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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의 볼만한 세상] 참는 자에게 화가 있나니 - 'Beef(성난사람들)'

4화 - 드라마 <Beef (성난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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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의 배경은 꿈의 나라 라라랜드, LA다. 누군가는 꿈속에서 살고 있을 LA에 사는 아시안들의 현실은 분노로 가득하다. (2023.04.18)


김혜경 광고AE가 격주 화요일,
볼만한 드라마와 콘텐츠를 소개합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Beef (성난사람들)> 포스터 

한국인에게만 있는 병이 있다. '화병'이다. 무려 미국 정신의학회에 'Hwa-Byung(화병)'이라는 한국식 표기가 등재돼 있을 정도다. 각종 기사에 따르면 화병은 특히 40, 50대 여성에게서 많이 발견되며 요즘엔 젊은 사람들에게도 많이 나타나는 추세다. 쓰다 보니 화가 난다. 끓는 화를 눌러 참다가 속이 다 타들어 가는 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억울해서 화가 난다. 네 대가리는 꽃밭이라 화병(火病)을 모르는 화병(花甁)인 거니? 보이지 않는 불특정 다수를 향해 윽박지르듯 키보드를 거칠게 두드리다 보니 속이 아주 조금 풀리는 것 같기도. 음, 나는 역시 한국인이 맞다.

"몇 세대에 걸친 잘못된 결정이 축적된 기분이에요."

어쩔 수 없지만 그게 나다. 동시에 수많은 동북아시안들과 미국에 사는 아시안 아메리칸들일테고, 또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Beef(성난 사람들)>에 나오는 '대니(스티븐 연)'와 '에이미(앨리 웡)'이기도 하다. 대니와 에이미의 로드 레이지로 시작되는 이 드라마는 식을 새 없이 타오르기만 하는 그들의 분노를 동력 삼아 질주하듯 이어진다. 타오른 끝에 재가 되는 10화에 이르기까지 화를 끓이는 장작이 되는 요소는 셀 수없이 많다. 스포일러를 최대한 자제하고 싶으므로 드라마의 세부적인 내용은 쓰지 않겠지만, 한국인 시청자라면 미묘한 표정과 대사에서도 분노의 원인을 200%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등장인물이 웃고 있을 때조차 표정 밑에 숨겨진 진짜 감정이 보일 것이다. '새들은 노래하는 게 아니야, 고통에 울부짖는 거지'라는 1화의 타이틀처럼, 우리는 같은 언어를 공유하는 새일 테니까.

드라마의 배경은 꿈의 나라 라라랜드, LA다. 누군가는 꿈속에서 살고 있을 LA에 사는 아시안들의 현실은 분노로 가득하다. 유당 불내증 있는 아시안들의 'Beef(소고기란 뜻 외에 불평불만이란 뜻도 있다)'는, 주류 세상을 소화하지 못해 탈 난 소수자들의 아우성이다. 한국에 있는 부모님을 모셔오고 싶은 조 씨 가문 장남이지만 돈도 머리도 운도 따라주지 않는 대니와, 부모님과 연을 끊다시피 하고 뼈 빠지게 일해 부유해졌으나, 여유는 예술가 집안의 재능 없는 남편만이 누리는 삶을 사는 에이미가 그렇다. 정반대의 인생을 사는 것처럼 보이는 그들의 존재는 본질적으로 닮아있다. 결과가 어쨌거나 아등바등 죽을 정도로 노력한다는 점에서, 가까운 사람에게도 오롯이 이해받지 못하는 분노를 품은 외로운 존재라는 점에서.

"너도 나이 들면 알게 돼. 뒤돌아보기만 하면 추락하고 말아. 문제가 뭐든 그냥 묻어두렴."

엄마는 에이미에게 충고한다. 시어머니 역시 "네가 살고 싶은 진실은 너 스스로 만드는 거야"라고 말한다. 노력해도 해결되지 않는 분노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을 경험한 인생 선배들의 조언이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분노의 원인이 되는 상황을 외면한 채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길처럼 여겨진다. 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화가 난다고 화를 내면서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특히 마땅히 화내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나만 참으면 될 것 같은 일이라면 더더욱 인내해야 한다. 사사건건 심기를 어지럽히는 직장 상사의 멱살을 잡고 싶지만 참고, 반말하는 택시 기사에게 똑같이 돌려주고 싶지만 참고, 뻔뻔하게 새치기한 뒤 자리에 냉큼 앉는 사람을 밀쳐 버리고 싶지만 참고, 이런 사소한 일에 화내기 싫어서 참는 것처럼. 화가 나도 화를 내지 않는 게 여러모로 안전한 선택이니까. 참지 않는다면 "아무도 널 사랑하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하나밖에 없는 선택지도 선택이라고 하던가? 어쩌면 내가 선택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허상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만큼은, 대니와 에이미는 참지 않는다. 그들은 각자의 닳아버린 인내심(지)에 기어이 불을 붙여 서로의 인생에 폭탄이 된다. 꼬리에 꼬리는 무는 복수극을 보다 보면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까지?'라는 생각도 든다. 그들의 꼬인 속만큼이나 꼬여가는 인생이 안타까울 지경이다. 내면의 가장 깊은 곳을 까발리고 직시하게 만드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공감성 수치로 인해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를 수밖에 없을 때도 있다. 그럼에도 그들을 계속 지켜보게 되는 것은, 이들의 치열한 갈등이 다소 극단적일지언정 소통을 향한 몸부림처럼 느껴져서다. 가족도 친구도 동료도 영원한 타인인 것만 같은 이 세상에 혼자 남겨지고 싶지 않아 발악하는 그들은 또 다른 나이기도 하다.

주변인들의 충고와는 정반대로, 뒤돌아보고 추락하기를 택하는 그들의 삶은 밑바닥에서도 계속된다. 다행스럽게도 그 옆에는 누군가 있다. 혼자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듯이. 고통스러운 여정 끝에 도달한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위로받았다. 이 드라마 자체가 분노를 자신의 일부로 안고 사는 사람들을 위한 이성진 감독의 살풀이 같달까. 그러니 '人(사람 인)' 대신 '忍(참을 인)'을 쓰는 한국인들이라면 꼭 보시길 바랍니다. 저의 가운뎃손가락을 걸고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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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혜경(광고AE, 작가)

회사 다니고 팟캐스트 하고 글 써서 번 돈으로 술집에 간다. 『한눈파는 직업』, 『아무튼, 술집』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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