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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나의 술 맛 멋] 산다는 것은 겨울에 따뜻한 것

2화 : 겨울에 더욱 빛나는 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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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따시다는 것을 나는 그 사람이랑 있으면서 알었소. 산다는 것은 겨울에 따뜻한 것입디다. (2023.02.21)


소설가 김혜나가 전통주를 음미하며,
소설가의 일상, 술의 향과 맛, 시와 소설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격주 화요일에 연재됩니다.



전통주의 매력에 빠져들며 증류주 원액만을 담은 소주를 맛보고 싶어졌다. '쌀', '물', '누룩'1)이라는 세 가지 재료의 조합으로 빚은 술을 발효해 증류기에 넣고 한 방울씩 내린 전통 방식의 술.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초록병 소주는 주정에 물과 감미료를 혼합한 제품이 대부분이라, 전통주 혹은 지역 특산주로 분류된 술을 찾아보았다. 2017년부터 전통주와 지역 특산주 온라인 판매가 허용되어 있어 주문하기는 수월했다.

온라인상에서 고르고 골라 처음으로 구매한 술은 '겨울소주'였다. 증류주의 밑술을 발효할 때 과일이나 꽃을 첨가해 원재료의 맛을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경우도 많지만, 아직은 한국의 증류주를 많이 접하지 못한 터라 부재료가 들어간 술보다는 기본적인 재료로 빚은 술을 먼저 맛보고 싶었다.

택배 상자에 포장을 뜯고 술병의 마개를 열어 술잔에 따랐다. 쿰쿰한 누룩 냄새가 홀연히 피어올랐다. '소주' 하면 보통 초록색 병의 소주를 접해와서인지, 주정에서 나오는 에탄올 향에 더 익숙했다. 오히려 전통 방식으로 빚은 증류주에서 피어오르는 누룩의 향을 맡으니, 어쩐지 소주 같지 않아 낯설게 다가왔다. 그러면서도 오래전 어머니가 집에서 직접 띄우던 메주의 쿰쿰함 혹은 식혜를 띄우던 명절날에 밤새 맡아본 시큼한 냄새와 비슷해 아련한 향수를 자극하기도 했다.

나는 이 역설적인 향의 기억을 더듬으며 술잔을 입에 대고 천천히 입술을 축였다. 그러자 첫맛에 화사한 꽃향기가 피어올랐다. 술을 입에 잠시 머금고 있다가 삼키니 달고 구수한 누룽지 맛이 뒤따라왔다. 한 모금, 두 모금, 조금씩 더 맛보는 동안 왠지 모르게 신비롭고 따사로운 환영이 일었다.



'겨울'이라는 소주 이름, 흑백의 바탕에 눈발이 나리는 술병 디자인을 보면서 내가 상상한 맛은 쨍하도록 차가운 현대적인 겨울의 맛이었다. 그런데 겨울소주의 맛은 그런 차가움, 쨍함, 그리고 현대적인 것과 정반대의 지점에 있었다.

언젠가 한창훈 소설가의 단편 소설에서 본 장면과 대사가 떠올랐다. 소설 속 화자가 시리도록 추운 겨울날 주점에 들어가 주인과 술을 마시는 장면이었다. 한창 술기운이 무르익을 즈음, 주인이 이런 말을 내뱉었다.

"눈이 따시다는 것을 나는 그 사람이랑 있으면서 알었소. 산다는 것은 겨울에 따뜻한 것입디다."2)  

십여 년 전에 읽은 소설이라 제목도 내용도 잊었는데, 저 문장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와락 눈물을 쏟아낸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겨울소주는 마치 저 소설 속 문장을 재현한 듯한 맛이었다. 눈부시게 추운 겨울 날, 꽁꽁 얼어붙은 내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소주 한 잔. 더불어 겨울소주는 굉장히 여성적인 느낌까지 감돌았다. 단순히 여성적이라기보다는 모성에 더 가깝다고 해야 할까? 마셔보기 전에는 45퍼센트나 되는 도수에 지레 겁먹어 얼음을 넣고 희석해 마실까 었으나, 마시다 보니 마치 어머니 품에 안겨 있는 듯한 따뜻함을 굳이 차게 식히고 싶지 않았다. 작은 잔에 내내 소주를 따라두고 조금씩 나누어 마시는 사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뜻 모를 감상에 젖어 백석의 시 한 편이 떠올라 떨어지는 눈물방울을 훑으며 그의 시집을 펼쳤다.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 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싸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늬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옆 은댕이 예데 가리밭에서

하로밤 뽀오얀 흰 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녯날 한가하고 즐겁던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녀름볕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으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지방에 마당에 우물든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느 하룻밤

아배 앞에 그 어른 아들 앞에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 어른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 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여났다는 먼 녯적 큰마니가 

또 그 짚등색이에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 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녯적 큰아바지가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희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고 고담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_백석의 시, 「국수」 중에서



외롭고, 춥고, 고단한 겨울밤, 꽁꽁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는 상상을 해보았다. 아랫목에 누워 계시던 어머니가 느릿하니 눈을 부비며 일어나 부엌으로 들어가시더니 '희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하게' 끓여낸 국수 한 그릇 뚝딱 말아 겨울소주와 함께 반상에 소박하게 올려놓는 모습. 나는 그 상상으로 들어가 술잔에 소주를 찰랑하게 채우고 한 모금 더 들이켜 보았다. 입술과 목울대를 농밀하게 감싸다가 이내 가슴 저편에서 아스라이 따뜻해지는, 그것. 우리가 이 맑고 부드럽고 따스한 것을 잃지 않는다면, 아무리 시린 겨울에도 끝내 살아갈 수 있을 게다.



1) 술을 빚는 데 쓰는 발효제. 쌀이나 밀, 녹두, 찐 콩 따위를 굵게 갈아 반죽하여 덩이를 만들어 띄워서 누룩곰팡이를 번식시켜 만든다. 

2) 한창훈, 「밤눈」, 『나는 여기가 좋다』, 문학동네, 2009.



나는 여기가 좋다
나는 여기가 좋다
한창훈 저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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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김혜나(소설가)

소설가. 장편 소설 『제리』로 제34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소설집 『청귤』, 중편 소설 『그랑 주떼』, 장편 소설 『정크』, 『나의 골드스타 전화기』, 『차문디 언덕에서 우리는』이 있다. 제4회 수림문학상을 수상했다. 국내에서 요가 지도자 과정을 이수한 뒤 인도 마이소르에서 아쉬탕가 요가를 수련하고 요가 철학을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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