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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을 기다립니다] 아이완 작가님께 - 무루 작가

<월간 채널예스> 2022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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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이란 '낭만으로 시작해서 현실로 지나가는 능력'이라는 문장에 눈을 반짝이며 밑줄을 긋죠. (2022.09.05)


세상이 물속에 잠긴 듯한 여름입니다. 며칠째 비가 그치지 않고 있어요. 창밖은 종일 어둑하고, 세찬 비를 맞으며 풀들이 쑥쑥 자라요. 작가님의 글처럼 '커다란 나무를 심어도 될 만큼 허공에 습기가 가득'한 장마의 한가운데에서 이 편지를 씁니다.



오늘 같은 날에는 작가님의 『워터보이』가 생각나요. 온통 푸른빛으로 가득한 이 커다란 그림책을 저는 작가님의 지인으로부터 선물 받았어요. 여럿이 그림책을 함께 읽는 자리였고요. 절판이라 더는 구할 수 없을 테니 가진 것을 준다며 책을 건네주신 분은 작가님과 동창이라고 했습니다. 미대 진학을 한 차례 포기했던 작가님이 다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입학했던 학교에서 두 분이 만났다고요. 출간된 지 10년도 더 지난 책의 모서리는 곱게 낡아 있었어요. 아껴서 오래 본 태가 났죠.

그렇게 읽게 된 『워터보이』는 저에게 무척 반가운 이야기였어요. 낯설고 몽환적인 세계, 옆구리에 아가미를 가진 기묘한 소년, 그에게 찾아온 다정한 이방인들의 이야기 속에는 제가 바라던 관계의 이상적인 모습이 있었거든요.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그러나 간절히 바라는 형태의 사랑과 우정이었어요.



언젠가 김원영 작가님의 책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읽다가 '예의 바른 무관심'이라는 표현에 밑줄을 그은 적이 있어요. 그날 저는 밑줄 그은 페이지를 사진 찍어 SNS에 올린 다음, 농담처럼 예의 바른 무관심이라고 쓴 티셔츠를 제작하고 싶다고 썼죠. 얼마나 호응이 컸을지 짐작이 되시죠? 진짜로 티셔츠를 만들어 입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결국 그러지는 않았어요. 사람들은 분명 '무관심'에 더 시선을 둘 것 같았거든요.

제가 성장한 세계에서는 관심의 크기가 곧 애정의 지표라는 믿음이 컸어요. 서로를 침범하고 휘젓고 결국 뒤섞이는 것이야말로 깊은 관계의 미덕이라고 모두가 믿었죠. 그 끈끈하게 뒤엉킨 관계 속에서 저는 점점 더 지쳐가고 있었어요. 사랑이나 우정이 아니라고 반박할 수도 없었죠. 그 속에는 분명 사랑도 우정도 있었거든요. 사람들은 모두 틈 없이 서로를 꽉 끌어안은 채 커다랗게 뭉쳐져 하나로 굴러가고 있었어요. 견디는 게 힘들어서 왜 나는 혼자 이 모양일까 싶었어요. 할 수만 있다면 셸 실버스타인이 그린 이가 빠진 동그라미처럼 굴러가고 싶었어요. 혼자서, 제 생긴 모습대로, 갈팡질팡, 느릿느릿, 덜거덕거리면서요.

『워터보이』도 저에겐 그런 이야기였어요. 적당한 거리를 두고 각자 굴러가는 이들의 우정이 그 속에 있었어요. 이야기 속에는 혼자 보내는 심심한 시간들이 있고, 상대의 시간이 나와 다르게 흘러갈 때에도 서로 다그치거나 재촉하지 않죠. 인물들은 우정이 서로의 몸속으로 들어가 구석구석 탐험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요. 그것이 자칫 서로를 상처 입힐 수 있다는 것도요. 그래서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죠. 그리고 허락된 탐험이 끝난 뒤에는 미련 없이 타인의 세계를 빠져나와 다시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요. 경험만큼 기억이 의미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서요. 모든 것은 흘러가고 반복돼요. 물과 바람이 순환하듯이 말이죠. 이토록 섬세하고 성숙하며 사려 깊은 관계라니요.

작가님은 "제 나름의 세상에 살고 있을 법한 인물들에 대해 상상하길 좋아한다."고 하셨죠. 이것이 저에게는 우리 모두에게 저마다 어울리는 세상이 있기를 바란다는 말처럼 들려요. 작가님, 요즘 저는 자주 실재하지 않는 어떤 장소들을 머릿속에 그려보곤 해요. 그리고 그곳의 구체적인 모습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또 그들이 벌이는 이상하고 재미있는 일들을 상상하죠. 별수 없이 그 장소들은 현실 너머에 있고 얼마쯤 낙원의 모습을 하고 있어요. 가끔 이런 나약한 공상은 해서 뭘 하나 싶다가도, 상상이란 '낭만으로 시작해서 현실로 지나가는 능력'이라는 문장에 눈을 반짝이며 밑줄을 긋죠.

어릴 때는 상상이 무한한 것이라 믿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죠.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상상의 크기는 현실의 경계 끝에 서서 딱 팔 하나를 뻗은 만큼인 것 같아요. 가지를 멀리 뻗으려 하면 할수록 현실의 땅에 깊게 박힌 뿌리를 실감하게 돼요. 점점 더 낯선 이야기들에 매료되는 것은 아마도 그래서일 거예요. 뻗은 팔 너머의 세계에서 빚어진 이야기들, 먼 토양에서 자라난 이야기들이 늘 궁금해요. 그런 이야기들을 읽고 나면 짧은 가지 끝이 조금 더 길어지는 기분이 들어요.

그래서 저에게는 『워터보이』 같은 이야기가 소중해요. 책을 읽던 밤, 설레는 마음으로 작가님 이름을 검색해 봤어요. 책이 2004년에 출간되었으니 분명 이후 십여 년간 쌓이고 만들어진 이야기들이 있으리라 기대하면서요. 그런데 그림책은 딱 두 권뿐이었어요. 이듬해에 출간된 『구멍』 역시 절판이었고요. 작가님이 일러스트레이터로 이름을 올린 동화와 소설의 목록도 2014년에 멈춰 있었어요. 누구도 2014년 이후의 작가님 소식은 모르는 것 같았죠.

작가님, 이제 더는 이야기를 만들지 않으시나요? 그림을 그리지 않으시나요? 이제는 아이완이 아닌 황은주의 인생을 살고 계시나요? 뒤늦게 2010년에 발행된 어느 글을 읽고 작가님이 두 권의 그림책을 모두 마흔 즈음 쓰셨다는 걸 알았어요. 그게 또 저는 그렇게 반가웠어요. 평소 창작자의 나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지만, 동년배의 여성 작가에게만은 유독 친밀감을 자주 느끼거든요. 이건 아마도 제가 가진 어떤 외로움 혹은 두려움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워터보이』를 읽을 때 제가 딱 마흔이었거든요. 중년 진입을 앞두고 저는 오래도록 마음이 복잡했어요. 두려운 것들은 구체적인데 기대할 것들은 희미해서요. 꽤 오래 노력해서 이제 가지게 되었다고 믿었던 생활의 감각과 삶의 지표들이 무용하거나 흔들리기 시작했어요. 사는 방법을 다시 배우는 것 같은 막막한 기분이었죠. 그래서 중년 작가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늘 저에게 이야기 그 이상의 의미가 있어요. 딱히 어떤 답을 찾으려는 것은 아니에요. 그보다는 오히려 질문을 주고받는 일에 가깝죠.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길을 각자 더듬어 나가는 동안 서로의 발소리를 듣는 기분이랄까요.

이것이 꼭 창작자들끼리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요. 자기 삶을 잘 꾸려나가는 일은 사실 직업과 무관하니까요. 고백하자면 저는 작가가 아닌 작가님의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했어요. 너무 음흉하다고요? 하지만 이건 제 잘못이 아니에요.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작가의 신작이 몇 해가 지나도록 소식이 없으면 독자는 이제 그만 이 작가를 보내주어야 하나 고민하게 된다고요. 작가가 아닌 그의 삶을 수긍하고 응원해 주기 위해서라도 이 판타지는 꼭 필요해요.

그러니까, 바로 그런 이유로 시작된 제 상상 속에서 작가님은 단정한 차림으로 아침 출근을 하고,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와 간단한 식사를 준비해요. 주중에는 직장에서 서류들을 쌓아놓고 일을 하다가 주말이면 가족들과 도서관에 가거나 영화를 보고, 가끔은 사람들 속에 섞여 기분 좋게 술도 마시죠. 도무지 쉽게 윤곽이 드러나지 않는 상상 속 작가님의 희미한 얼굴은 다행히 무척 편안해 보여요.

하지만 제가 진짜 좋아하는 부분은 바로 지금부터예요. 늦은 저녁, 작가님은 테이블 스탠드가 켜진 책상에 앉아 있어요.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를 하는 중이죠. 종이 위로 연필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요. 책상 위에는 몇 장의 종이가 흩어져 있고, 그 위에서 연필 쥔 손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죠. 시간이 흘러요. 종이 위에서 쉴 새 없이 움직이던 손이 멈추고 서랍 문 하나가 열리면 그 속에는 종이들이 쌓여 있어요. 색과 선으로 채워진 오래된 그림들이에요. 깊은 밤, 쌓인 종이들 위로 새로운 그림 하나가 겹쳐져요.

작가님, 저는 기다리고 있어요. iwanroom의 방문이 다시 열리기를요. 서랍 속의 그림들이 하나로 꿰어지고, 오직 작가 아이완만이 만들 수 있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완성되기를요.

무루 드림.


추신 : 저는 작가님의 또 다른 그림책 『구멍』도 무척 좋아합니다. 이 그림책에 대해서는 이미 에세이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에 긴 글을 썼기에 편지에서는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워터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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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완 글그림
아트북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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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영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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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무루(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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