 ‘퀴어한’ 의지의 한 결정을 마주친다. 무력감 앞에서 우리 모두가 낸 골딘처럼 살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그의 투쟁과 태도를 각자가 할 수 있는 한 각자의 방식으로 반복해보려는 시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바로 그것을,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바라고 있다.

한데 그렇다면, 골딘이 속한 땅과 세대와 명성과 사회에서 멀리 떨어진 한국의 우리들은 어떤 식으로 반복을 할 수 있을까? 대중을 혐오하거나 ‘매너시위’ 따위에 만족하지 않으면서도 실천할 수 있는 투쟁 말이다. 감히 말하건대, 이 시도는 골딘의 경우보다 더 험난한 과정이 될지도 모른다. 반복은 태도에 달려있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환경에 달려있기도 하다. 그건 골딘이나 영화의 한계는 아닐 것이다. 그보다 그건 영화가 끝난 후 극장을 나오면서 스스로에게 (다시금) 건네받은 숙제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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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윤아랑(평론가)

비평가.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을 주로 다루며, 주체성과 현실 감각을 문제 삼는 문화비평에 관심이 있다. 지은 책으로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2022),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공저, 2023), 『악인의 서사』(공저, 2023)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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