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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릭의 창작 일기] 내 얘기만 했네, 넌 어떻게 지내?

슬릭의 창작 일기 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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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이 가득 차올랐던 때가 떠오른다. 천장이 높았던 작업실에서 50만 원짜리 노트북으로도 노래를 만들고, 처음 간 동네 악기 가게에서 기타를 빌려 밤새도록 치기도 하고. 그때는 내 삶을 통과하는 모든 것이 노래가 되었던 것 같네. (2022.09.05)

일러스트_한아인

안녕. 오랜만이다. 잘 지내는지 모르겠어. 나는 잘 못 지내. 삶이 다 망가졌다. 한탄하는 것도 아니고 하소연하는 것도 아니니까 여기까지만 읽고 그만 읽지는 마. 뒤에 재미있는 이야기도 해줄게.

생각을 안 하려고 해도 계속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어. 그걸 떠올리지 않으려고 하니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남지가 않고. 그냥 견디는 거지 뭐. 하루하루 아무렇지도 않은 척 살아가는 거, 생각보다 쉽더라. 의미 없이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 그렇게 보내도 큰일 없다. 그 사실이 다행인가 싶다가도 엄청나게 무서워져. 그러니 매일 어떻게 하면 시간을 멈출 수 있을까, 그것만 고민한다. 어떻게 하면 온몸을 끊임없이 관통하는 시간의 적막을 깨버릴 수 있을까.

그래서 엄청나게 한심하게 살고 있어. 진부하지? 그래도 뭐 어떻게 하겠어. 키우던 고양이를 잃어버렸을 때 최대 한 달까지는 마음의 준비를 하자고 생각했었는데, 이 마음이 언제까지 갈지 기다리는 수밖에. 1년이면 끝날까? 5년이면 지금의 나를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다른 사람이 될 수 있 을까? 늪 같은 일이야.

난 예전에 사람들이 예능 프로그램을 왜 보는지 이해가 안 됐어. 재미를 느끼기 위해서라면 TV에서 하는 예능 프로그램만큼 지루한 게 없는데. 시답잖은 말장난이나 유치한 시비 걸기 같은 걸로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웃을 수 있을까. 몇 달 전에나 유행하던 트위터 밈으로 웃기려 하질 않나. 그런데 요즘엔 내가 하루 종일 예능 프로그램을 본다. 아무거나 봐. 집에 TV가 생기니까 보여주는 걸 보게 되더라. 엄청나게 위험한 일인데. 너한테 얘기하면서 지금 깨달았어. 다시 TV가 없는 삶으로 어차피 돌아가게 될 테지만 걱정은 좀 된다. 그래도 엄마랑 TV 보면서 이런저런 얘 기를 나누는 지금이, 하루에 한 마디도 안 하던 그때보다 나은 걸지도. 요새는 이성애자 데이팅 프로그램을 종종 보는데 재밌다. 깨진 아이패드로 보다가 몇 인치인지도 모르는 커다란 TV로 보니까 더 재밌어. 〈스트릿 우먼 파이터〉도 이걸로 봤으면 아주 댄서 되겠다고 할 뻔했다.

난 여전히 그 작업실 써. 그래서 그런지 고양이 생각이 많이 나. 내가 고양이 두 마리랑 같이 살 때, 한 마리를 잃어버린 적이 있거든. 테라스에서 뛰어내린 것 같아. 열흘 만에 찾았는데 그 열흘 동안 이 주변을 매일 시간 맞춰 돌아다녔거든. 숨어 있는 고양이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서 아침, 낮, 밤, 새벽으로 같은 길을 계속 다녔어. 여긴 재개발 구역이라 고양이가 숨을 만한 장소가 정말 많아. 그래서 더 천천히 둘러보던 곳들은 지나갈 때마다 기분이 이상해. 그때 만나던 길고양이들은 잘 지낼까. 지금은 새로운 얼굴들이 많이 생겼어. 언젠가는 다시 고양이랑 인연이 될 수 있을까? 꼭 그러고 싶어.

텅 빈 머리로 하루하루 견디다 보면 영감이 가득 차올랐던 때가 떠오른다. 천장이 높았던 작업실에서 50만 원짜리 노트북으로도 노래를 만들고, 처음 간 동네 악기 가게에서 기타를 빌려 밤새도록 치기도 하고.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너에 대한 노래도 만들었어. 너와 나에 대한 노래. 그 때는 내 삶을 통과하는 모든 것이 노래가 되었던 것 같네. 어떤 저녁, 비 오는 날, 크리스마스, '골든디스크' 하는 날... 그런 것들이 다 노래가 되곤 했는데, 이제 무엇으로 노래를 만들어야 하나 그 걱정이야. 중학생 때 엄청나게 좋아했던 가수의 신보를 몇 년째 못 듣는 그런 기분 알아? 음악으로부터 멀어진 것 같은 초조함에 대해서 친구들하고 얘기한 적도 있었는데. 아마 너한테도 얘기했었을 거야.

난 며칠 전에 노래 선물을 받았다. 내가 다람쥐 같대. 그런 말은 서른 평생 처음 들어봤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은 거울을 보면 내 얼굴이 내 얼굴이 아닌 것 같아. 큰일을 당하고 나면 관상이 좀 바뀌기도 하나? 평소에도 셀카를 잘 안 찍긴 하지만 요새는 카메라 속의 내가 너무너무 어색해. 다른 사람 같아. 그래서인지 자꾸만 예전 사진들을 꺼내 보게 돼. 전에 쓰던 휴대폰이 복구할 수 없이 망가져서 그때의 기억을 떠올릴 수 없어 슬프다. SNS에 조금 올려뒀던 것들을 그나마 건졌지 뭐.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시간이 오래되어서, 그동안은 아무것도 업로드하지 않아서 오랜만에 포스팅하는 것도 민망하고. 나는 아직도 사람들 눈치를 엄청 보나 봐. 그동안 많이 극복했다고 생각했는데.

며칠 전에는 엄마랑 고민 상담을 했는데, 문득 어느 날이 생각났어. 서울 한남동 살 때였는데 아주 오랜만에 엄마랑 식사 약속을 잡았어. 엄마가 예전에 다니시던 회사 앞에 채식으로 먹을 수 있는 메뉴가 있는 식당에서 밥 먹고 그 근처의 북카페를 갔어. 나는 엄마한테 『아내 가뭄』을 추천했는데 그걸 계기로 엄마랑 '아내의 삶'에 대해서 길고 오랫동안 이야기를 했었거든. 그때 비로소 엄마와 대화하면서 '엄마와 딸'이 아니라 '윤○○와 김령화'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서 가족 간의 물리적 거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체감했어. 그런데 다시 엄마랑 같이 살다 보니까 우리는 또 '엄마와 딸'로 이야기하고 있더라고. 그때가 묘하게 그리워. 얼른 독립을 해야겠지? 결혼 생각이 없어서인지 독립이 막연하다. 혼자 살고 싶지는 않은데.

조카 현우가 태어나고 나서부터 우리 집 분위기가 바뀌었어. 아빠가 그렇게 웃는 얼굴을 태어나서 처음 본 것 같아. '내가 아기 때도 나를 보고 그렇게 웃었을까?' 생각하면 지금 아빠 얼굴이 너무 무섭다. 현우는, 어떻게 이런 아기가 있지 싶을 정도로 순하고 잘 웃어. 혼자서도 잘 놀고 칭얼거리지도 않아. 같이 사는 건 아니지만 우리 집에서 몇 번 자고 갔거든. 언니가 매일매일 현우 사진이랑 동영상을 오십 개쯤 보내주는데 더 줬으면 좋겠어. 벌써부터 그 애랑 놀 생각을 하면 설레고 신이 나. 날 좋아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좀 친해지고 싶어. 그리고 곧 생각해. 나도 아이를 가질 수 있을까? 미국 애니메이션 〈스티븐 유니버스〉의 등장인물 가넷의 퓨처 비전으로 보면 그런 미래의 나도 있을지 너무너무 궁금해. 새로운 가족이 생긴다는 것.

우리는 시간 위에 살고 있으니 원인과 결과를 가리고,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 현재에 영향을 끼치는 걸 체득하지. 내 과거의 커다란 부분을 뜯어내려니 지금의 내가 휘청거린다. 내가 누군지도 종종 잊고, 마음이 약해졌어. 매일 쓰던 일기장을 잃어버리면 이런 기분일까. 가면 쓰지 않은 나를 유일하게 마주 볼 수 있던 순간이 사라져 버린 거야. 혹시 너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시간이 많이 지났다면 어떻게 그 시간들이 지나갔는지도 듣고 싶고.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너의 마음을 알 수 있을 날이 오길 바라.

더운 여름이 지나가고 있어. 올여름은 하나도 안 더울 줄 알았는데 제법 덥네. 이 동네에서의 여름은 처음인데, 느긋하고 푸르다. 새벽에 아기 웃는 소리가 나서 창문 밖을 내다보면 앞집 꼬마가 일찍부터 물놀이를 하고 있어. 그 애는 세 살쯤 됐는데 말이 하나도 없고 손가락으로 모든 걸 해결 해. 원하는 것도, 자랑하고 싶은 것도, 신기한 것도 모두 쪼그만 검지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다녀. 내가 "이모 어디 있어?"했을 때 나를 가리키는데 동영상으로 찍어 뒀어. 

요새는 아침 일찍 작업실로 출근하고 집에 가서는 야구 중계를 봐. 두산은 작년까지가 전성기였는지 영 맥을 못 춰. 너는 여전히 투덜거리면서 지고 있는 경기를 계속 보는 나를 이해할 수 없겠지. 근데 이게 생각보다 중독성이 있어. 언젠가는 너도 야구의 재미를 알게 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난 운전하는 재미를 좀 알고 싶은데 영 기회가 생기질 않네. 아무 때나 대중교통 없는 곳이라도, 가고 싶은 대로 갈 수 있는 기분은 어떨까? 정말 신날 것 같아. 그런데 왜 난 신나고 싶지가 않은 걸까?

내 얘기만 했네. 넌 어떻게 지내?



아내 가뭄
아내 가뭄
애너벨 크랩 저 | 황금진 역 | 정희진 해제
동양북스(동양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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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슬릭(뮤지션, 작가)

뮤지션, 작가. 누구도 해치지 않는 노래를 만들고 싶다. 『괄호가 많은 편지』를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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