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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종환의 제주에서 우리는] 내 집이 담백하면 좋겠다
'전종환의 제주에서 우리는' 2화
한 달을 살아본 지금 나는 내 선택이 옳았음을 안다. 계획했던 예산보다 돈을 많이 썼기 때문에 사고 싶은 걸 덜 사고 외식도 줄여야 하지만 그럴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2023.04.17)
격주 월요일, <채널예스>에서 ‘전종환의 제주에서 우리는’을 연재합니다. 6개월 육아 휴직을 낸 아빠 아나운서 전종환이 제주 일상을 이야기합니다. |
그러니까 가족들과 제주에 살기로 결심하니 당장 필요한 건 반년 가까이 머물 집이었다. 제주는 생각보다 넓었고 지역에 대한 이해는 떨어졌으니 막막할 노릇이었다. 제주 바다와 한라산 풍경을 담은 집이 탐났지만 높은 가격을 확인하고는 쉽지 않을 일임을 직감했다. 나는 매일 포털 사이트에서 '제주'와 '연세'를 검색하며 제주로 떠날 날을 기다렸다.
마흔 넘은 남성이 남은 생의 꿈을 말하는 건 민망한 일이겠으나 그 민망함을 무릅쓰고 용기 내 보자면 나는 내가 살 집을 짓고 싶다. 이 행복한 상상을 두고 할 말은 많을 것이나 최대한 간단히 정리해 보자면 나는 내 집이 담백하면 좋겠다. 담백한 공간에 머문 시간만큼 내 삶 역시 담백해지리라 믿기 때문이다. 우선 마당을 중심으로 단층짜리 두 개 건물을 짓고 싶다. 한 집을 두 개 건물로 나누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일상은 보기에 따라 번잡할 수도 있겠으나 부엌과 화장실과 서재와 침실이 한 데 모여 있는, 그래서 최고의 효율성을 자랑한다는, 한국의 아파트 공간 배치에서 언젠가는 해방되고 싶다. 비효율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대신 그 공간이 갖는 의미를 곱씹으며 남은 생을 살고 싶다.
나는 각각의 공간에 명확한 역할을 부여할 것이다. 침실에는 침대와 좁은 탁자, 낮은 조도의 조명을 둘 것이고 거실에는 그림 한 점과 편한 의자를 배치할 것이다. 이 공간들은 자는 곳과 쉬는 곳이라는 본질적인 기능에 충실하면 족할 것이다. 부엌에는 조금 더 욕심이 난다. 커피 머신과 음식을 만들기 위한 각종 도구를 놓기 위해 가능한 널찍했으면 좋겠다. 먹고, 자고, 쉬기 위한 이 공간들이 집의 절반이 될 것이다.
다른 한 동은 내가 사랑하는 책과 음악, 옷, 안경, 구두로 채우고 싶다. 모두 고단했던 내 삶을 지탱해 준 고마운 벗 들이다. 나를 읽고 쓰게 만들어준 문인들의 책들에게 마땅히 자리를 내어 주어야 할 것이며 뛰어난 장인이 만들어준 슈트와 구두, 안경, 가방들에게 나머지 공간이 돌아갈 것이다. 이 사물들은 건물 가운데 옹기종기 자리를 잡고 앉아 언젠가 아들 범민이 "아빠, 이거 나한테 주면 안 돼요?"라고 말해 줄 날을 기다릴 것이다. 글과 음악과 옷과 구두, 가방은 내 피로한 삶에서 모두 동등하게 소중했다.
그 집에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물건만 있을 것이다. 혹시 올지 모를 손님을 위한 게스트 룸과 여벌의 이불, 불필요한 인테리어 소품 자리는 없을 것이다. 오지 않을 미래를 준비하기보다는 오늘, 바로 여기에 집중하는 집이었으면 좋겠다.
남은 생의 꿈이라 얘기했지만 나는 이미 나만의 공간을 꾸며보려 일을 벌인 적이 있었다. 회사가 여의도에서 상암동으로 이사를 가면서 나는 경기도에 위치한 타운 하우스를 구입했다. 작은 앞마당이 있는 복층 집이었다. 우리 부부는 그 집을 꾸며보기로 작정했다. 관련 서적을 뒤져 우리의 바람을 구현해 줄 건축가를 찾았고 큰돈을 투자해 모든 공간을 재배치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우리는 실패했다.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지 묻는 건축가의 질문에 마땅한 고민이 없었던 우리는 "요가 룸으로 쓸까요?" (우리는 요가 경험이 없었다) "술을 먹는 방. '술 방'으로 써볼까 해요."(굳이?)처럼 빈곤한 철학만을 드러냈던 것이다. 집은 아름다웠으나 어딘가 과했고, 공간의 쓰임은 불분명했다. 나는 공간을 장악하지 못했다.
건축가이자 교수인 서현은 그의 책 『내 마음을 담은 집』에서 이렇게 말했다.
"좋은 집이란 살 사람의 마음이 돌아가고 싶은 집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결국 그 마음이 담겨 있어야 한다. 집을 통해 만나야 하는 건 사람의 마음이지 타인의 탄성이 아니다."
이 글을 읽고 나는 타인의 탄성이 나올 집을 꿈꿨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고작 타인의 탄성을 갈구했던 사람이었던 셈이다.
살 집을 수소문한 끝에 우리는 제주시 조천읍에 위치한 아담한 아파트에 살기로 결정했다. 준비한 예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단정한 집이었다. 하지만 계약 당일 날 아침, 어떤 미련이 남았는지 한 번 더 포털 사이트에 제주의 집을 검색했고 정확히 내가 원하던 집을 발견했다. 뭣에 홀린 듯 나는 서귀포로 향했다. 작은 앞마당이 있었고, 각각의 공간은 서로를 침범하지 않았으며, 저 멀리 한라산 풍경까지 담고 있는 집이었다. 관광객이 드문 조용한 동네인 점도 마음에 들었다. 나는 부동산에 전화를 걸어 오늘 예정됐던 계약을 취소하겠노라고 양해를 구했다. 이 집을 위해서라면 1백만 원의 가계약금은 기꺼이 포기할 수 있었다.
한 달을 살아본 지금 나는 내 선택이 옳았음을 안다. 계획했던 예산보다 돈을 많이 썼기 때문에 사고 싶은 걸 덜 사고 외식도 줄여야 하지만 그럴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매일 아침 나는 아내와 아이보다 일찍 일어나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커피를 내리고 아침을 준비한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마당 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다. 막 떠오른 햇볕을 몸으로 느끼며 이름 모를 새의 지저귀는 소리를 듣는다. 나는 아내와 아이가 부디 조금 더 늦게 깨어나길 바라지만 이내 잠에서 깬 아들 범민이 우렁차게 외치며 달려온다.
"아빠, 일어났어?!"
그렇게 제주에서의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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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아나운서. 에세이 『다만 잘 지는 법도 있다는 걸』을 썼다. 6개월 동안 육아휴직을 하고 아내와 아들과 제주에서 살고 있다.
<서현> 저13,950원(1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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